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밖》50호: AI의 소설창작과 헨리 제임스 논쟁
한국의 대표적인 영미문학 학회 영미문학연구회에서는 《안과밖》이라는 종합적인 비평·학술지를 발간하고 있다. 최근에 공개된 50호에서 흥미로운 논쟁이 촉발된 김에 정리하여 공유한다.
1.
《안과밖》 50호에 수록된 논문 중 「『길 위 1번지』, AI 제임스의 소설: 「소설의 기술」과 인공신경망 알고리즘의 글쓰기」(http://sesk.net/_nv/iNnOut/detaillist.asp?z_num=50 에서 읽을 수 있다)란 글이 있다. 19세기 영국 정기간행물 연구 및 헨리 제임스 전문가로서 최근에는 AI 쪽 연구를 수행하고 계시는 저자 윤미선 선생님은 해당 논문에서 AI인공신경망의 소설집필과정과 헨리 제임스의 소설론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다(문학전공자들의 AI연구 수준에 대한 세간의 냉소적인 평가와 별개로, 제한된 분량 내에서나마 상당히 공들여 쓴 작업이다). 여기에 역시 영미연에 속해 계신 유희석 선생님께서 비판적인 코멘트를 달면서 논쟁이 촉발되어, 서로 일주일 여 간 7편의 포스팅을 통해 차분하게 논쟁이 전개되었다(http://sesk.net/_nv/board/lst.asp 게시판 참조).
논문도 AI연구에 관해서든 헨리 제임스에 관해서든 상당히 밀도가 있는 글이고, 논쟁 주제도 하이데거의 기술비판론에서 헨리 제임스 해석, 19세기 후반 도덕철학과 경험론에 걸치고 있는만큼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대화인만큼, 한국 영문학계에서 이런 논쟁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만큼 관심있는 분들께서는 한번 읽어보셔도 좋겠다.
2.
개인적으로는 윤미선 선생의 작업을 좀 더 꼼꼼히 읽고 이해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는데, 이러한 논의에 상대적으로 덜 익숙하신 분들을 위해 몇 가지 쟁점을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1) "과학기술을 삶의 이기적(利器的) 수단으로 간주하는 도구주의적 사고" 및 발전된 과학기술의 제어불가능성을 비판하는 하이데거식의 기술비판론(「윤미선 선생님의 논문이 촉발한 투박한 단상들(2)」)은 윤미선의 논문 혹은 AI 소설작품의 '창작과정' 및 그 기저에 놓인 예술론을 검토하는 데 적절한 방식인가?
1-2) AI 소설작품의 '창작과정' 및 그 기저에 놓인 예술론을 검토하는 윤미선의 작업이 AI가 초래할 결과에 대한 "우려와 염려", "사유와 물음의 절박성"을 드러내야만 하는 작업인가(「윤미선 선생님의 논문이 촉발한 투박한 단상들(2)」)? 즉 "AI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떠나서 그것이 인류의 기술발전사에서 어떤 획을 긋는 전환점이고 그 자체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으면 안 되게 ‘몰아세우는’ 결정적 사건"이기에 "그 물음의 ‘수행’"을 해야한다는 유희석의 주장(「윤미선 선생님의 논문이 촉발한 투박한 단상들(3)」)이 이 논문의 작업을 평가하기에 적절한 척도가 될 수 있는가?
2-1) "『길 위 1번지』를 만들어낸 “인공신경망 알고리즘”"의 소설창작, 혹은 집필 프로세스와 헨리 제임스의 「소설의 기술」에서 제시된 소설창작론을 연결짓는 게 적절한가? 즉
a. 감각정보·인상·"경험"의 습득(과 확대) →
b. 습득한 인상을 (주어진 "경로"에 따라) 처리·선택하는 "의식" →
c. 이 과정에서 "의식"의 재구축
과 같은 과정으로 제임스의 창작론을 요약하고 이를 "멋대로 인공신경망"(gonzo ANN)의 창작프로세스·학습과정과 상통하는 것으로 설명하는 논문의 주장은 타당한가?
