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레티. <세상의 이치>_The Way of the World_ [131019-24]

Reading 2014. 3. 18. 12:17


*2013년 10월 19일 페이스북

프랑코 모레티Franco Moretti의 <세상의 이치: 유럽 문화에서의 교양소설>_The Way of the World: the Bildungsroman in European Culture_ 국역본(성은애 선생이 번역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기나긴 혁명>에 이어 문학이론서로는 두 번째 번역인데, 둘 다 깔끔하다)을 읽었다. 조금 끌기도, 중요한 부분들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기도 했지만 어쨌든 재밌게 읽은 것은 변함이 없다. 나중에 다시 숙고하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필요할 때 인용하기 위해 들춰보기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플로베르나...다른 무엇보다도 발자크를 읽을 때가 온다면 좀 더 꼼꼼히 참고해야만 하겠지만. 논문을 쓰기 전에 읽었다면 도움이 되었을까? 디킨즈에 대한 몇몇 진술을 끌어오고 그것을 반박하기 위해, 적어도 <어려운 시절>과 <블리크 하우스>에는 아주 부분적으로만 들어맞음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했을 수는 있겠지만, 아마 인용만을 위한 인용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이 책을 논문 전에 읽었더라면 내가 논문을 완성하는 건 훨씬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모레티의 텍스트에는 역사, 지성사, 문학사에 대한 아주 풍부한 인용과 이해가 있고 그러한 자료들 위에 알게 모르게 굳건함을 드러내는 '큰 시각'이 있다. 적어도 (물론 20여년 뒤의 후기에서는 조금 입장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하지만) 18-19세기 유럽소설전통에 관해선 당시(1980년대 중반) 30대 중반의 모레티는 자신의 총괄적인 견해를 완성하고 있다. 비록 대략 10년 뒤 <근대의 서사시>에서 보다 폭넓은 형태로 나타나는 입장과는 약간 시차가 있지만--지금 <세상의 이치>는 고전적인 텍스트로 간주되지만 독자들은 그게 거의 30년 전의 모레티임을 잊으면 안 된다--, 모레티의 역사적 시선은 이미 상당한 수준의 독서를 축적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나처럼 <근대의 서사시>부터 모레티를 읽은 독자들은 E. P. 톰슨,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 톰 네언Tom Nairn을 포함한 영국 new-left 역사가들의 논의에 모레티가 꽤나 정통해 있음을 (그리고 그가 프랑수아 퓌레를 포함한 프랑스 혁명사 기술에도 동시대의 논의를 이미 따라가고 있음을), 그래서 그 자신이 이미 서구근대소설과 근대사회의 성격에 독자적이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견해를 형성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다. 그때부터도 충실히 그의 방법론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는 형식주의-구조주의적 비평에서도 그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부터 에밀 방브뉘스트로부터 바르트에 이르는 프랑스인들의 논의까지 거의 중요한 텍스트들을 이미 섭렵했음을 보여준다. 모레티의 독서량은 적어도 문학비평 논의의 최전선에 있는 비평가들 중에서 그가 절대로 재기넘치는 잔챙이가 아님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문헌학 계열이 흔히 그렇듯이, 많이 읽은 사람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으며, 그중에서도 독창적인 인물들은 설령 견해가 다른 시선을 지닌 사람들조차도 일단은 귀 기울여 들을만한 주장을 내놓는다.

