한국 남성주체의 자기표상과 여성혐오 이데올로기: 심영, 빌리, 보슬아치

Critique 2014. 8. 10. 04:37

사실 아래의 논의는 3년 전, 즉 2011년 경부터 그 대략적인 얼개가 갖추어져 있었다. 지금에서야 글로 옮기는 것은 다소 늦은 일일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있으나, 원래 머릿속에 품은 생각은 어떻게든 한 번은 글로 풀어내는 게 성격에 맞기도 하거니와 나 자신이 오늘날의 현상을 설명함에 있어서도 일종의 전제로 간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아 하루 시간을 잡아 글을 쓰게 되었다. 어색한 문장이라든가 군데군데 전개가 조금 튀는 부분이 있지만, 대략의 요지를 파악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나 보충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기탄없는 지적을 바란다. 어쨌든 이와 같은 논의를 기초로 우파적 심성을 분석하는 작업이 조금 더 잘 진행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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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일차적인 목적은 지난 수 년 간 한국의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여성혐오 이데올로기의 증대를 대중문화의 표상들을 통해 구축된 남성주체의 이미지와 연결지어 설명하는 것이다. 수년 간 온라인 상에서 확산되고 있는 여성혐오는 여성을 오로지 섹슈얼리티와 결합시킨다는 데서 여성-섹슈얼리티를 갈망하는 남성주체를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곧 현재의 여성혐오는 남성주체의 시선에서 구성된 여성혐오로서, 여성혐오의 증대 및 그 성격을 이해하는 작업은 상징적 차원에서 형성된 남성주체를 분석하는 작업과 분리될 수 없다. 흥미롭게도 지난 수 년 간 한국의 온라인 커뮤니티, 특히 '유머'와 관련된 대형 커뮤니티는 온라인 네트워크의 이용자들에게 한국 남성이 상징적으로 어떻게 이해되는가를 참고할 만한 서브컬처적 요소들을 지속적으로 드러내었다. 나는 우선 그러한 서브컬쳐적 요소들의 분석에서 출발하여 한국 남성주체의 상징적 자기표상을 재구성한 뒤, 이를 여성혐오의 논리와 연결시켜 설명하고 최종적으로 수 년 간 한국사회에서 진행되어 온 물질적 변화와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분석하는 기본적인 논리를 제공하고자 한다. 미리 말해두건대, 여기에서 다룰 자료와 현상들은 전혀 고상하지도, 사람의 마음을 위로해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이러한 논리에 따라 사고하며 때로 이것들을 적극적으로 향유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데올로기는 자신이 파고들어야 할 논리의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데올로기를 검토하려는 시도 역시 귀천을 가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1. 심영(고자)과 빌리(게이)



 한국의 대중적인 온라인 커뮤니티를 조금이라도 접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난 수 년 간 가장 지속적으로 활용되어 온 "필수요소", 곧 웃음을 유발하는 공통의 코드로 "내가 고자라니"라고 외치는 중년 남성의 이미지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2002년 7월부터 2003년 9월 말까지 SBS에서 평균 시청률 30% 가량을 기록하며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야인시대>의 등장인물 '심영'은 정치적 혼란기의 적백갈등 속에서 고환("영 좋지 않은 곳")에 총을 맞고 "고자"="성불구자"가 된다. 중요한 사실은 드라마가 종영된 후 수 년이 지난 2008년 경부터[각주:1] 이 대목, 곧 인물이 총을 맞고 성불구자 진단을 받은 뒤 절규하는 내용이 DCinside를 통해 가장 널리 활용되는 이미지가 되었다는 데 있다. DCinside의 이용자들은 초기부터 패러디와 패스티쉬pastiche를 통해 기존의 이미지-질료들을 재구축하여 새로운 효과를 내는 "합성물"을 만들어 내어 네크워크 상의 유희문화를 주도해 왔다. 이들을 거쳐 심영 또는 고자의 이미지는 2008년을 전후로 가장 폭넓게 사용되는 질료가 되었으며 그 시점으로부터 다시 6년이 지나 DCinside가 당시와 같은 영향력을 갖지 못한 지금까지도 여러 대중문화 및 서브컬처에서 망각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나는 곧바로 고자, 즉 남성 성불구자의 이미지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해명하기 전에 그와 유사한 시기, 즉 2000년대 후반부터 마찬가지로 매우 넓게 활용되어 온 또 다른 '필수요소'를 지적하고자 한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게이, 즉 남성 동성애자의 이미지다. 