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피터슨을 문명비판/반세속주의 전통에서 이해하기?

Intellectual History 2018. 12. 9. 12:56
다른 포스팅에서 다루었듯 나는 조던 피터슨에 대해 이미 충분히 내 의견을 밝혔고, 다른 분들의 독서에 특별히 더 코멘트를 붙일 생각이 전혀 없다(http://begray.tistory.com/480 참고). 그에게 과대한 지적권위를 부여하지만 않는다는 전제 하에, 특히 자기계발서는 읽고 싶은 분이 읽고 얻고 싶은 거 얻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바빠 죽을 것 같은 와중 (3일 동안 이제 850쪽을 읽어야 한다! 우웩!) <슬로우뉴스>에 게재된 "조던 피터슨 이해하기"에 내가 어떤 의견을 지니고 있는지 여러 지인을 통해 문의가 들어왔다(http://slownews.kr/71809). 간략하게 의견을 밝힌다.

글에서 핵심줄거리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사는 문명세계가 "계몽주의, 과학혁명, 산업혁명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또 "20세기 후반부터 동시다발적으로 가속화된 [산업적·기술적 발전 및 그로 인한 사회적] 경향들"에 의해 개개인들이 (주로 종교·공동체로 대변되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세계가 되었고, 조던 피터슨의 저작은 그러한 변화에 대항해 삶의 의미를 다시 추구하는 책이기 때문에 특별한 의의를 갖는다는 것이다.

사상과 담론, 종교를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세속화"(secularization) 서사의 클리셰를 반복하는 이 서사에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① 1990년대부터의 종교사회학 분야에서, 그리고 2000년대 이후 여러 분야의 세속화 연구에서 나타났듯 종교는 우리 삶에서 그다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20세기 서구 사회에서 68을 포함해 몇 차례에 걸쳐 기독교회의 힘이 점차 쇠퇴한 건 사실이지만 미국이든 한국이든 여전히 종교가 여러 분야에서 영향력을 지속하고 있으며, 근래 수십 년 간의 지성사 연구를 보면 계몽시대든 산업혁명이든 종교적 논의의 영향을 더욱 강조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현재의 젊은 세대는 좀 다를 수 있겠는데, 실제로 기존 종교를 믿지 않는 게 곧 삶의 의미상실로 이어진다는 설명은 내 생각에 아직은 그닥 근거가 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다.

② 링크한 기고자 본인의 글을 포함해 세속화·의미상실의 세계를 한탄하는 내러티브 자체가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특정 시기 이후 계속 반복되는 이야기다. 나는 영문학 전공자이므로 한정된 예만 들자면, 18세기 영국 혹은 보수주의 담론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의 성찰>을 바로 떠올릴 수 있고, 19세기 중반에는 토머스 칼라일이나 매튜 아놀드, 존 러스킨 등 기술문명·산업화를 비판하는 "현자"(sage)들이 문화담론을 주도하고(현대 문화연구cultural studies의 출발점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초기 주저 <문화와 사회>가 결국 이 이야기다), 20세기 초반부터는 파시스트나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눈에 띄며, 미국으로 넘어와서는 68 이후 (트루스포럼이 얼마 전에 인용하기도 한) 러셀 커크 같은 사람들도 이런 범주에 있다. 당연히 모두 우파도 아니고, 1970-80년대 영미 정치철학에서의 자유주의 대 공동체주의 논쟁을 보면 후자의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나 찰스 테일러 등 전통적으로 좌파 스탠스에 더 가까운, 현재 살아있는 저자들도 있다(매킨타이어의 <덕의 상실>After Virtue이 처음부터 이 얘기 하는 책이다. 한국어 번역이 많이 별로지만).

