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서평 쓰기를 위한 짧은 지침
1학기 수업 기말서평과제 첨삭내용을 돌려주면서 '학술서평 쓰기를 위한 짧은 지침'이라 할만한 걸 덧붙였다. 서평은 대학(원) 교육에서, 또 책 읽는 일상에서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글쓰기 장르다. 실제로 서평 쓰기에 대한 조언도 찾아보기 어렵지 않지만, 대체로는 무슨 내용을 어떤 형식으로 쓰라는 데 초점을 맞추며 글쓰기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다. 나는 적어도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라도 자신이 왜, 무엇을 위해 글을 쓰고 있는지를 분명히 이해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 지침이 '학술서평의 독자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하는 이유다.
분명 글은 자기표현의 한 가지 수단이다. 그러나 공적인 글쓰기는 독자, 독자 배후에 있는 세계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제대로 실현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학술서평은 '독후감'과 달리 공적이고 사회적인 장르다. 동시에 학술서평은 이미 상당히 전문화된, 지적으로 고도화된 세계와의 대면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사회화된 주관을 표명하는 일과도 구별된다. 좋은 학술서평은 텍스트를 서평자 자신의 언어로 재서사화하면서도 동시에 통상적인 독자들이 붙잡을 수 없는 지점을 끌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깊이의 흔적을 남긴다. 그러한 독서는 별점을 부여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사회화된 주관'의 존재양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행위다.
오늘날은 과거 어느 때보다 다수의 인정을 생생하게 물질화하는 세계이며, 그 안에서 다수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의 상징적 가치는 급하락한다. 학술서평의 대상이 되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사회의 평균적 취향에 자아를 내맡기지 않으려는 노력을, 학술서평을 쓴다는 것은 그러한 자아의 표현방식을 아주 세밀하게 다듬는 노력을 요구한다--'나는 별점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그러한 반시대적 글쓰기를 매력적으로 느낄 사람이 얼마나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바로 그런 분들에게 이 간략한 지침이 도움이 되면 좋겠다.
앞으로 여러분이 글을 쓸 때 반드시 염두에 두면 좋을 한 가지 사항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어떤 독자에게, 무슨 목적으로 글을 쓰는지 분명하게 파악하고, 글을 마무리할 때까지 이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말과제인 학술서평 쓰기의 경우, 독자와 목표는 각각 어떻게 될까요? 예상독자를 판단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보통은 해당 분야 또는 인접 분야의 (대학원생을 포함한) 연구자겠죠. 조금 더 고민해보면, 아직 직접 읽지는 않았지만 이 책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연구자, 혹은 읽었어도 동료 연구자의 평가나 이해가 궁금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독자의 성격을 정하고 나면 학술서평의 목적 혹은 기능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서평 독자가 자신이 책을 직접 읽어봐야 할지, 자신의 연구에 필요한 내용이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게 그것입니다. 바꿔 말해, 좋은 학술서평을 쓰기 위해서는 역으로 서평자가 직접 여러 학술서평을 읽어보면서 어떤 식의 글쓰기가 독자에게 도움이 되고 아니고를 판단해보는 경험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좋은 저자는 좋은 독자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서평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럼 유용한 학술서평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야 할까요? 물론 연구자의 시선을 전제로 책의 핵심적인 내용이나 논쟁적인 지점, 주목할 만한 사항 등을 충실히 전달하는 게 중요하겠지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봅시다. 편의상 여러분이 어딘가의 던전을 탐험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가정해봅시다. 일단 그 던전이 어느 대륙, 어느 땅에 위치해 있는지 표시된 세계지도가 있으면 좋겠죠. 전체 미로의 구조를 거칠게나마 묘사해놓은 지도가 있으면 탐험계획을 짜기 쉬울 거고요. 여기에 직접 탐험을 해본 사람이 어디에 함정과 괴물이 있는지, 보물은 어디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정리해놓은 기록이 있으면 정말 큰 도움이 되겠죠?
이제 이 유비를 학술서평에 적용해봅시다. 첫째, 던전의 위치를 표시해놓은 세계지도와 같이, 해당 도서가 연구사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학술적인 지도와 맥락을 제시해줘야 합니다(가령 똑같은 책이라 해도 철학, 문학, 역사 연구자는 완전히 다른 평가를 내릴 수 있겠지요?)--다만 과제물로 쓰게 된 서평처럼 본인이 연구분야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는 이 부분은 포기하는 게 맞겠죠. 둘째, 특히 어느 정도 이상의 분량이 되는 저작의 경우, 마치 던전 전체 지도처럼 책의 전체적인 구조 및 주요한 키워드·주제를 간결하게 도식화·정리해서 제시해주면 좋습니다. 셋째, 모험 일지와 마찬가지로, 직접 책을 읽으면서 각각의 부·장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고, 그중 어떤 대목이 주목할 가치가 있는지 (혹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지) 강조해서 짚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능하다면 그러한 대목들을 바탕으로 책이 전체적으로 어떠한 서사를 그려내고 있는지 재구성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상기한 내용이 충실한 요약의 요건이라면, 무난한 서평과 뛰어난 서평을 가르는 기준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서평자의 깊이 있는 독서에서 우러나온 논평입니다. 가령 책 전체 내용을 아우른 뒤 이것이 연구사의 기존 흐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운이 좋다면 기존 흐름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를--짚어준다거나, 던전의 '보물'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정확히 평가한다거나, '모험가'가 독서를 통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지 제시한다거나 등등이 있겠지요. 즉 단순히 사적 개인으로서의 감상이나 평가를 늘어놓는 대신, 해당 연구분야를 일정 정도 이상 이해하고 있는 동료 연구자로서 책의 의미와 가치를 정확히 판단하는 것, 그것이 학술서평에서 요구하는 논평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평 쓰는 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보통은 언급하지 않는 팁을 하나 덧붙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서평은 지도와 같습니다. 지도의 핵심은 주어진 지면에 지면보다 수천수만배 이상 넓은 세계의 정보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담아내는 것입니다. 서평도 마찬가지로 대상 도서에 비해 매우 짧은 지면만이 주어진 장르입니다(700쪽 짜리 책에 700쪽 짜리 서평을 쓴다면, 그건 서평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겠지요). 공간의 제약은 효율성을 요구하기에, 서평자는 극도로 효율적으로 글을 써야 합니다. 서평자는 꼭 이야기해야 하는 내용과 아닌 바를 냉철하게 구별하고, 하나의 문장에 그 이상의 정보를 담아내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어려워보이지만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냥 나오는 대로 글을 쓰는 대신, 서평의 구조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짜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한번 쓴 글을 그냥 제출하는 대신 최대한 갈고 닦아보려는 노력입니다. 문장은 다듬어 보는만큼 능력이 올라가고, 정확하면서도 효율적인 문장을 쓰다보면 글쓴이의 사고도 한결 명료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