그 자신도 중요하게 지속적으로 인용하는, 아마도 그래서 이 책을 거의 그와의 대결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선배 비평가 바흐친과는 달리, 모레티의 중요한 테제는 소설을 일종의 '봉합'으로 간주한다(이 문제에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적어도 <정치적 무의식>에서는, 모레티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다). 정확히 말해 그 봉합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며 또 어떤 형태로 실패하는지, 나아가 그러한 양태들이 왜 나타나는지를 해명하는 게 모레티의 작업을 설명하는 가장 단순한 설명이 될 것이다. 다만 일국적인 시선에서 진행되는 통상적인 비평들과 달리 독일-프랑스-영국(그리고 때때로 나타나는 러시아와 이탈리아)의 서로 다른 조건들을 각각의 서로 다른 근대형성의 과정으로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이 모레티의 특장 중 하나다. 일국의 시선 안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통상의 외국어문학 연구자들이 근대성에 대한 해명과정에서 일관된 설명을 제공할 이익과 특수한 것과 보편적인 것을 구별하기 힘들다는 손해를 함께 떠안는다면, 모레티의 해명은 (물론 때로 각각의 외국어문학 전통에 속한 비평가들이 제한적으로밖에 동의할 수 없는 진술을 하지만) 근대를 복수의 근대'들'로 동시에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는다. 적어도 복수의 국가들로 근대를 설명하는 데 있어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던 m-ist economic theorist 들(만델'님'도 이 점에 있어선 충분하지 못했고, 로버트 브레너에 이르기 전에는 이런 틀을 제공하는 경제사가들을 보기 어렵다) 대신 지리적 차이가 근대의 진행에 끼치는 영향 자체를 설명하고자 했던 세계체제론자들, 대표적으로 월러스틴의 논의를 이후의 저술에서 모레티가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 텍스트에서 잠재적으로 나타난다. 그가 세계체제론자들을 (어쩌면 너무나) 따라서 계량적인 방법론을 수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는 건--그게 단순히 또 하나의 방법적인 도전인지, 혹은 실험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의미심장하지만.

텍스트는 교양소설의 시초에서부터 그 종결(부록에 언급되는 20세기 초반의 '후기교양소설')에 이르기까지 시작과 끝을 갖는 하나의 서사를 갖는다. 그 때문에 이 텍스트는 어쩌면 그 자체적으로 서구근대를 해명하는 하나의 시각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래도 크게 무리가 없을만큼의 힘을 갖고 있기도 하고. 최종적으로, 역사와 문학, 사회 제도와 문화적인 것들의 상호작용을 형성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은 한번쯤 거쳐야 할 모델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겠다.


* 2013년 10월 24일 페이스북.

프랑코 모레티.  <세상의 이치: 유럽 문화 속의 교양소설>_The Way of the World: the Bildungsroman in European Culture_. 성은애 역. 2005. ; 원저 초판은 1987년에 나왔고, 국역본은 개정증보판을 번역한 것이다.


개정증보판 서문: "20년 후"


...나는 방금 묘사한 것 같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많은 [일상을 묘사하는] 에피소드들이 소설의 의미를 확립하는 데 장애가 되기는커녕 그 의미를 드러내는 특유한 매개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극장, 미뇽, 아름다운 영혼, 비밀스러운 모임--그리고 물론 그 모든 위대한 생각들. 그러나 '부르주아 500년'(토마스 만)에 대한 괴테의 독특한 공헌은 다른 데 있다. 즉 일상적 현실의 온유한 리듬을 '활성화'했던 것, 즉 서사적으로 흥미롭게 했던 것이다. (9)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산업의 도약, 1830년, 차티즘, 1848년--교양소설(그리고 소설 전반)/에서 유럽의 역사는 행위의 '영역'이 아니라 단지 행위의 지평(그것도 아주 먼)일 뿐이다. 공적인 삶이 폭발적이고 열정적이었던 시기에조차 소설은 사회적 갈등의 폭풍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끈질기고도 현실적인 능력으로, 단호하게 사적인 영역을 선택했다(이는 또한 소설이 읽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이렇듯 정치적인 삶으로부터 물러서는 특징으로 인해 소설은 [벵자멩] 콩스탕(COnstant)이 명확하게 규정했듯이 근대인의 자유(liberte' des modernes)의 한 측면이다. (11-12)


(각주 6번) 부르주아와 구 지배계급의 차이는 일의 영역에서는 확실히 드러나는 반면에 '자유 시간'의 영역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혁명적인 국면을 제외하면, 이들 소설에서 부르주아와 귀족의 만남에 대해서는 장기적인 설명이 가능하다. 즉 19세기의 부르주아지는 귀족적 생활 방식의 어떤 면들을 자신의 문화적 형성에 맞춰 재활용했으며, 교양소설이란 그것대로 이러한 상황을 가장 완전하게 반영하는 상징적인 형식이었던 것이다. 이 교양소설에서 반복되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일을 벗어난 후엔, 부르주아란 무엇인가? 그는 어떤 일을 하는가? 그는 어떻게 사는가? 그리고 반복하여 되돌아오는 대답은 이렇다. 그것은 옛것과 새것의 기이한 혼합이며, 유동적이고도 단편적인 정체성이다. 질문과 답 사이에 근대적 젊음의 짧은 궤적이 펼쳐진다. 두 가지 사회적 모델의 가능한 타협을 탐구하는 부르주아적 삶의 실험의 계절이. (14)


