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궁 취미 논란'의 이데올로기와 반지성적 팩트 페티쉬

Critique 2014. 8. 25. 12:10

이른바 '국궁 취미 논란'이 겨냥하는 요점은, 어떻게든 40일짜리 단식을 금속노조원이라는 배경과 정부에 대한 불만이라는 협소한(?) 원인에 귀속시켜 인과관계를 재설정하는 것, 그렇게 4.16 이후로 나타난 정부 및 집권여당의 무능함&파렴치함을 우리의 시야의 바깥으로 내쫓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딸에 대한 사랑"이 진짜냐 아니냐라는 멜로드라마적 논리에 집착하는 태도에는 사태의 쟁점에 대한 의도적인 망각이라는 점에서 진정으로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이러한 논점 일탈의 결과는, 이 논리에 찬동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반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조차도 진정한 핵심으로부터 꾀어낸다는 점에서 실제로 효과적이다.


김영오 씨의 단식투쟁이 우리에게 일깨우는 사실은 이번 참사에서 갖가지 제도적 안전장치 및 재난대책장치가 전부 무력한 모습을 보였다는 것, 그리고 왜 그런 사태가 벌어졌는지 정치-제도적인 차원에서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를 "교통사고"라고 부르고 싶다면, 도로 위의 몇 중 추돌 정도가 아니라 적어도 고가도로 몇 km 정도가 갑자기 해체되어 무너진 정도의 '사고'를 상상하는 편이 맞다. 비유를 계속 이끌어가보자면 도로규격부터 시작해 시공, 이후의 안전관리감독 및 구조에 이르기까지 행정권력의 종합적인 누수가 드러난 셈이라는 점에서 세월호=교통사고론은 행정, 법, 권력의 작동 및 검토를 완전히 망각하는 지적 백치증을 보여준다. 이번 국궁 취미 논란은 이러한 '의도적' 백치증의 연장과 다름 없으며, 우리의 시선을 진정한 문제인 공적인 권력작동에 대한 검토로 인도하는 대신 한 개인의 가정사로 오도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무능력 이상으로 위험하다; 나는 '팩트'를 들먹거리면서 김영오 씨의 '순수성'을 논의하는 이들이 그보다 훨씬 중요한 정치와 제도의 문제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침묵한다는 '팩트'로부터 그들이 공식적으로 표명하는 태도와 달리 일종의 반지성주의를 읽어도 아주 틀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그것이 한국의 대중적 담론에서 (논리와 해석에 대한 검토를 완전히 방기한) 실증주의, 혹은 '팩트 페티쉬'가 전유되어온 방식이며, 우리의 지성이 모독받아 온 방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논란을 접하는 우리들이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는, 물론 김영오 씨의 명예에 관련된 엉성한 논의들에 반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그리고 누가 이 '팩트'를 퍼트리고 싶어하는지 주의깊게 살펴보는 것도--, 결국 무엇이 그를 극단적인 선택으로 내몰았으며 또 지금도 방관하는지를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4.16 전후로 권력이 어떻게 움직여왔고 그것에 어떤 악취와 결함이 있는가를 직시하는 데 유일하게 의미있는 태도가 있다. 당신이 국궁취미 논란 및 김영오 씨의 과거사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의 여부는 여기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진정으로 사태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가장 중요한 원인, 즉 권력의 작동을 보고 그 책임을 검토하는 데 있으며 그에 집중하는 것만이 우리를 이데올로기적 오도에서 다시 건져낼 수 있다.



한 마디로, 제발 좀 멍청해지지 말자. 김영오 씨의 과거사가 아니라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행정의 문제가 우리 삶과 진지하게 관련된 진짜 문제다.



