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수업 글쓰기 과제를 위한 기본적인 가이드라인

Comment 2018.06.06 16:33
조교를 맡고 있는 학부수업에서 글쓰기 과제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썼다. 가이드라인을 보면서 도움을 받는 학생도 아닌 학생도 있는데 단 한 명에게라도 도움이 되면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경험적으로 보면 학부 과제에서 대부분의 첨삭은 '이렇게 쓰면 더 글이 좋아져!'의 방향보다는 '이렇게 쓰(지 않)는 게 글이 덜 나빠져!'에 가까운 코멘트를 하게 되는데, 똑같은 문제지적을 수십 명의 페이퍼에 반복해서 쓰는 것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 하(지 마)세요'라고 명확히 지정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던 것 같다. 서로 노하우도 공유할 겸, 유용한 코멘트를 듣기도 할 겸 작성한 가이드라인을 일부 올려둔다.

*최초 출처를 밝히고 비영리적 용도로 쓴다는 전제 하에 교육적 목적을 위해 편집 및 수정 포함 자유롭게 활용해도 무관하다.
**이 글은 기본적으로 주어진 텍스트를 파고드는 과제를 전제하고 있으며, 수업 바깥의 여러 문헌들을 찾고 조사하는 리서치 페이퍼 과제를 상정하고 있지는 않다. 후자에 대해서는 가령 이런 링크를 참조하라(알려주신 선배님께 감사드린다).

http://departments.kings.edu/library/termpaperalternativesr.htm




1) 과제의 일차적인 목표는 주제에 맞춰 수업에서 제시된 자료를 꼼꼼하게 읽고 그에 대한 본인의 분석을 글로 쓰는 것입니다. 이때 글쓰기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그리고 페이퍼의 독자들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개되어야 합니다.

2) 이 과정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누군가가 요약해준 지식을 반복하는 대신 까다로운 텍스트를 본인의 힘으로 직접 읽고 그에 기초하여 본인의 사고를 해보는 것. 둘째, 단순히 사고를 정리되지 않은 이런저런 조각들로 늘어놓는 대신 설득력 있는 논리구조를 갖춘 한 편의 글로 건축해보는 것. 여러분들이 대학 수업의 의미를 이해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겠습니다만, 수업의 기본적인 기능은 수강생의 지적 능력을 적절하게 훈련시켜 한 학기가 지났을 때 이전과 비교해 무언가 더 진전된 바가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글쓰기 과제는 이를 위한 가장 고전적인 훈련방식 중 하나이기에, 저는 여러분이 과제의 까다로움에 낙담하거나 귀찮아하는 대신 조금이라도 더 많이 얻어가겠다는 마음으로 임하는 게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3) 구체적으로 어떻게 글을 써야할까요? 정해진 답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막막하게 느낄 분들을 위해 되도록 쉽게 설명하는 가이드라인을 소개합니다.

① 주어진 텍스트를 꼼꼼히 읽으면서, 이 책에서 중요한 대목, 어떤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들을 고릅니다. 다른 학문분야의 자료해석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인문학도 중요한 대목만 잘 짚어내도 절반은 성공하는 셈입니다.

② 해당 대목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여기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저자가 이 대목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어했을지, 꼭 저자가 의도한 바가 아닐지라도 어떤 분석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합니다(각 대목마다 따로 간단한 메모를 남겨놓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본인이 독서한 내용을 나중에 다시 읽으면서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더 깊은 함의를 깨닫게 되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이때 마치 마른 걸레를 쥐어짜듯이 단어 하나, 문구 하나까지 유심히 봐야합니다. 그 어떤 일급의 저자도 아무 생각 없이 단어를 나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본인이 고른 대목 내에서만 의미를 도출해낼 필요는 없으며, 경우에 따라 다른 중요한 대목과 비교·대조하거나 연결하면서 더 유용한 독서를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그런 대목들을 모아놓고 전체적으로 이 텍스트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가를 질문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유의사항이 하나 있다면, 본인이 어떤 대목을 눈여겨보면서 읽고 생각한 내용이 실제로 타당한지 한 번 더 점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자신의 분석이 충분히 논리적인 설득력을 갖는지, 텍스트의 다른 부분과 명백히 상충하지는 않는지 등을 생각해봅니다. 자신의 글을 객관적으로 검토하고 틀린 부분, 오해를 살만한 표현을 고치는 과정은 좋은 글을 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③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앞서의 단계에서 중요한 대목을 골라 나름대로 그 의미를 해석해보는 작업을 했다면, 이제는 그러한 분석들을 잘 연결하여 한 편의 글로 만들어야 합니다. 글이 전체적으로 설득력 있고 또 재밌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건이 필요합니다. (저는 보통 설득력 있는가, 유용한가, 재미있게 읽히는가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다만 지금은 일종의 연습용 과제이기 때문에 ‘유용한가’는 묻지 않으며, 조금 재미가 없어도 별 문제는 없습니다^^). 조금 긴 목록입니다만, 학부생들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들이니만큼 참고하셔서 같은 실책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해주세요.