 즉 폭넓은 문화적 형성, 직업적인 이동성, 완전한 사회적 자유--오랫동안 서유럽 중산계급 남성은 이러한 것들을 실질적으로 독점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그는 교양소설 장르에서 일종의 필수조건sine qua non이 되었다. 그가 없으면, 또한 그가 향유하는 사회적 특권들이 없으면 교양소설을 쓰기란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을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므로. (15) [이후 모레티는 각주로 영국의 오스틴Jane Austen, 엘리엇George Eliott, 샬럿 브론테와 <마담 보바리>, 케이트 쇼팽의 Awakening 등을 예외적인 사례로 든다]

분명이 해두건대, 이는 상상력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의 문제다. "부르주아들과는 달리 젊은 노동자들은 개인의 사회성과 표현의 자율적인 형식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안락한 자기 형성의 과정을 즐기지 못한다"고 미셸 페로[Michelle Perrot]는 한 흥미로운 비교 논문에서 말했다. "일터에 일찍 진입하는 것은 그들의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동시에 성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리들을 박탈해버린다." 짧고 억눌린 젊음--육체 노동이라는 저주에 맞서 싸우는 이들 소설의 주인공들에게는 더욱더 그러하다. 노동자의 자서전에서는 "기율이 저항보다 훨씬 더 자주 언급된다"고 페로는 말하며, 독자들은 가난이 [토마스 하디의 <무명의 주드>_Jude the Obscure_의] 주드와 다른 주인공들에게 강요한, 쾌락에 대한 가차없는 억압을 기억한다. 책상머리에서 공부하며 졸음을 쫓는 밤, 성애의 좌절, 배고픔, 외로움, 추위.... (16)

젊은 시절의 루카치가 건방지게 표현했듯이(물론 자라서 잊어버리기 전에 말이다), 문학의 가장 심오한 사회적 측면은 그 형식이다. 좋다. 그렇지만 책을 써나가면서 나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고 있다는 증거와 계속 부딪치게 되었다. 우선 이 소설들의 형태론은 매우 혼성적인 것이었다. 다양한 형식적 요소들이 내부에서 항상 서로 '불화하고' 있었고(예를 들어 발자크의 플롯은 그의 서사 스타일과 완전히 모순된다), 그래서 텍스트들은 고통스러운 브리콜라주[bricolage]의 과정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데올로기적인 차원에서도 이상한 점이 있었다. 교양소설은 나름의 사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어서 사상사나 정치이론의 역사에서 알게 된 그런 것들과는 거의 공통점이 없는 듯이 보였다. 이들 교양소설에는 늘 뭔가 이상하고 '잡다한'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이유를 알았다. 이 소설들은 일관된 세계관을 형성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구분되는 세계관들을 화해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마치 발자크의 보수적-진보적 잡종처럼, 혹은 영국소설에서 보이는 불관용과 정의의 부조리한 혼합물처럼. (19)

그러고는 1980년경, 신역사주의가 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것들과, 탈식민주의 연구에 의해 유도된 문학 현장의 확대에 힘입어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비평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연구 대상은 매우 참신하고 흥미진진한 것이어서, 그 세대 전체가 역사적인 자료들에 직접 집중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비평의 초점을 (저 케케묵은, 그러나 여전히 유용한 용어를 쓰자면) 형식에서 내용으로 돌려놓았다. 물론 이러한 전환이 '형식주의적' 버전의 정치적 비평을 넘어서는 진정한 방법론적 발전인지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좀 의심스러워하는 편이다. 형식적 패턴이란 문학이 역사적 현실을 감당해내고 그 재료들을 선택된 이데올로기적 기조로 다시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형식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그 전체 과정의 복잡성(따라서 흥미)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그 엄밀한 정치적 의의도 잃어버리게 된다. 혹은, 그렇게 보인다. (21)

