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제임스. <워싱턴 스퀘어>. + 비평가의 감각.

Reading 2014. 8. 8. 13:45

헨리 제임스. <워싱턴 스퀘어>. 1881 유명숙 역. 을유, 2009. 


유쌤이 번역하신 <워싱턴 스퀘어>_Washington Square_를 읽었다. 유쌤 본인이 이쪽에서 A급 역자인 것도 있고, 텍스트 자체가 짧고 무척이나 재미있다. 읽으면서 내 삶의 특정한 기억들을 곱씹어보는 대목들도 있고. 개개의 대화들을 묘사하는 장면들, 그 예의바른 언어 아래에 들어가 있는 서슬퍼런 날들을 때때로 말없이 드러내는 장면에서 제임스Henry James는 확실히 1급의 작가다. 디킨스는 이런 대화를 쓸 수 없었던 것 같고, 엘리엇은 색채가 다르다...오스틴은, 나는 오스틴이 조금 더 '영국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 비슷하다. 소설의 구도 자체는 발자크의 <외제니 그랑데>랑 유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두 작가가 각각 무엇을 할 수 있었고 없었는가를 비교할 때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피터 브룩스(_The Melodramatic Imagination_)를 읽을 때 흥미롭게 생각하기는 했는데, 확실히 제임스에게는 덕성virtue의 문제가 중요하다. 결국 WS는 Catherine Sloper의 덕성을 지각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읽기가 된다. 단순히 캐서린의 처지에 공감할 수 있는가만이 아니라 말주변 없고 서투른 성격 아래의 어떠한 미덕을 읽어낼 수 있는가가 이 소설에 대한 충실한 독서의 기본적인 요건이 되며, Dr. Austin Sloper와 연인 Morris Townsend, 그리고 Lavinia Penniman의 결점은 그런 것을 지각하지 못한 채로 자신이 세계에 대해 구축하고 있는 '서사'를 반성없이 밀어붙인다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WS는 마치 미꾸라지처럼 매끄럽지만 그럼에도 좀처럼 손상되지 않기 때문에 결코 타인을 이해할 수 없고 자신의 서사를 이끌어나가기만 하는 인물들의 세계를 그려내는 소설이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WS는 서사와 덕성의 대립구도를 설정한다고도 읽힐 수 있는데, 캐서린을 제외한 '똑똑한' 셋이 모두 자기 나름의 서사를 구축하고 그에 입각하여 행동하며 결과적으로 캐서린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보지 못한다면, 다른 이들과 같은 서사구축능력이 결여되어 있던 캐서린에게서만 특정한 덕성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역시 자기 앞의 타자가 어떠한 사람인지 오로지 행위에서만 판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물론 다른 셋은 그러한 겸손함조차 없지만--, 캐서린의 덕성이 이 창문없는 단자와 같은 서사들의 "섞이지 않는" 뒤얽힘을 근본적으로 초과하는지는 조금 거리를 두고 보아야할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완벽한 인물,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인물을 요구한 권리는 없다.