P.S. 만약 이 글을 읽고 납득할 수 없다면 나는 해당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묻고 싶다: 세월호 참사 전후에 행정 및 정치권력이 보여준 행위와 무책임에 정말로 어떠한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는지, 그리고 당신 주변에 마찬가지의 사태가 똑같이 벌어진다고 해도 아무런 이의제기를 하지 않을 것인지를 말이다. 나는 내 세금을 꼬박꼬박 받아가는 정부가 그렇게 행동하는 걸 도저히 참아줄 수 없을 것 같은데, 정부와 공적 권력에 대해 그 정도로 관대하게 굴 자신이 있다면 마찬가지의 인내심을 김영오 씨의 취미에도 발휘해주기 바란다. 당연하지만 공적인 권력에 관대할 수 있는 사람이 훨씬 미약한 개인에 엄격하게 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개개인에게는 관대할 수 있어도 권력에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그런 '공평한' 태도를 일관성 있게 견지한다면 당신은 열심히 기사를 퍼나르고 리플을 다는 대신 '침묵하는 덩어리'로 돌아가 있으면 된다. 그럼 옳은 일은 못해도 적어도 실수는 덜 할 테니까, 그 편이 모두에게 좋지 않을까.



P.S. 2. 나는 한국의 대중적인 담론에서의 실증주의를 조금 더 적절한 용어인 '팩트 페티쉬'fact-fetish, 혹은 '사실물신숭배'로 부르고 싶다. 쉽게 말하자면 이 표현은 어떠한 근거/사실이 등장했을 때 그 팩트 자체에만 몰두해 그 근거를 포함하는 전체적인 논리, 맥락, 해석, 설명을 망각하는 경향을 가리킨다. 근거의 사실 여부 자체의 검증이 전체 논증 및 논의구도의 검증을 대체해버리거나, 아니면 이번 사례에서처럼 지엽적인 사실이 보다 핵심적인 주제에 대한 고민을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여기서 벌어지는 일은 소위 '물타기'와 흡사하다. 다만 '물타기'가 사건의 여론을 호도하는 특정한 주체를 암묵적으로라도 상정한다면, 팩트 페티쉬는 논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내면화된, 그러니까 물타기에 적극적으로 말려들게 되는 태도를 가리킨다. 온라인 활동을 묘사하는 고전적인 비유로 쓰여온 "떡밥과 낚시질"의 표현이 이러한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적절할 것이다. 팩트 숭배가 내면화된 사람들은 새로운 사실이 "투척"되었을 때 마치 떡밥에 맹렬하게 달려드는 물고기처럼 그 떡밥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떡밥의 등장으로 본래의 논의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지금의 떡밥이 사실인지 아닌지만이 중요하며, 그 떡밥이 암암리에 풍기는 냄새에 대한 의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떡밥의 의심하는 경우에도 그 떡밥이 포함된 현재의 상황 전체에 대한 맥락으로의 고찰로 시선이 가지는 않는다. 당연히 떡밥이 걸려있는 낚싯바늘과 그 위에 드리운 낚싯줄이 암시하는 낚시꾼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는 불가능하며, 때로 그러한 경향이 나타난다고 해도 음모론적인 사고로 비약하거나 심지어는 (나름대로의 진리가를 내포한) 음모론 자체가 하나의 클리셰처럼 다루어진다. 그리고 이 떡밥을 문 팩트 숭배자는 실제로 자신이 획득한 '사실'이 자신이 암암리에 품고 있던 특정한 태도를 어떻게 논리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반성은 좀처럼 하지 못한다. 팩트 페티쉬의 요점은 사태의 전체적인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기제에 대한 필수적인 요구가 팩트 자체의 획득이 주는 충족감으로 대체되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품고 있던 입장이 실제로 어떤 비판적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주관적으로) '정당화'된다는 데 있다. 당연하지만 팩트 숭배자들이 뒤덮은 세상에서 사태에 대한 유의미한, 전체적인 고찰은 불가능하며, 이것이 해당 담론공간 자체의 지적인 저하를 낳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난 수 년 간 온라인 담론공간의 질적 저하를 가져온 데는 팩트 페티쉬의 범람이 한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팩트 숭배자들을 조롱하는 것은 내 목적이 아니다. 실제로 이런 경향은 심지어 나와 유사한 정치적 스탠스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서조차도 발견된다. 단지 나는 자유주의-경험주의-실증주의의 맥락에서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들이 어떻게 대중적인 차원에서 작동하고 또 전파되는지를 그려내는 것, 그리고 이런 대중적인 이데올로기 또는 심리구조가 어떻게 작동하고 개인의 심리에만이 아니라 전체 담론장 자체에서 어떤 효과를 내는지를 살피는 것, 최종적으로 이러한 오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발판을 제공하는 데 흥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내 스케치에 동의하지 않을 지라도 이를 가급적 진지하게 검토해주기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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