유의해야 할 것은 필수요소로서 게이 이미지의 상승을 1990년대부터 이어져온 성소수자 운동 및 LGBT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는 별개의 흐름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한국 사회의 성차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바꾸는 데 있어 실제의 성소수자 운동이 수행한 역할을 무시할 수 없으며, 애초에 게이 이미지가 준-공식적인 문화적 요소로 등장할 수 있게 된 배경도 이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발견되는 특정한 형태의 게이 이미지는 실제의 성소수자의 삶과 무관한, 철저히 (한국의 '표준적 주체'로서의) 이성애자 남성주체의 시각에서 구성된 타자의 상징적 표상이다. 실제로 서브컬처에서 가장 널리 활용되는 빌리 헤링턴("Ang?"이란 문구가 그를 대변하여, 심지어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환경에서도 그의 이미지가 상기된다)[각주:2]은 단순히 남성을 대상으로 성애를 품는다는 점에서 게이가 아니라 (근육질의 신체능력을 바탕으로) "남성을 강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빌리 헤링턴을 필두로 한 서브컬처에서의 게이 이미지는 고전적인 동성애공포증homophobia에 입각하여 (이성애자) 남성을 성적으로 수동적인 '당하는' 위치로 몰아놓는 특정한 형태의 표상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독해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고자'와 '게이'의 이미지가 동시대의 한국 온라인 커뮤니티 및 서브컬처에서 너무나 폭발적이어서 일상적인 표상으로 받아들여질 정도까지 수용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와 같은 코드를 활용한 서브컬처 텍스트 두 편을 살펴보겠다. 먼저 2009년 2월에 DCinside 합성 갤러리에 올라와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Dr. Gothick의 음성합성물 "肉중주"를 보자[각주:3]. 여기에서 Dr. Gothick("고두익")은 노골적으로 남성 강간의 구도를 활용한다. 저격을 당해 "고자가 된" 심영을 의사선생, 김두한, 상하이 조가 계속해서 삽입 섹스의 형태로 강간한다(침대의 삐걱거리는 소리와 신음 소리가 성행위를 가리키는 오래된 대체물임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미군"이 빌리 헤링턴임을 알려주는 소리(점점 커지는 "Ang")는 최종적으로 심영이 빌리 헤링턴으로부터 가장 끔찍한--왜냐하면 근육질 백인 게이의 남근은 앞서의 등장인물들의 것보다 더 클 것이므로--곤경을 맞이할 것임을 말해준다. 이 텍스트에서 심영=고자는 단순히 자신의 남근을 거세당할 뿐만 아니라 다른 남성들의 성기에 관통당함penetrated으로써 명백히 수동적인 위치에 놓인다[각주:4]. 특히나 빌리 헤링턴=(남성을 강간하는)게이와 대면하는 순간, 거세당한 남성은 오로지 삽입당할 수밖에 없는 기관인 항문(명백히 여성의 질에 대응하는)만을 가진 존재, 더 크고 강력한 존재의 성기에 삽입당하는 존재로서 기존 남성주체의 지배적인 위치를 상실하고 "여성화"되는 것이다. 이 작품 이상으로 인기를 끈 엉덩국의 온라인 만화 <성 정체성을 깨달은 아이>[각주:5]를 보자. 줄거리는 분명하다. 갓 "성 정체성을 깨달은", 그러니까 사실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아직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한 소년 "존슨"("존슨"은 남성 성기를 가리키는 온라인 상의 속어 표현이다)이 '진짜' 게이들을 만나고 결국에 몇몇 과정을 거쳐 그들의 일원이 된다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게이바'의 (당연히 근육질의 건장한 육체를 가진 것으로 그려지는) 게이들 앞에 선 소년은 주저하고 두려움에 빠지며--'저택 입구의 문이 잠기는' 공포영화의 클리셰가 활용된다--이후 게이들은 존슨을 성적으로 추행한다. 게이들은 존슨의 (전형적인 여성적 외모의 상징인) "큰 엉덩이"를 스팽킹하고 항문에 딜도를 꽂아넣으며, 이후 추격전에서 붙잡혔을 때 아마도 삽입섹스-강간이 이루어질 것임이 암시된다. 핵심은 게이들과 대면한 존슨의 몸이 남성적 성행위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적" 육체의 특징을 가진 것으로 표현되며, 게이들과 대면하여 남근 혹은 유사-남근을 삽입당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이 "게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평범한 이성애자 남성이었을) 존슨의 성 정체성이 실제로 변형된다는 것에 있다.