2-2) "제임스가 인간의 마음과 의식 자체를 문제삼으면서—일체의 이념주의나 도덕주의를 비판하면서—인간의 도덕적 가능성을 탐구한 작가인 동시에 그런 가능성의 해방적 의의를 소설로 드러낸 작가"인만큼 2-1에 제시된 논리로 제임스의 창작론을 설명할 수 없다는 유희석의 비판(「윤미선 선생님의 논문이 촉발한 투박한 단상들(3)」)은 타당한가? 제임스의 창작론을 2-1에 요약된 바와 같이 이해하는 관점은 제임스의 도덕적 핵심을 외면하는 "특정한 기술적 목적을 위해 자원을 활용하는 엔지니어"와 같다는 유희석의 비판은 적절한가?
2-3) 2-2에 제시된 유희석의 비판에 대한 윤미선의 반론(「유희석 선생님 글에 대한 답글 (2)」)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제임스에게 있어 ""마음"이나 "의식"으로부터 비롯되는 소위 "인간의 도덕적 가능성과 해방성"이 이 "마음"의 출발점으로서 날카로운 "감각"적 인식과 구별"된다는 주장, 즉 감각·마음의 작동과정과 도덕론을 상충하는 것으로 보는 관점은 적절하지 않다. 뒤에 곧바로 이어지는 "굳이 정리를 한다면 인간 본연의 능력 중에 도덕적 능력이 있어서 이를 타고 난다고 보는 입장과 이러한 능력 또한 주변 환경과의 교섭 속에서 생겨난다는 입장 중에서 제임스는 후자에 속한다" 말 또한 (유희석은 「Re: 유희석 선생님 글에 대한 답글 (2)」에서 이를 "Nature vs. Nurture의 이분법적 구도"를 주장하는 것으로 비판하지만) 제임스에게 있어 인간의 인식과정과 도덕적 자아의 형성과정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표명하는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헨리 제임스 및 그가 속한 19세기 후반 영국의 도덕철학적 인간학을 이해함에 있어 타당한 설명인가?
3.
나 자신은 헨리 제임스 전공자도 아니며 AI연구를 따라가본 적도 없으므로 어떠한 의견을 낼 생각은 없다. 다만 두 가지만 덧붙이자. 첫째, 나는 유희석 선생이 인용하고 있는 하이데거식의 기술비판론이 역사적 세계 속에서 인간과 기술의 구체적인 상호작용 및 그 함의를 엄밀하게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로 유효한 틀인지, 그러한 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게 무엇인지 따져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 나는 19세기 후반 영어권 도덕철학·도덕이론에 관해 잘 모르니 대신 17-18세기 영어권 도덕철학에 관해 코멘트를 더하겠다. 적어도 17-18세기 영어권 도덕철학에서 감각으로부터 지식·관념을 생성하는 과정과 도덕적 역량을 확립하는 과정은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사실 논쟁 중에 "도구주의적 사고"의 전형처럼 언급되는 존 로크야말로 사실 이 문제를 가장 치열하게 파고든 사람 중 한 명이다. 『인간지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신이 부여한 (도덕적) 의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를 정면으로 다루는 텍스트고--ECHU 1권이 "본유관념innate ideas"의 부재를 다루며 마지막 4권이 "지식에 관하여Of Knowledge"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기독교 도덕지식의 습득문제는 『기독교의 합리성』과 같은 저작에서도 반복된다. 이는 어느 정도는 17-18세기 도덕·정치이론의 중요한 기둥이었던 자연법론이 의무론의 형식을 취한 신학론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18세기 말-19세기 초 흄을 논박하는 토머스 리드의 상식철학도 여전히 이 논쟁의 연장선에 놓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칸트의 『정초』와 『실천이상비판』은 이 전통의 독특한 변종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경험과정과 도덕적 자아의 근원적 연관관계를 전제하는 논리가 한 세기 뒤인 헨리 제임스의 시대에 어떤 형태로 남아있는지는 흥미로운 주제다.
학문적 논쟁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한국 인문학계에서 이번 논쟁이 많은 분들의 관심을 촉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