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로와 삭제: 대학(원)에서의 성추행·성범죄를 어떻게 다룰 수 있는가?

Comment 2017.11.13 23:44
한국 온라인 페미니즘의 부흥이 초래한 중요한 결과 중 하나는 2016-17년에 걸쳐 문학·문화·예술·대학원을 포함한 제반 영역에서 그동안 묵인되거나 대수롭잖은 걸로 치부되고 말았던 각종 성폭력·성추행·성희롱 경험 및 그 가해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폭로가 이어졌다는 것이다. 애초에 한국 온라인 문화가 미국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결코 적지 않음을 고려하면 놀랄 일이 아니지만, 유사한 폭로·고발 운동이 미국에서도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이는 내 지적인 관심범위 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가령 현대 영문학/비교문학의 스타 연구자인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 및 언어철학의 대가 존 설(John Searle)의 성폭행·성추행 의혹에 관한 갖가지 폭로가 이어진 것이다(모레티 사건 관련 기사: https://www.stanforddaily.com/2017/11/09/two-women-accuse-former-stanford-professors-of-sexual-assault/ /
존 설 사건 관련 기사: https://www.buzzfeed.com/katiejmbaker/john-searle-complaints-uc-berkeley?utm_term=.tr4wD535j#.atNK4Y7Yr).

나는 각 건에 대해선 현재 링크된 기사 이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이 주제를 두고 영미 학계·대학원에 있는 지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나 자신이 속한 한국의 대학원에서 발생했던 여러 케이스를 반추하면서 특히 학술장·대학(원) 공간에서의 성범죄·성추행을 처리하는 과정에 있는 난점을 몇 가지 언급하고 싶다.

1. 한국의 대학원에서도 마찬가지로 제기되는 문제지만, 위의 언급된 케이스들은 특히 교수-대학원생 간 성추행·성범죄·권리침해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 문제의 처리를 다른 동료 교수가 맡는 현재의 관행이 과연 얼마나 적합한 제도적 선택인지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심의·징계를 맡은 교수가 여파가 커지는 걸 결코 원하지 않는 동료교수집단·학교·학과의 암묵적인 이해관계에 굴복할 가능성이 높다는 오랜 의심은 별도로 하더라도, 애초에 교수들은 연구·교육 관련 전문성을 획득한 사람이지 사법적인 성격을 띤 문제를 조사하고, 심의하고, 판단하는 과업을 위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아니다.

사태의 명암이 아주 명백하게 갈리는 예외적인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사태를 묵인하거나 덮어버리려 했던 다양한 시도들은 물론이고, 증인들에 대한 반대심문이나 자료검토 과정에서 담당교수들이 충분히 철저하지 못했다는 식의 불만이 계속 제기되는 걸 볼 때, 나는 애초에 이런 문제를 대학 내에서 자율적으로 해결한다는--실질적으로는 교수들의 자율성에 맡긴다는--일반적인 모델이 과연 얼마나 효과적인지에 의구심이 든다. 간단히 말해 현재의 모델은 충분히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과도한 책임을 부여하고 있고, 이는 불만족스러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공론장에서의 사적인 폭로와 같은 대응이 이어지는 부작용을 유발한다. 이 패턴의 반복되면서 누적될 때 그 결과는 단지 '피해자들'의 개별적인 원한의 축적만이 아니라 시스템·제도 자체에 대한 전체 구성원의 불신을 증가시키고 결과적으로 문제해결과정의 효율을 떨어트리는 데까지 이어질 것이다(한국의 몇몇 대학은 이미 이 단계에 진입했다). 만약 대학(원)이 지금까지처럼 제한된 자율성이나마 보전하고 싶다면, 기존의 모델을 어떻게 수정할 것인지를 반드시 숙고해봐야 한다.


2. 이러한 문제에서 특히나 공소시효가 지나거나, 혹은 증거를 확보하기 어려운 경우 가해지목자에 대한 '처벌'은 사적인 형태를 띠곤 한다. 공론장에서의 사적 폭로 및 폭로내용의 확산이 이미 고전적인 방식이 되었다면, 또 다른 일반적인 '징계' 중 하나는 가해지목자를 아예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그와 그의 저작물 일체를 보이콧하는 일종의 '기록말살형'이라고 할 수 있다(특히 연구자나 예술가처럼 본인 자체보다 본인의 저작물이 끼치는 영향력이 더 중요한 경우엔 이런 방식이 선호된다). 역설적인 것은 후자의 방식이 바로 해당 가해지목자와 얽히는 것을 회피하는 기구--가령 대학(원) 본부--의 이해관계와 맞물린다는 사실이다. 가해지목자의 흔적은 철저히 소거되고, 대학(원)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점잖고 품위있는 공간으로 돌아간다. 교원들은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절대로 미디어에 알리지 말고 학교 내에서 조용히 처리될 수 있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으며, 심지어 대학이 먼저 온라인에서 가해(지목)자 관련 기록을 지워주는 업체를 고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물론 현재로서 우리가 이런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이 과연 올바른 대응인가? 누군가의 문화적·예술적·학술적 기여를 말살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그 영향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 경우에 따라서는 한 시대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나아가서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학문적인 난처함은 둘째치더라도, 과연 사건을 지우고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치워버리면, 모든 문제를 어둠 속에 밀어넣고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보상 문제로 미뤄버린다면 그게 문제를 해결하고 공동체·제도·사회를 더 나은 공간으로--가령 그처럼 비난받아 마땅한 문제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을 공간으로--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가? 고백하건대 나 또한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새 암묵적으로 따르게 된 지금의 방식이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 자체는 숙고할 필요가 있다. 검열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부작용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3. 보다 느슨한 네트워크를 통해 운영되는 문화예술계에서의 성범죄·성추행이든, 좀 더 타이트하고 폐쇄적인 제도에 기대어 운영되는 대학(원)·연구기관에서의 성범죄·성추행이든, 우리는 아직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대응하고 처리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답변을 알지 못하며 이제부터라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붙잡아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부분적으로 이 문제는 과거 수십 년 전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거나 적당히 은폐될 수 있었던 일들이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재규정되기까지 역사가 진전해 온--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역사의 진보에 회의적이지만, 난 이 지점에서만큼은 우리가 진보해왔다고 단언하고 싶다--과정의 산물이다. 동시에 이 문제는 경찰과 법정의 엄격한 틀이 제대로 잡아내지 못하는 영역에서 발생하는 일들을 어떻게 규정하고, 대응하고, 감소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며, 대학(원)이나 문화예술계와 같이 고유의 전문성·코드에 따라 작동해온 영역에서 시민사회의 일반적인 규범을 어떤 식으로 관철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먼저 우리는 시민사회의 모든 구성원을 재교육해야 한다는 합의에 도달해야 한다--나는 그런 점에서 여성주의·인권에 대한 교육이 상대적으로 좋은 학교의 고학력자들에게 집중되어 온 상황을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주의와 인권교육을 받는 것이 모든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로 자리 잡지 않으면 시민사회는 지탱될 수 없다. 그러나 효과적인 교육방식과 제도를 구축하는 것과 별개로 이전까지 발생한, 그리고 앞으로 한동안 계속해서 발생할 문제들을 어떻게 대하는 게 맞는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하다. 확실한 건, 이제 2020년대를 눈앞에 둔 우리가 더 이상 과거의 방식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지금 어쩌다보니 우리 모두가 따르고 있는 일시적인 타협책을 고수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Trackback 0 : Comment 0

Writ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