- 가급적 뻔한 주제말고 본인에게도 재미있고 의미 있다고 생각이 드는 주제를 고를 것.
- 꼭 글을 쓰기 전이 아니라도 좋으니 쓰면서 전체적으로 어떤 순서로 각각의 내용을 배치해야 짜임새가 있어 보이는지 생각할 것(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른데, 일단 생각나는 대로 다 써놓고 나중에 다시 배치하는 걸 선호하는 사람도 있음). 글의 앞-가운데-뒤가 각각 따로 놀지 않도록 고민할 것.
- 문단과 문단, 문장과 문장 사이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할 것. 새로운 문단·문장이 갑자기 앞부분까지의 흐름을 잘라먹으면서 툭 튀어나오지 않도록 유의할 것.
- 문장이나 단어는 본인의 의견을 잘 드러낼 수 있도록 명확하게 쓸 것. 충분히 명료하지 않다면 글을 쓰는 사람의 사고가 명료하지 않은 것임.
- 주장의 근거는 가급적 본인이 다루는 텍스트에서 찾을 것. 철저하게 텍스트를 뒤져보는 것도 중요한 능력.
- 철학적인 함의가 있는 개념어를 다룰 때는 개념규정을 명확히 할 것. 개념규정이 명확하지 않을 경우 쓰다가 본인이 헷갈려서 이상한 이야기로 빠질 수 있음.
- 글 서두와 끝에 아무도 관심없어 할 거창한 전 사회적·인류적 교훈을 한 문단 씩 늘어놓을 필요 없음. 여러분이 지금 이 글에서 전 지구적·전 사회적 이슈를 제대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도,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도 없음. 만약 대입 논술에서 그렇게 배웠다면, 이제는 그때 배운 내용을 떠나보낼 시간.

- 두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는 내용을 한 문단에 걸쳐 늘려 쓸 필요 없음. 본인의 사고를 명료하고 간결하게, 최대한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훈련.
- 전체 내용의 전개에서 필요 없거나 중복되는 내용은 과감히 포기할 것. 독자가 읽으면서 “이 부분이 왜 필요하지? 이 내용을 이렇게 길게 쓸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할 것. 실컷 써놓고 보니 별로 필요 없는 내용이 되는 경우는 늘 있는데, 아깝더라도 망설임 없이 빼버려야 더 좋은 글이 됨. 어려운 주제를 다루다보니 어쩔 수 없이 글이 빽빽하거나 전문적인 내용으로 채워지는 때는 있으나 (물론 지금 여러분에겐 해당이 안 되는 사항^^) 그런 게 아니라면 독자가 읽으면서 시간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가장 중요한 내용만을 가장 간결하게 전달하도록 노력할 것.
- 본인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멋있어 보인다거나 분량을 채운다는 이유로 억지로 써놓지 말 것. 다 티 남. 과제는 스스로의 능력으로 소화한 내용을 적절하게 보여주는 자리이지,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을 기계적으로, 현학적으로 읊는 자리가 아님.
- 텍스트를 깊이 있게 읽기 위해 다양한 참고문헌을 찾아보는 노력은 물론 권장될 일이지만, 다른 논문이나 백과사전 등등에서 적당히 요약된 내용을 그대로 받아오거나 하지 말 것. 틀리거나 부적절한 내용도 많고 글쓰기에도 별 도움이 안 됨(여러분 대다수는 좋은 2차 문헌과 그렇지 않은 문헌을 구별하는 훈련을 받은 적이 아직 없음).
- 독자(선생님과 조교)가 다 아는 상식적인 내용을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 없음. 마찬가지 맥락에서 ‘삶의 상식’, ‘우리 삶의 교훈’ 같은 거 넣지 말 것. 글의 밀도도 떨어지고 괜히 억지로 분량 채우려는 걸로 오해받기 좋음.

- 과감하고 도전적인 질문을 던져보고 남들이 하지 않을 법한 이야기를 꺼내보려는 태도는 그 자체로 좋음. 그러나 결과물이 망상의 늪으로 빠져들지 않으려면 그렇게 고민한 내용이 다른 독자에게도 설득력이 있을 것인지 스스로에게 거리를 두고 검토해야 함.
- 인간의 사고과정에서 도식화는 피할 수 없으며, 도식화를 완전히 부정하려는 노력은 대체로 혼란만을 낳곤 함. 그러나 본인이 설정한 도식이 텍스트가 말하는 바와 명백히 충돌하는 예를 무시하거나 텍스트의 모든 내용을 한 가지 도식으로 환원하려 하지 말 것. 텍스트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며 독자도 무리수를 모를 만큼 바보가 아님.
- 퇴고는 반드시 철저하게. 귀중한 1점을 선사할 수 있음.

④ 철학·문학 텍스트를 읽고 분석하라는 과제는 기본적으로 학적인 글쓰기(academic writing)를 요구합니다. 여러분의 글이 (설령 이 수업 내에서만 읽힐지라도) 공적인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거죠. 여러분의 감상이나 생각, 개인적인 추억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독후감이나 독서일기는 제가 읽고 싶은 글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감상을 표현하고 싶다면, 혹은 그래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걸 “나는 ~~라고 생각한다, 느꼈다” 식이 아니라 텍스트가 어떻게 읽히는지, 그 근거는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쓰도록 하세요. 글은 언제나 필자로부터 시작하지만 그 끝은 독자에게 있다는 사실을, 따라서 독자가 무엇을 원하고 또 그를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⑤ 위 가이드라인를 보면서 깊은 한숨을 내쉴 여러분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가이드라인에 따라 처음부터 끝까지 한 편의 글을 다 써보게 되면, 설령 그 글이 아주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닐지라도, 분명 여러분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걸 보장합니다. 대신 그러기 위해 읽고, 생각하고, 쓰고, 끝까지 고치는 작업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두세요. 좋은 글은 충분한 시간을 쏟아야만 적절한 크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일단 읽고 메모를 남기는 일부터 시작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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