 이 두 텍스트를 독해했을 때 고자=남근 거세의 모티프와 게이=남성 강간(남성주체가 성기를 삽입당하는 것)의 모티프는 분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하나의 의미를 표현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곧 한국사회에서 표준적인 이성애자 남성은 기존까지 자신에게 부여되어 온 특권적인 위치, 곧 남근=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삽입하는=능동적인/지배적인 위치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남성주체는 고자가 되었을(남근을 거세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더 강력한 남근을 지닌 타자(게이)에 의해 삽입당하는 주체로 전락한다. 요컨대 고자-게이 모티프는 2000년대 후반 이후 한국의 남성주체가 스스로를 어떻게 표상하는지를 상징적인 층위에서, 그러나 매우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곧 일종의 무능력, 무기력, 수동성, 발기불능과 같은 좌절섞인 정념들이 이러한 모티프들로 둘러싸인 남성주체의 곤란을, 적어도 남성주체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2. 보슬아치(여성혐오), 원한ressentiment의 심리구조



 흥미롭게도, "보슬아치"라는 단어가 남성중심적 온라인 커뮤니티 곳곳에서 사용되며 퍼져나가기 시작한 시점은 고자 및 게이의 모티프가 일반화되고 있던 때와 근접한 2009년 경이다[각주:6]. 이 속어적 표현은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이 여성 성기를 지칭하는 표현과 "벼슬아치"가 결합한 단어로,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다양한) 이윤추구를 위한 하나의 수단("벼슬")으로 간주하는 여성의 행동양식을 가리킨다. 물론 그보다 수 년 전에 등장한, 그리고 아마 직접적으로 연계된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된장녀" 및 "꼴페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근대 서구를 포함한 다양한 시공간에서 여성폄하-혐오의 이미지는 무수히 발견된다. 그러나 "보슬아치"는 매우 노골적으로 섹슈얼리티와 여성, 그리고 자본주의적 인간관계의 문제를 결합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 주의깊게 살필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사회의 자본주의화가 진행되면서 여성을 자본 혹은 그와 유사한 사회적 권력에 자신을 판매하고 그 부를 향유하는 '창녀'로 격하시키는 구도는 드물지 않게 나타난다. 예컨대 1910년대에 절찬리에 공연된 <장한몽>(長恨夢)[각주:7]은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이수일과 심순애", 즉 자신의 사랑을 버리고 부유한 김중배와 결혼하는 여성인물을 묘사한다. 이러한 텍스트들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성과 자본의 교환관계는 "보슬아치"에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표현은 직접적으로 여성 성기를 거명한다는 점에서 조금 더 노골적인 여성혐오/폄하 전략을 취하고 있는데, 곧 '동물적인' 섹슈얼리티[각주:8]를 표현하는 여성 성기--물론 이때의 섹슈얼리티는 이러한 명명을 수행한 남성주체의 삽입욕망을 투명하게 드러낸다--가 여성을 대체하며 다시 이러한 대체물이 자본주의적 상품교환관계의 판매되는 상품으로 간주된다. 즉 이 표현에서 여성은 시민이라기보다는 (푸코적 생명정치biopolitics를 염두에 두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울텐데) 동물적 존재로, 또한 자본 및 권력에 기꺼이 자신을 판매하는 (도덕적으로 열등한) 존재로서 이중적으로 비하당한다. 최근에 다시 유행하는 여성혐오적 유머[각주:9] 역시 '이중적 비하'의 이러한 도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나는 이러한 표현의 등장을 곧바로 사회적으로 분석하기 전에 이 표현에 함축된 전제들을 조금 더 밝혀보고 싶다. 앞서 짧게 말한 바와 같이 "보슬아치"는 여성을 두 가지 항목, 곧 (동물적인) 성과 자본주의 상품판매관계와 연결시킨다. 핵심은 그 두 가지 항목이 전부 남성주체의 성욕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왜 여성의 성이 표상되는 질료가 여성의 성기여야만 하는가? 당연히 남성주체의 삽입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벼슬아치' 또는 성 판매자의 역할은 성 구매자의 존재를 필요조건으로 요구한다. 그리고 삽입과 구매는 각각 성적인 관계와 상품교환관계에서 지배적인 위치와 연결되어 있다. 