③ 이러한 문제의식은 현재도 계속 저작들이 튀어나오고 있는데 피터슨이 거기에서 어떤 위치냐면... 역사는 지나간 다음에야 포착할 수 있지만, 현재로서는 전혀 중요한 기여를 하는 저자라고 볼 수 없다. <의미의 지도>를 보면 알아차릴 수 있지만 반反세속주의 전통에서 피터슨은 융·엘리아데·니체·프라이 등 신화학적 전통과 심리학을 연결시키는 매우 괴상한 포지션에 가깝고 이쪽 논의 핵심부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제대로 개입한 적도 없다. 굳이 말하면 68 이후 좌파 좀 발을 담갔다가 그 반동으로 종교적 영역으로 들어가 비의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괴짜 중 한 명이랄까. 세속화 논쟁 자체에 관심이 있다면 2000년대 이후 영어권에서 가장 중요한 책 중 하나는 찰스 테일러의 <세속화 시대>(A Secular Age, 2007)지만 아직 한국어로 번역이 안 됐고 꽤 두껍기 때문에, 그리고 (영어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지적인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한국에 읽어본 사람들이 아직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지금은 당연히 테일러의 저작에 대한 비판적인 코멘트들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그러니까 지성사나 철학 쪽 학계에서는 말이다.

*(피터슨의 의미의 논리에 대해선 내 블로그 http://begray.tistory.com/478 을, 테일러의 <세속화 시대> 중 4부 내용을 요약한 챕터는 역시 내 블로그 http://begray.tistory.com/394 를 참고하시라)

세 가지 지적을 요약하면, 기고자의 문명비판적(?) 서사 자체가 최소한 18세기 후반부터 사회가 좀 바뀔 때마다 유행처럼 튀어나오는 이야기고, 그 이야기에 기초한 역사적 분석은 근래의 종교 관련 연구에서는 상당히 많이 수정되고 있으며, 설령 그 이야기 전통을 존중한다고 해도 피터슨은 거기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수많은 저자들 중 한 명에 불과하다. 한국에선 인문학계가 이런 쪽 연구가 빈약하다보니 영어권 학계 논의를 파헤쳐보는 연구자가 않으면 잘 모를 수 있지만 그쪽에서 볼 때 적어도 반세속주의로서 피터슨의 이야기는 새로운 게 없다. 한국의 지적 전통에서 이런 쪽에 가까운 분들이라면... 굳이 꼽자면 젊어서 서양 학문 공부하다가 나이 들고 주역이나 불교, 동양고전으로 가시는 분들이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겠다(물론 대체로 그분들의 동양고전 해석은 진짜로 동양사상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겐 진지하게 취급받지 않는 듯하다).

그러니까! 제발! 피터슨에! 과장된! 의미부여 좀! 하지 말자! 가 오늘의 교훈이다.

마지막으로 연구자의 길 혹은 지적인 독서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위한 코멘트.

링크된 기고문은 몇 가지 거시적인 변화를 상정한 다음 여기에서 곧바로 매우 미시적인 담론적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고 있는데, 이런 시도는 기고자가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것이며 저명한 경제사가·사회사가들이 종종 해오곤 했다. 그리고 이중에서 멀쩡하게 성공한 작업은 아직 본 적이 없다. 며칠 전 진짜로 지성사를 전공한 선배와 이야기하면서 나온 이야기지만, 경제사 하던 사람들이 지성사·사상사로 들어오면 매우 도식적이고 뻔한 이야기나 괴작을 내놓기 쉽고 실제로 구체적인 역사로 들어가면 죄다 틀린다. 현대 담론을 유의미하게 분석하고 싶다면 물질세계에서의 거시적 경향 몇 개를 뽑아내 모델링을 만들어서 썰을 푸는 거 말고 그냥 현대 담론을 분석하는 연구들을 참고하라.

그리고...특히 공부를 시작하는 똑똑한 학생들이 저지르기 좋은 실수인데, 큰 이야기하는 책 몇 권 읽고 세상만사 정리해보는 시도는 개인의 지적 훈련으로 나쁘지 않겠지만 세상엔 이미 그런 시도가 많이 있었고 대체로 별 소득은 없었으니 (그런 내러티브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낸 것이 20세기 후반 역사학계의 수정주의자들이 남겨놓은 가장 큰 유산이다) 그냥 제대로 된 연구를 고생해서 뒤져보는 게 왕도다. 세상을 쉽고 단순하게 정리하고픈 태도는 실용적인 목표를 위해서는 의의가 있지만 진지한 역사적 탐구로는 독이 되기 쉽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