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용극대화'에 관한 질문들 [131230]

Critique 2014.03.18 12:54

*2013년 12월 30일 페이스북


1. 왜 (꽤 많은)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생존경쟁 상태에서 모든 것에 최적화된 모습을 갖추리라고 생각할까? 그들이 그 논리를 따온 진화론에도 그런 종류의 서사는 없는데.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시장의 우상 안에는 자유경쟁의 우상이 자리잡고 있다.

2. 효용극대화란 마법의 단어가 강요하는 주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공간의 차원에서) 주체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누구의' 효용극대화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대립되는 세력 간에 대한 질문만은 아니다. 예컨대 특정한 사회와, 사회 내의 한 조직과, 조직 내의 개인의 이해관계가 순전히 일치하거나 교집합을 갖는 시점이 자연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단적으로 개인의 효용극대화가 조직에게는 역으로 마이너스가 되는 시점도 있고, 특정 조직의 효용극대화가 조직이 속한 사회에는 효용의 저하로 나타날 수 있다. 만약 어떤 기업에서 그 구성원들 각자에게 최대한의 효용을 창출하라는 요구를 한다면, 그게 반드시 그 기업의 최대효용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특히나 개별직원들 간의 경쟁구도라는 조건이 붙는다면, 개개인들은 자신'만'의 성과와 생존을 위해 동료들의 효율을 떨어트리는 짓도 감수한다.

3. 효용극대화라는 개념을 단순화하지 않기 위해서는 시간이라는 축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적인 길이 안에서 효용이 극대화될 수 있단 말인가? 극단적인 사례를 든다면, 순간적인 쾌감을 엄청나게 올리고 일정 시간이 지난 후 그만한 부작용을 주는 약물이 있다고 치자. 자신의 시간당 평균쾌감량을 증진시키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고 그것을 계산할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한 누군가라면 약물을 복용하고 부작용이 오기 전에 재빨리 (어떠한 고통 없이) 목숨을 끊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결론을 낼 수 있지 않을까? 꽤 많은 기업의 사례연구에서도 드러나지만, 일종의 계약직으로 선출된 CEO들이 성과급의 극대화를 위해 자신의 임기 내에서 단시간에 많은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만 장기적으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때로는 해롭기까지도 한 일을 기꺼이 지시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이런 일은 정치적인 영역에서도 종종 벌어지며, 벌써 이러한 법칙을 체득하고 있는 '뛰어난' 정치가들의 존재는 해당 사회에서 중요한 안건을 장기적으로 숙고해서 결과적으로 최상의 결과를 낳지 못하도록 하기도 한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당장 내일에는 +지만 1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가 되는 선택들이 있다는 것이다. 보다 사실에 가깝고 싶은 분석가가 있다면, 그는 이윤 혹은 효용창출을 수치라는 일차원적인 요소로 말하는 대신 선과 같은 그래프의 형태로 그려내야 할 것이다--다시 말해 시간에 따라 변동하는 효용량을 표기해야 할 것이다.

4. 2번과 3번의 사례에서 곧바로 유추할 수 있는 명제 중 하나는 우리가 어떤 집단 또는 개인의 행동을 촉구하기 위한 당위로서 효용(그것이 화폐 또는 어떠한 단위로 추산되든간에)을 기준삼을 때 그것을 정당하게 평가하기 위한 틀을 갖추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상식적인 명제다. 누구의 효용인가? 그 효용이 다른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손해 혹은 효용의 감소로 이어지지 않는가? 어느 시점에서의 효용인가?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게 마치 마약처럼 단시간의 효용증대 후 부작용을 가져오지는 않는가?(이 문제는 개인의 신체만이 아닌 집단의 차원에서도 적용된다--단적으로 항상 조직원에게 100%를 요구하는 의사결정자는 역으로 저효율을 가져오기 쉬운데, 사람들이 항상 100%를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뿐더러 그런 식의 초과성과를 낸 뒤에는 보다 오랜 휴식시간을 가져야만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다; 최악의 사태 중 하나는 조직원들이 처음부터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의 최대치를 일부러 낮게 보여주는 일이다--단적으로 군대를 보라: "잘하지도 못하지도 말고 중간만 가라") 인간의 심리나 행복과 같은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더라도, 순수하게 효용이라는 기준에서 계산했을 때조차 우리는 시간축과 공간축을 포함한 복잡한 결과물을 산출해야만 한다. 오로지 수치로만 제시되는 모든 효용량은 엄밀히 말해 기만적이다.

5. 보통 신분이 보장되는 공적인 조직은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물에만 집중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런 비판이 간과하고 있는 점은, (특히나 의사결정권자들에게 전권이 집중되어 있고 하부로부터의 의견수렴이 거의 되지 않는 억압적인 위계질서를 가진) 기업을 포함한 사조직 또한 마찬가지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주주들에게 책임을 지는 기업의 경우 최종적으로 주주들에게 어느 정도의 이익을 산출하는지 (배당금 및 주가의 상승/하락)가 결정적인 가치평가로 이어진다. 바꿔말하면 그 순간부터 해당기업은 이윤이라는 수치화된 결과물에 집중하게 되며, 아주 많은 것들이 그 결과물을 늘리기 위해 희생될 수 있다. 4번에서 말한 것처럼 대개의 경우 결과물의 측정은 특정한 시기에 한정되며 이루어지며, 때로 그 측정값을 최대화하기 위해 조직 자체의 '건강함'을 망가트리는 일이 결코 흔하지 않다. 다시 말해 효용의 측정이라는 문제가 진지하게 고민되기 전에는 사적인 조직이 공적인 조직보다 더 효율을 낼 수 있다는 진술은 참이 아니다; 영국과 같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사적인 조직이 공적인 조직보다 더 높은 효율을 내는 데 성공했다면(물론 그 부작용을 함께 감안하는 사람의 수는 많지 않다; 한국인들은 외국의 사례에 거의 아무런 자료조사도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잘 안다고 착각하곤 한다), 그것은 실제로 그 조직이 더 효율적으로 변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노동력을 좀 더 효과적으로 착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기인한다. 한 명의 구성원으로부터 뽑아낼 수 있는 최대한의 노동량이 얼마인지에 대해 사회적 합의의 구속을 받는 공적인 조직에 비해 사적인 조직은 그 착취량의 산정에 있어 훨씬 자유롭다.

6.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다지 엄밀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통용될 수 있는 진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를 전반적으로 사적인 조직체로 구성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사회구성원들로부터 더 많은 노동량을 끌어내고 싶어한다고. 특히나 한국에서처럼 사적인 조직이 곧 개인으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노동량에 대한 어떠한 제한장치도 없는 조직으로 간주되는 사회에서는 말이다.

7. 이런 종류의 정신상태에서 우리는 지난 수십년 간의 이 사회에 특징적인 정신 하나를 지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떠한 조직이나 집단이 그 구성원 개인의 삶에 대해 가능한한 최소한의 책임만을 지려 한다고. 보다 진부한 언어로 이야기하자면, 한국은 언제든지 개인의 삶을 희생시킬 준비가 되어 있으며 그에 따른 모든 피해를 개인에게 전가하고자 한다. 아마도 가장 슬픈 현실은 바로 그 구성원들이 다른 구성원들에게 떠넘겨지는 책임에 대해 바로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그 집단의 시점으로 반응한다는 점이다.

8. 우리는 종종 자신의 물질적인 이해관계에만 집착하는 사람을 속물이라고 부른다. 한발 더 나아가 타인의 삶과 생명을 기꺼이 도구화하는 사람을 괴물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괴물들로 가득찬 사회에 살고 있음이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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