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수양, 금욕, 여가: 동시대의 윤리적 양태를 이해하기 위한 노트
이하의 내용은 종교학을 전공하시는 모 선생님과 금욕asceticism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풀어놓게 된 내용을 좀 더 일반적인 내용으로 정리해놓은 것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문학, 문화, 언어적 실천을 연구하는 훈련을 받아왔으며, 실제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도덕·윤리적 언어를 분석하는 게 문학을 비롯한 인문학 연구자들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는 입장을 지니고 있다--그리고 동시대의 사람들이 도덕적 언어 사용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엄밀하게 탐구할 수 없게 되면서 한국 인문학 연구자들이 존재의 정당성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믿는 사람이기도 하다. 전혀 엄밀하지 않은 거시적이고 추상적인 스케치로 이루어진 이 포스팅의 목표는 앞으로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가 공유하고 참고할 수 있는 밑그림 중 하나를 제시하는 것이다.
금욕과 자기수양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세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째, 푸코의 통치성 연구, 특히 1980년대 이래 푸코의 고전기-초기 기독교 연구를 접하고 피에르 아도·피터 브라운 등 그와 연관된 위대한 역사가들의 작업을 만나면서다. 나는 지금도 1980년대 푸코의 작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푸코의 통치성 연구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물론 오독에 기초해서도 자신만의 좋은 연구를 내놓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둘째, 부분적으로는 초기 근대 공화주의적 언어 전통을 접하면서, 본격적으로는 박사논문 작업을 위해 17-18세기의 여러 도덕적 저술을 읽어가면서다. 특히 여성개혁론의 언어를 따라가면서 나는 초기 근대에 이르러 금욕과 자기수양의 전통이 남성 통치자집단을 벗어나 더 다양한 집단에게 확산되고 또 다양한 변이형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셋째, 마지막으로 동시대에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 여러 금욕적 실천의 유형들을 직간접적으로 만나고 겪으면서다. 이 과정에서 나는 앞의 두 가지 계기에서 만나고 익숙해진 특정한 유형의 윤리적 도식, 즉 자기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자아의 관념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으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기술·장치들,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도덕적·정치적 서사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양한 파생물들을 내놓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의 세계는 분명 고대와도, 초기 근대와도, 심지어 19-20세기와도 다르지만, 우리의 언어와 실천, 관념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나름의 필요해 의해 개조하고 재배치해가며 활용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나는 아래에 적은 내용이 근대와 우리 세계의 모든 윤리적 실천을 포괄한다고 주장하지 않으며, 동시에 이것이 엄밀한 설명이라고 우길 생각은 없다. 실제로 현실에 밀착하고자 하는 연구자들이 늘 인정하게 되듯, 현실은 우리의 설명틀보다 더 크고 복잡하고 기괴하고 때로는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하다. 우리는 단지 기존의 통념보다 좀 더 좋은 설명과 분석을 내놓을 수 있으면 된다. 이 글이 그러한 대화의 한 단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1. 서구의 역사에서 '바람직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술'로서의 자기수양/자기계발의 담론은 고전기부터 현대까지 상존했다고 말할 수 있다. 초기에는 통치엘리트에 국한되었던 자기수양/자기계발의 기법은 일차적으로 기독교의 등장, 좀 더 강력한 계기로 종교개혁과 르네상스의 시기 이래 사회의 도덕적 개혁과정에서 통치엘리트 바깥의 더 넓은 사회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확산되어왔다(물론 18세기 후반 이래 신사 계층을 규정하는 남성성의 언어에서 볼 수 있듯 엘리트의 자기지배적 전통은 느슨하게나마 지속되었다).
2. 금욕은 자기수양/계발 실천의 중요한 장치로 이해되어야 한다. 주목해야 할 지점은 자기수양적 실천의 방향과 구조가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금욕이 수행하는 역할·기능 또한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고전적인 통치엘리트 계급의 자기지배 담론이나, 초기 근대 이후 하층·노동자계급을 대상으로 한 근면(industry)·도덕개혁운동에서 금욕은 현세의 삶을 좀 더 바람직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반대로 고대철학의 신비주의적 전통이나 기독교의 고행과 같은 실천에서 금욕은 인간이 현재의 물질적인 세계를 넘어서 더 높고 가치있는 초월적인 영역에 들어서기 위해 필수적인 원리로 간주되었다.
3. 이처럼 금욕이라는 개념이 '삶의 의미'를 구성하는 여러 축의 개념적 상관물로서 어떻게 배치되느냐에 따라 그 역할이 뒤바뀐다고 할 때, 우리는 당연히 그러한 축들의 구조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재배치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른바 세속화의 서사에 따르자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서구에서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삶과 초월지향적인 삶의 양식이 근접하고 중첩된 세계는 점차 양자가 분리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으며, 마침내는 초월지향적 삶의 양식이 점차 영향력을 상실하면서, 혹은 적어도 엘리트적인 삶을 위한 요소로 존재하기를 그치면서 초월의 장치로서의 금욕 또한 과거의 중요성을 상실해갔다고 말이다.