다시 말해 앞서 말했듯 "벼슬아치"가 성=동물적, 자본=비도덕적 존재로 이중적으로 여성을 비-주체화하는 표현이라면, 여기에서 여성에 대해 이중적으로, 곧 성과 자본의 관계를 통해 지배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남성주체의 욕망을 끌어내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이와 같은 여성혐오적 표현을 통해 남성주체의 지배욕망이 발현된다는 수준의 분석에 머무르고 싶지 않다. 엄밀히 말해 이와 같은 욕망은 대부분의 근대사회에서 편재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러한 구도의 존재 자체에 질문하기 전에 그러한 욕망이 거의 항존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왜 2000년대 후반의 시점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날 정도로 여성혐오가 나타났는가, 그리고 왜 새삼스럽게 "보슬아치"라는 표현이 등장해서 유행하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즉 여성을 종속시키려는 의지가 존재해왔고, "보슬아치"는 어떤 면에서 그와 같은 의지를 너무나 충실히 실현하는 여성상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왜 분노와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여기에 앞서 1절에서 수행한 분석을 참고할 수 있다. 즉 오늘날 온라인에서 한국의 남성주체는 스스로를 거세되었으며 강간에 취약한, 다시 말해 성적인 지배권을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성적으로 지배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존재로 표상한다(이는 심지어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엘리트 남성들조차도 종종 "여성상위시대"를 노골적으로 불평한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상징적 표상'이 가장 곤란해 처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남성 주체에게 여성을 지배하는 역할을 요구하고 부여하는 기존의 논리와 맞닥트리는 순간이다. 쉽게 말하자면, "보슬아치"들은 남성에 의한 지배를 거부하기 때문에 남성주체를 곤란에 빠트리는 게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남성에게 지배자로서의 역할을 요구하기 때문에 무능력하게 표상된 남성주체를 곤란에 빠트린다; "보슬아치"는 남성주체에게 스스로의 무능력과 성취될 수 없는 성욕만을 상기시킬 뿐이다. 남성주체는 지배하기 위해서 폄하하는 대신 지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분노하고, 증오하며, 원한ressentiment--정확히 "약자의 원한"이라는 니체적인 모티프를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을 품는다. 그것이 무력한 스스로에 대한 질책이 아니라 마땅히 자신이 지배해야 하지만 지배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원망으로 투사하는 기제와 여성혐오의 정서는 근본적으로 무관하지 않다. "나는 무력하다, 그러므로 네가 나쁜 것이다"; 이러한 심리구조가 여기에 있다[각주:10].




3. 조건: 물질적인 것과 이데올로기의 간극



 지금까지 두 절을 거치며 한국 남성주체의 자기표상과 이것이 어떻게 여성혐오의 심리구조로 이어지는가를 서술했다. 나는 3절에서 이러한 심리구조가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가를 거칠게나마 설명해보고 싶다. 2절의 마지막에서 밝혔듯 "보슬아치"와 같은 여성혐오는(나는 여성혐오 일반을 서술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남성주체가 스스로의 무력함을 자각하게 되는 메커니즘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 조금 다르게 서술한다면, 남성주체는 성욕의 대상으로서의 여성 앞에서 자신의 현재적 조건(고자-게이의 모티프로 대비되는 무능력)과 자신에게 주어진 '규범'(성과 자본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을 것) 사이의 간극을 마주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한의 심리구조는 이러한 간극이 기존의 논리로 포섭될 수 없을 때 출현하는 하나의 형상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눈을 돌려 이와 같은 간극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벌어지게 된 이유를 질문할 수 있겠다.