"상징적 형식으로서의 교양 소설"

...다양한 종류의 교양소설들 사이에 ('문체적'인 것을 비롯해서) 헤아릴 수 없는 차이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연구를 주로 플롯의 차이를 중심으로 구성하려고 한다. 내 생각엔 이것이 역사적 서사 문화의 수사적·이데올로기적인 정수를 포착하는 데 가장 적절한 듯하다. 플롯의 차이, 좀 더 정확히 말해서 플롯이 의미를 생성하는 방식의 차이. 기본적으로 [유리] 로트만Lotman의 개념화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이 차이를 텍스트 구성의 두 가지 원칙, 즉 '분류'classification의 원칙과, '변형'transformation의 원칙의 무게의 다양성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이 두 원칙은 서사 작품에 항상 들어있지만, 이들은 보통 서로 다른 무게를 지니고 있으며, 실제로는 반/비례 관계에 있다....//

 분류가 승한 경우--영국의 '가족 로맨스'나 고전적 교양소설에서처럼--서사의 변형은 그것이 특정하게 표시된 종결을 향해 나아가는 한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이는 처음 것과는 다르되, 완벽하게 분명하고 안정적인--영어에서 definitive라는 말이 갖는 두 가지 의미대로 명확하면서도 한정적인--분류를 확립한다. 이러한 목적론적 수사--사건들의 의미는 그것의 궁극성에 있다--는 헤겔식 사고의 서사적 등가물이며, 강력한 규범적 소명을 갖는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즉 사건들은 하나의 결말, 오로지 하나의 결말을 향해 갈 때에만 의미를 획득한다.

 다시 말하면 분류의 원칙 하에서 이야기는 이야기로서 스스로를 억압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의미 있게 된다. 변혀으이 원칙 하에서는--스탕달이나 푸슈킨, 혹은 발자크에서 플로베르로 대표되는 경향에서 볼 수 있듯이--그 반대이다. 이야기를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그 서사성, 즉 결말이 열린 과정이다. 의미는 목적론이 충족된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윈의 경우처럼 그러한 해법을 송두리째 거부한 데서 나온다. 결말, 즉 분류학적 기질이 선호하는 그런 서사적 순간이 여기에서는 가장 무의미한 순간이 된다. <오네긴>의 망가진 마지막 장, 스탕달의 뻔뻔스럽도록 자의적인 종결, 혹은 <인간희극>_Comedie Humaine_의 영원히 연기된 결말들은 한 이야기의 의미가 바로 그 이야기를 '고정시킬'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고 하는 서사 논리의 예들이다. (32-33)

...교양소설이 18세기 말에 일어났던 다양한 서사 형식--역사소설, 서한체소설, 서정적·우의적·풍자적·'낭만적' 소설, 예술가소설 등등--사이의 진정한 '생존 경쟁' 에서 승리하여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만든 것은 바로 타협하고자 하는 경향이었다. 다윈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형식들의 운명은 각각의 '순수성'에 달려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엄격한 원래의 구조에 얽매여 있으면 있을수록 살아남기는 어려웠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어떤 형식이 유연하고 타협의 여지가 많을수록 근대사의 종합 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더욱 번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들 가운데 제일가는 사생아가--서구 서사의 지배적인 장르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근대 이데올로기'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혹은 독자들이 원하는 어떤 것의 개념을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교양소설의 성공은,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진정으로 중심적인 이데올로기들--널리 퍼진 확신--이 우연히도 해체론적 사고에서 더 널리 퍼져 있는 확신과는 반대로 전적으로 복속되거나 아니면 거부할 만큼 엄격하고 규범적이고 독백적인 것이 전혀 /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전혀 그 반대이다. 그 이데올로기들은 유연하고 불안적하며, '약하고' 또한 '불순하다'. 교양소설--그 무엇보다도 근대적 사회화를 형상화하고 장려했던 상징적 형식--은 또한 근대의 상징적 형식 가운데서 가장 모순적인 형식이기도 하다는ㅇ 점을 상기하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사회화 자체가 무엇보다도 모순의 내면화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다음 단계는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순과 더불어 사는 법을, 심지어 그 모순을 생존의 도구로 바꾸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에. (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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