3-1. 비록 이러한 내러티브의 큰 줄기를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좀 더 섬세한 터치를 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첫째, 생산지향적인 삶과 초월지향적인 삶의 분리 및 후자의 쇠퇴는 결코 일방향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베버가 제시한 금욕주의적 자본가의 이념형은--그것이 초기 근대 종교개혁과 상업사회를 이해하는 데 실제로 도움이 되는지 여부를 떠나--금욕을 매개로 현세지향적인 삶과 내세지향적인 삶이 동시에 추구될 수 있다는 믿음이 근대세계의 상당부분까지 존속했음을 보여준다. 반대로 초월지향적인 삶의 양식을 부흥시키려는 노력은 종교개혁시기 이후에도 반복적으로 출현했으며, 비록 현세지향적 경향을 경멸받아 마땅한 속물적인 태도로 거부하는 도덕주의적 언어가 가장 눈에 띄기는 하지만, 그중 적지 않은 이들은 생산적이고 효율적인 삶의 지향을 포기할 수 없는 세속인들을 포용하고 협력하는 길을 찾고자 했다.
3-2. 둘째, 근대 세속화의 서사를 정교화하고자 할 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지점은 바로 여가(leisure)라는 또 다른 삶의 양식의 출현과 대두다. 고전기 문화언어에서는 공무·수고로움·노동·분주함을 뜻하는 negotium과 그러한 삶으로부터 벗어난 한가하고 여유로운, 은퇴자의 휴식을 의미하는 ótĭum 사이의 대비가 존재했으며, 이는 초기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문화적·도덕적 언어에도 계승되었다. 서구에서 근대로의 여정은 사회의 물질적 풍요와 다양한 문화적 취미·유흥의 확대를 수반했으며, 이에 따라 바쁘게 일하여 현세적인 목표를 성취하는 생산적인 삶의 양식도, 그러한 것을 거부하고 더 높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초월적인 삶의 양식도 아닌 여가의 양식이 사람들의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확대되었다. 이는 인간이 삶을 구조화하고 기술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쳤다. 소수의 "유한계급"(leisure class)을 제외하면, 여가는 이제 노동과 생산의 세계에서 은퇴한 이들의 삶보다 더 많은 대상을 지칭하는 개념이 되었다. 여가는 단순한 은퇴나 쾌락을 넘어 노동하는 인간이 잠시 맞이하는 휴식이자, 생산적인 삶을 더욱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한 재생산(recreation)의 장치가 되었고, (특히 문화·오락산업이 점차 확대되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노동방식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특정한 방식의 여가는 단순히 생산적인 삶의 보조품이라는 위치를 넘어 아예 그 자체로 삶의 의미와 목적을 규정하는 위상으로까지 상승하게 된다--어떤 이들에게 여가는 초월지향적 삶을 대체하는 영역이 되기도 한다.
4. 21세기 금욕적 실천의 위치와 의미를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바로 이 여가로서의 삶의 양식이 갖는 위상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여가의 비중이 확대되면서 사람들은 이제 단순히 노동의 부재나 욕구·쾌락의 충족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즉 여가는 '그것을 잘 운위하기 위해 적절한 기술이 필요한' 영역이 된다. 자기계발과 금욕의 장치는 이제 새로운 영역에 뿌리를 뻗는다. 사람들은 노동과 여가의 적절한 분배의 기술을 질문하며, 더 효율적이고 적절한, 혹은 더 바람직한 여가의 유형과 방법을 탐색한다(이것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렇게 금욕의 모티프는 여가의 기술로 침투한다. 앞서의 말을 달리 쓰자면, 여가는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즐거움을 무절제하게 추구하는 시간도 아니다. 바람직한 여가는 오히려 적절하게 지속가능한 쾌락을 추구하는 실천, 인간의 활력과 역량을 증진하기 위한 실천으로서 이를 위한 적절한 기술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필요하다면 통제와 금욕의 기술이 도입되어야 한다. 여가를 반(反)기술문명적인 삶을 구축하고 실천하는 영역으로 설정하고, 필요하다면 일상적인 쾌락과 편의를 기꺼이 포기한다는 점에서 금욕적 실천에 보다 진지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도 나타난다.
5. 현대에 잔존하는 금욕적 실천의 구체적인 유형을 몇 가지 드는 것으로 마치자.