 그것이 연애의 형태이든, 결혼 및 (이성애적) '정상가족'을 생성하는 형태이든 여성을 소유/종속/지배/부양하는 과정은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에 여전히 속박된 남성주체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지배력을 요구하며, 오늘날 그 지배력은 자본의 형태로 표현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한국의 조건은 2-30대 남성주체들에게 여성을 소유하기 위해 필요한 자본축적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굳이 대단한 경제적 지표를 참고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이러한 인식은 결혼, 연애,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각주:11]와 같은 용어를 통해 사회구성원들 자신들에게 인정받았으며, 실제로 전체 가구수의 1/4에 육박한 1인 가구수[각주:12]와 같은 변화는 (집값을 제외하고--그러나 집값이야말로 가장 큰 비용이 아닌가?) 7천만원에 육박하는 평균 결혼비용[각주:13]과 함께 고려할 때 줄어든 실질소득의 압박이 연애 및 결혼,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의 종속을 요구하는 관계를 성립시키기 위한 자본축적을 무척이나 어려운 것으로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압박은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가해지며, 구직을 포기하고 결혼을 통해 생계를 확보하고자 하는 (아마도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거의 반동적인 사태로 비춰질) "취집"과 같은 선택은 그러한 곤란을 보여준다. 요컨대 남성주체들이 과거에 가능하리라고 믿었던 형태로 여성에 대해 지배적인 위치를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상당히 줄어들었다. 물론 이전의 시대에도 가구의 실질적인 소득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남성이 여성/가족을 부양하는 것처럼" 믿어져 왔으며, 그와 같은 믿음을 깨트리지 않을 정도의 자본을 남성들이 획득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오늘날의 차이는 그러한 믿음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데 기인한다.


 이와 같이 물질적인 조건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에 대해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가 한국 남성주체의 의식을 점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앞서 말했듯 여성에게도 작용하는 경제적 압박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유지에 기여하는 면도 있다) 현실과 규범 사이의 간극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히 나타난다. 지금과 같은 물질적인 조건 위에서 한국의 남성주체는 현재의 이데올로기가 그에게 부과하는 이상에 부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다. 규범-이상에 부합할 방법을 찾지 못한 남성주체의 곤란은 앞서 1절과 2절에서 묘사한 두 가지 방식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남성주체 자체의 무력함을 상징적으로 표상하는 모티프들(고자-게이)이며, 다른 하나는 그와 같은 무력함으로 인해 발생한 원한을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에게 투사하는 여성혐오의 모티프다. 전술한 바와 같이 얼핏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모티프는 사실 동일한 구도를 구성하는 양면과 같다. 곧 무력함이 여성혐오를 낳으며, 여성과의 대면이 무력함을 일깨운다. "원한의 심리구조"는 이 둘을 연결시켜 하나의 현상으로 파악할 때 나타난다. 이는 애초에 한국의 남성주체가 이성애적 섹슈얼리티의 구도에 기초하는 한, 그리고 그 관계가 권력-지배관계의 형식을 띠고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모든 문제를 리비도의 차원으로 환원시킬 생각은 없으며, 원한의 심리구조는 리비도의 문제에서 나타났을지언정 리비도의 차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논의를 다소 비약시키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원한의 심리구조로부터 출발할 때 2010년대 한국에 새롭게 나타난 극우파적 성격을 해명하는 하나의 방법이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각주:14]. 