 요 몇 년 간은 늘 그랬지만, 최근에도 다시 스스로의 비문학성(...)을 자각하면서 문학에 거리감을 느끼곤 해왔다. 그러나 이런 1급의 소설들을 읽고 그 미묘한 맛을 지각할 때마다 확실히 나도 모르게 내가 훈련받은 전통들과 미감taste을 인식한다. 문학 '연구자'와 조금 다른 '비평가'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같은 것과 다른 것의 문제에 있다. 연구자에게 같은 것을 같은 것끼리 분류하고 같은 것들 사이에서 차이를 다시 종별화시켜 일반화된 진술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중요하다면, 비평가는 유사한 것들 사이에서의 민감한 차이를 읽어내는 것, 그리고 명백한 차이 안에서의 미세한 유사성을 읽어내는 것에 그 핵심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그래서 사려깊음prudence, 꼼꼼한 읽기close-reading과 같은 '세공과 훈련을 통해 길러지는' 능력들은 확실히 비평가 고유의 것이며 학적인 층위로 쉽게 소화될 수 없는, 연구자를 길러내는 것과는 조금 다른 종류의 훈련과 감각을 요구한다. 이러한 감각의 결여는 단순히 공부량의 축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때로 그 성실함과 다른 자질에도 불구하고 미세한 지점에서는 항상 틀리는 사람들을 보면 복잡한 기분이 든다, 특히 그가 직업적으로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일 때는. 예전에는 이를 논리적 일관성의 문제라고 생각해왔는데, 최근에는 조금 더 미묘한 다른 기준들을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무엇이 같고 다른가를 판별하는 논리적 기준들은 복수plural인데, 이것들 사이에서 무엇이 유효한지를 판별하는 또 다른 감각이 필요하며 이는 사후적으로 논리적 검토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사전적으로 길러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아마 비평에 어떠한 '생의 감각'이 있고 시대와 호흡하고, 호흡할 수 없는 특정한 역사적 감각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분별력과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대중적 요구'에 기꺼이 부합하는 비평가가 있고, 시대가 달가워하지는 않지만 필요로 하는 감각이 있으며, 시대를 초과하고자 하는 반성의 시선이 있다. 이런 것들은 훈련으로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 듯 싶다. 그러나 어쨌든 그 날을 조금 더 갈아내려는 노력과 자신의 감각을 반성하는 태도는 길러질 수 있으며, 오로지 이러한 시도들만이 비평가를 단순히 시대에 팔리는 무언가보다 조금 나은 존재로, 그리고 시대에 당장 팔리지 않으나 그럼에도 그것과 무관하게 중요한 무언가의 가치를 감식하는 임무로 이끌 수 있지 않을까.


 좋은 번역의 덕목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국역본을 읽으면서 역자의 언어, 그 고유한 질감을 느꼈다. 나 자신은 언어의 질감과 색채에 꽤나 둔감한 사람이지만, 확실히 유쌤의 손에서 빚어져 나온 문장들을 읽을 때 마치 수 년 간 잊고 있던 친숙한 향기를 지각하고 편안해지는 사람과 같은 기분이 든다. 이는 부분적으로 나의 언어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들 중 한 명이 유쌤이기 때문이다(아마 살아있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중요한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3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 새로운 언어들과 뒤섞이면서 많이 흐려졌지만, 학위논문을 쓸 때 선생은 모든 문장을 일일이 검토해주었고 (내 논문의 분량이 석사치고 짧은 것은 아니며 그나마 상당히 많은 부분을 잘라냈음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노동이다) 나는 선생이 고쳐준 문장들을 다시 내 호흡으로 만들기 위해 끙끙거리곤 했다. 그러한 과정을 반년 넘게 매주 지속하면서, 그때까지 새롭게 생성 중이던 개념과 사유를 붙잡을 수 없었던 나의 언어를 재구축/형성하는 과정에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한 언어가 바로 선생의 언어다. 나의 둔감함과 잡다한 관심사, 그리고 쉽사리 제거될 수 없는 고집스러운 개성이 선생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결코 투명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을 수는 있겠으나,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시 선생의 언어와 그 언어를 구성하는 고유한 관습들, 논리들을 (어휘구사는 따라할 수 없다-) 빨아들였고 논문 완성 직후에는 나 자신도 선명하게 지각할 정도로 내 언어에 그 언어가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내가 선생에게 느끼는 친밀감과 애정은 언어의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 언어의 질감, 색채, 특유의 논리를 <워싱턴 스퀘어>에서 다시 발견하면서, 나는 다른 독자들이 그저 잘 읽히고 매끄러운--확실히 이쪽에서 유썜은 국내 최상급의 번역자니까--소설을 읽을 때 나는 마치 지금은 조금 떨어져 있을지언정 결코 잊을 수 없는 고향의 기억을 떠올리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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