하나. "헬스 열풍"으로 대표되는, 직접적으로 식욕을 통제하고 신체에 고통스러운 자극을 가하여 자신의 신체를 조작하는 데 여가와 일상을 할애하는 삶. 근육증강을 위한 "헬창"부터 새벽요가, 첨단기기를 장착하고 수 km를 달리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유형의 금욕적 실천은 빠르게 다양화·확대되고 있으며, 지방을 태우고 근육을 붙인 신체에 대한 찬양에서부터 SNS의 자기과시적 문화, 신체관리에 대한 첨단의 의학적 논의·기술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실천과 연결된 장치들의 복합적인 작동 역시 매우 흥미로운 주제다.
둘. (넓은 의미의) 생태주의적 윤리에 공감하는 반(反)기술산업문명적 금욕주의. 특히나 동물권의 확대 및 탄소감축 의제와 맞물려 근대문명의 '환경파괴적' 기술적 성취를 포기하거나 다른 선택지를 탐색함으로써 지금까지 누려오던 편의와 쾌락을 포기하거나 절감하는 방식의 금욕주의는 강력한 도덕정치적 언어를 통해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종교분파 중 생태주의적 언어를 강하게 끌어안으면서 금욕적 실천과 영성훈련을 결합하는 예도 앞으로 더 생길 수 있다.
셋. 템플스테이·참선수행 등 과거 초월지향적 삶을 담당하던 기구·장치를 '휴식과 재충전'의 여가행위로 전유하면서 활용되는 금욕적 실천(한국에서 빠르게 탈신비화된 요가 역시 어느 정도는 이러한 예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독방체험 등 이와 유사한 실천을 체험하게 해주는 활동공간을 포함하여 이러한 금욕주의의 장치는 대중적인 인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직 나름의 지분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넷. 가장 독특하고 흥미로운 유형으로, 오늘날 주식투자 블로거들 중에서 점차 늘어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유financial freedom"의 추구자들이다. 전통적인 도덕언어에서 금융업자·투자자를 냉혈하고 맹목적인 이익추구자·착취자 혹은 금전적 탐욕의 노예, 즉 "투기꾼"으로 묘사해왔다면, "경제적 자유" 추구자들은 스스로를 두 가지 유형과 단호하게 구별한다. 그들의 목표는 단지 더 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상태, 즉 타인에게 종속되어 원하지 않는 노동을 강요받거나 혹은 타인에의 의존이 없다면 궁핍함을 면할 수 없는 처지에서 벗어나 '자신의 시간을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재정적으로 스스로를 통치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무분별한 투기나 매일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는 '고된 노동'과 구별되는 (종종 "가치투자"의 개념과 연결되는) 합리적이고 장기적인 투자를 수행하고자 한다. 그러한 합리적인 투자행위는 한편으로 투자대상기업의 '객관적' 가치를 철저하게 분석하고 예측하는 분석력 및 시장과 주가의 요동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투자를 충분히 유지하는 "인내"의 미덕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투자종목만이 아니라 사치의 유혹에 있어서도 정념에 이끌리지 않는 삶을 미덕으로 삼고, 과도한 욕망·쾌락충족의 욕구를 억제하여 적절한 수준의 쾌락만을 향유하는 지속가능한 행복한 일상을 추구한다(적어도 이상적으로는 말이다). 앞의 세 가지 유형과 비교할 때 이들의 금욕주의는 자기 자신의 삶을 적절한 형태로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장치의 일부라는 점에서 보다 소극적인 수단에 가깝다. 서구 고전기의 윤리언어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경제적 자유 추구자들이 스토아적 언어를 포함한 고전적 윤리언어의 핵심적인 특징 일부를 놀랄만큼 그대로 반복하고 있음에 놀랄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모델인 투자자 워렌 버핏의 별명이 "오마하의 현인"(the Sage of Omaha)이라는 것, 즉 고대철학의 이상적인 단계인 "현인sage"이라는 말이 위대한 투자자를 수식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지금까지 언급한 네 가지 유형으로부터 우리는 현대인의 윤리적인 실천 및 이를 기술하고 설명하는 언어가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배와 저항, 억압과 해방의 도식이나, '쾌락주의적 자본주의', 비도덕적인 신자유주의 식의 슬로건은 현대의 윤리적 양태를 파악하는 데 별다른 쓸모가 없는 지나치게 거친 틀에 불과하다(혹은 그조차도 윤리적 삶의 한 가지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보다는 주체·행위자가 자기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또 어떤 실천을 수행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실천·담론이 어떤 장치들과 연결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추적하는 작업이 좀 더 생산적이다. 나는 금욕과 자기절제의 명령과 기술이 어떠한 맥락에 놓이는지, 또 그것이 연결되는 맥락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다른 의미들을 지니게 되는지를 시론적으로나마 보여주고자 했다. 심지어 쾌락과 풍요의 추구가 바람직한 삶의 목표로 자명하게 자리 잡은 우리의 사회에서조차도, 금욕주의의 실천들은 지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