곧 일베와 같은 초-극우파적 담론만이 아니라 '어버이연합'을 위시한 보수폭력집단 또한 그 심리적인 동력을 원한의 심리구조로부터 끌어내고 있는 면이 있다. 뒤집어 말한다면, 오늘날 등장하는 극우파적 성격은 물질적인/제도적인 조건에서의 전환만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의 전환이 함께 실행될 때 비로소 극복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글에서 시도된 것은 한국 사회의 이데올로기 비판을 위한 하나의 정초적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서브컬처에 대한 자료를 모아놓은 리그베다위키의 "내가 고자라니" 항목 참조(참조일 2014년 8월 9일). http://rigvedawiki.net/r1/wiki.php/%EB%82%B4%EA%B0%80%20%EA%B3%A0%EC%9E%90%EB%9D%BC%EB%8B%88 [본문으로]
  2. 리그베다위키 "빌리 헤링턴" 항목 참조(참조일 2014년 8월 9일). 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9%8C%EB%A6%AC%20%ED%97%A4%EB%A7%81%ED%84%B4 [본문으로]
  3.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composition_dc&no=75615&page= (참조일 2014년 8월 9일) [본문으로]
  4. 고대 그리스의 남성 동성애 관계에서 삽입 및 피삽입과 능동성/수동성이 갖는 의미에 관해 서술한 미셸 푸코의 <성의 역사 2권: 쾌락의 활용>을 참조한다면 내 진술이 조금 더 분명히 이해될 것이다. [본문으로]
  5. http://blog.naver.com/undernation/130100558497 참고일 2014년 8월 9일. [본문으로]
  6. 리그베다위키의 "보슬아치" 항목 참조. (참조일 2014년 8월 9일) 이 항목에서 제시하는 발생원인 등의 항목은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http://rigvedawiki.net/r1/wiki.php/%EB%B3%B4%EC%8A%AC%EC%95%84%EC%B9%98 [본문으로]
  7. <장한몽>은 근대 일본의 작가 오자키 고요의 <금색야차>를 번안한 것이다. 기초적인 사실관계 및 줄거리는 한국어 위키피디아 <장한몽(조중환)> 항목 참조. (참조일 2014년 8월 9일) http://ko.wikipedia.org/wiki/%EC%9E%A5%ED%95%9C%EB%AA%BD_(%EC%A1%B0%EC%A4%91%ED%99%98) [본문으로]
  8. "보슬아치"와 연결되는 표현인 "부왁"이 애초에 여성 성기에서 갑자기 애액이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장면을 묘사하기 위한 의성어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마찬가지로 여성을 동물적인 섹슈얼리티에 종속되는--그러므로 특정한 성적 자극을 가하면 자기 주체성을 상실하고 동물적인 성욕, 남성의 욕망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성욕에 지배당하는--존재로 그려내는 서사와 관련이 있다(이 점에서 한국 남성주체의 표현에 일본의 성인만화가 끼친 영향을 분석하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이다). [본문으로]
  9. "연봉 5억 이상 결혼할 남성 구합니다"의 여성혐오 이데올로기에 대한 간략한 분석노트로 나의 글을 참조 . http://begray.tistory.com/115 [본문으로]
  10. 여기에서 다루지는 않겠지만, 한때 온라인만이 아니라 오프라인까지 한국사회를 뒤덮었던 "찌질이" 정서가 변모하는 과정은 이러한 구도와 무관하지 않다. [본문으로]
  11. 한국어 위키 "삼포세대" 항목 참조(참조일 2014년 8월 10일) http://ko.wikipedia.org/wiki/%EC%82%BC%ED%8F%AC%EC%84%B8%EB%8C%80 [본문으로]
  12. 중앙일보 기사 참조(참조일 2014년 8월 10일)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2309098 [본문으로]
  13. 링크한 중앙일보 기사 참조(2014년 8월 10일). 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5200887&cloc=olink|article|default [본문으로]
  14. 우리는 2008년 여름, 곧 "고자"의 모티프가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한 시점과 반정부/저항운동의 성격을 띠었던 광우병 촛불의 최종적인 패배의 시점이 꽤나 근접해 있음을 상기할 수 있다. 촛불의 패배와 극우파적 심성의 등장을 연결시키는 논의로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 등을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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