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이라는 물신과 수사

Comment 2014. 11. 2. 14:19

기사링크: [책과 삶]도정일·최재천 교수, ‘대담’ 출간 9년 만에 다시 통섭을 말하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10312127295&code=960205


이하는 이 기사를 읽고 든 생각이다.





솔직히 말해 나는 이러한 대담, 정확히는 이러한 대담이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에 비판적이다. 도정일은 "지금 필요한 건 지식을 연결해 새로운 지식을 만드는 겁니다. 그게 바로 통섭이에요"라고 말한다(그가 이것만 말하는 건 아니겠지만, 대담에서는 이 말이 가장 오래, 멀리 남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수사는 한국에서 쉽게 발견된다. 어떤 중요한 문제가 있어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추상적인 개념이 그 답변으로 제시된다. 그 개념은 거의 마술적인 힘을 가진 것으로 숭앙받고 사람들은 그 개념이 무엇이고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그것이 어떻게 구체화된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생각하는 대신 마술도구의 읊조림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오늘날 한국 연구자는 과거 "우리 집 옷장에는 금송아지가 있어"와 비슷한 느낌으로 "나는 요즘 통섭적 연구를 하고 있다네"라고 말한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 금송아지에 절도 하고 예배도 드린다는 사실이다. 개념은 주술이, 개념을 읊조리는 인간은 주술사가 되는 상황을 학문과 정신의 원시적 퇴행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학문과 개념은 그 자체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학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보탬이 되는 길은 문제와 문제가 발생하는 세계에 대한 깊은 몰입으로부터 조금씩 빚어져 나온다. 개념은 그 길을 맨손으로 파헤칠 수 없는 우리를 위한 일종의 삽과 같다. 삽에 금칠을 하고 제단 위에 올려놓고 절을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다. 땅을 파려면 삽질을 해야하는데, 통섭이라는 개념이 대중적으로 전파되는 양상을 보면 삽을 모시고 기도를 하는 꼴을 보는 기분이 든다. 우리는 통섭이 실제로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활용/실천되는지에 대해 질문하는 대신 통섭, 통섭, 통섭이라고 외치는 것만으로도 모든 문제에 장밋빛 전망을 품을 수 있다는 기분좋은 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물신화된 개념에 대한 숭배가 실천과 비판을 대체한다. 




'통섭'이라는 단어가 한국에 들어온지 불과 10년도 되지 않아 이토록 마술적인 힘을 갖게 된 과정에는 당연히 최재천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그가 얼마나 뛰어난 생물학자인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나의 흥미를 끄는 점은 그가 오늘날 한국에서 수사적 전략을 가장 잘 활용하는 저술가라는 데 있다. 통상의 독자들은 <통섭>이라는 책을 에드워드 윌슨의 책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수사와 이데올로기, 대중적 의식을 연구하는 시각에서 본다면 단연코 (적어도 한국에서) 이 책은 최재천의 것이다.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은 오늘날 특별히 흥미롭지 않은 긴 본문이 아니라 역어를 고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역자의 말이다. 그는 말의 힘, 조금 더 구체적으로 수사가 갖는 힘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지극히 드문 학자다. 한국어 개념어 하나를 만들고 '히트'시키기 위해 쏟은 노력을 보면 언어와 대중, 이데올로기와 권력에 대한 깊은 '실용적' 이해가 드러난다. 책 한 권과 번역자 한 명이 한국에서 지식생산 및 대중적 이데올로기의 풍토를 엄청나게 바꾸어놓았으나 여기에 대해 자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는 우리들이 수사와 수사가 끼치는 이데올로기적 영향에 얼마나 무반성적이고 취약한가를 보여준다.


때때로 자신이 자연과학 혹은 분석철학적 사고를 한다고 믿는 이들은 수사를 단순한 허례허식이나 낭비, 단순한 오류로 규정하며 이것을 추방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만으로도--보통 문학연구자들이 황금마차에 태워져 국경 밖으로 쫓겨나야 할 이들로 지목된다--보다 진실된 사회에 한 발짝 접근했다는 착각을 하곤 한다. 정확히 이러한 태도야말로 한국 사회의 담론형성이 수사와 이미지, 도식화된 구도에 취약해지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이다. 나는 왜 그들이 "자신의 영역에서 빌빌거리는" 무력한 문학연구자가 아니라 엄청나게 실제적으로 작용한 '통섭'의 수사를 건드리지 않는가를 역으로 묻고 싶다. 문학연구자가 종이 위에 예쁘고 이상한 이미지를 늘어놓으면 수사고, 자연과학교수가 방송에 나와 PPT를 틀어놓고 마이크로 이야기하면 대중교양인가? 둘 다 수사인 건 마찬가지고 오히려 오늘날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건 후자이건만, 수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심지어 우리가 그것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에조차도 수사를 벗어나 말할 수 없음을 인식하는 대신 막연히 수사는 나쁜 거다 수준에서 머무는 나이브한 태도가 여기에 있다. 조잡한 건 수사 그 자체가 아니라 수사-반대자들의 멍청함이다.


 수사는 초역사적이고, 수사의 바깥은 없다, 유감스럽게도. 수사에 대한 진정한 비판은 이러한 인식에서 나온다.  인문학 연구의 가능성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수사와 언어표현의 이데올로기적 작동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사회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조차도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연구가 가능한 공간을 배태하기는커녕 어떻게든 줄이고 싶어하기만 한다. 수사의 반대자들이 실용과 실천, 과학적 태도를 외치며 수사를 추방하려고 발악하는 시대에 수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귀를 타고 경배를 받으며 그들의 성채로 유유히 진입할 것이다. 비판적 학문의 태도는 마귀를 쫓는 게 아니라 마귀를 연구하는 데서 비롯한다는 기초적인 사실을 설득해야 할 사람이 아직도 이렇게 많다.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건 통섭이 아니라 통섭의 전파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