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7일 일기: 로크, 18세기, 슈니윈드 <자율의 발명> 출간

Comment 2018.09.10 01:31
[*Facebook, 9월 7일 새벽 업로드]

한 주 간 개강을 준비하고 이것저것 일들을 처리하느라 바빴다.

1. 학기 시작 전까지 로크의 <인간지성론>(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에 대한 독서노트 겸 코멘터리를 작성하려다, 아무리 로크 전문가가 아니라고 해도 너무 헛소리를 쓰는 건--가령 현재 나무위키 "존 로크" 항목을 보면 거의 반 세기 이전의 관점으로 쓰여진 것 같은 대목으로 가득하다--아닌 것 같아 2차 문헌을 찾기 시작했다. Locke Studies 같은 저널은 어차피 너무 전문적인 연구들이니 차치하고, 최대한 컴패니언/핸드북에 실린 것들 중 도덕/정치 쪽 설명만 골라 읽는데도 (인식론, 심리학 등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연구동향을 따라가는 데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다. 이는 일차적으로 로크의 지적인 기여가 무척 폭넓고 강력한 덕이지만, 로크 자체가 여러 논쟁과 결부되면서 (가령 '로크는 근대적 자유주의의 시초다!' 같이 반세기전부터 깨지고 깨지고 또 깨지는 데도 계속 잡초처럼 튀어나오는 주장과의 대결이라든가...) 그만큼 많은 연구자들이 뛰어든 탓도 있다. 과학(철학)사, 문화사, 출판사 및 서책사(Book History) 등 지난 반세기에 걸친 인문사회학의 확장으로 인해 17-18세기 (서)유럽 및 영국의 담론장에 대한 재구성의 시선이 무척 두터워지면서 특히 로크처럼 다양한 영역에 결부된 저자를 해석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맥락적 자원이 폭넓어진 점도 덧붙여져야 한다. 여튼 2010년대부터 나온 철학/지성사 관련 주요 컴패니언/핸드북 중 하나도 참고하지 않고 로크에 대해 시대착오적인 코멘트를 하지 않기란 무척 어렵다는 것만 말해두자.

2. 이제 정년을 맞이하시는 지도교수님의 마지막 대학원 수업을 서포트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지난 몇 년 간 교수-조교로 손발을 맞춰온, 서로에게 최적화된 파트너^^라고 느끼는 것도 있다보니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이 가능한 최선의 형태가 될 수 있도록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기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선생님의 수업은 낭만기 문학텍스트를 일차적으로 1790년대의 정치적·도덕적 논쟁의 맥락에서, 보다 크게는 18세기부터 이어지는 지성사적 맥락에서 읽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난점은 이 문제의식을 꽤 오랜 기간 숙성시켜오신 선생님의 논의와 대부분이 18세기/낭만기를 전공해본 적이 없는 수강생들의 사전지식 사이에 상당한 격차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간극을 최대한 메꾸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다보니, 첫 대학원 수업이 끝나고 난 뒤 가능한 단기간에 효과적으로 18세기-낭만기의 지적/문학적 쟁점의 흐름을 전달할 수 있는 문헌 목록을 어떻게 짤 지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속한 학과는 해당 시기에 나온 고전적인 문학텍스트의 목록을 논문제출자격시험 출제범위의 형태로 제공하긴 하지만, 연구자들이라면 단순히 1차 문헌을 읽는 것과 이후 수많은 2차 문헌들을 통해 이루어진 학적인 지형을 파악하는 게 매우 다른 작업임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학문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동하거나 중요한 논쟁을 구성한 저술 몇 가지만 선정해서 읽혀도 지도그리기가 훨씬 빠르게 이루어질 수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표준화된 2차 문헌 목록이 제공되는 게 아니다보니 꽤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는 이상 중요한 개념조차도 매우 거친 수준에서 이해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왕왕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나는 기본적인 앤솔러지로는 The Cambridge History 시리즈나 The Oxford Handbook, The Cambridge Companion, Routledge Companion 등에서 (주로 문학, 철학, 지성사 쪽에서) 연관 주제를 다룬 텍스트를 고르고, 일부 주제 중 Oxford Very Short Introduction 에서 잘 다뤄진 (같은 시리즈라도 주제마다 서술의 질적 편차가 존재하기는 한다) 편이 있으면 그걸 골라 18세기-낭만기를 처음 접하는 학생들을 위한 참고 문헌리스트를 만들어 올렸다(프랑스 혁명의 경우 해당 분야를 전공한 신뢰할 만한 전문가의 추천을 받아 접근성이 높은 문헌 일부를 골랐다). 한 주 정도 있다가 중요한 단독저작monograph 중 몇 권을 뽑아서 제2차 추천을 하는 것도 고민 중인데... 지금은 포콕의 <마키아벨리언 모멘트>가 들어가야 한다는 걸 빼고는 아직 고민 중이다.

3. 그 와중에 제롬 B. 슈니윈드(J. B. Schneewind)의 역작 The Invention of Autonomy: A History of Modern Moral Philosophy (1998)의 한국어 번역본이 <근대 도덕철학의 역사: 자율의 발명>이란 번역제로 며칠 전 나온 걸 알게 되었다! 원저가 650쪽에 가까운 결코 짧지 않은 분량임은 알고 있었지만, 한국어판으로 3권 분책, 총 1248쪽, 합계 8만원으로 나온 건 약간 복잡한 기분이 든다. 판매고를 기대하기 힘든 책임은 당연하지만, 같은 가격이라도 훨씬 더 적은 쪽수로 덜 부담스럽게 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단상이 오가고 있다. 번역을 직접 접하기 전에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슈니윈드의 영어는 내가 부분적으로 읽어본 느낌으로는 전혀 어렵지 않은, 매우 친절하면서도 명료한 영어이기 때문에 번역 또한 수월하게 읽히는 형태로 나왔기를 희망하고 있다.

책 자체는 그로티우스·프란시스코 수아레즈에서부터 맨더빌, 흄, 스미스 등등을 거쳐 칸트에 이르는 17-18세기 서양 도덕철학사를 기술한 단독저술 중 가장 뛰어난 저서라고 할 수 있다. 과거에서부터 케임브리지 사상사 학파와 교류해온 저자답게 '순수한' 철학적 문제들만을 다루는 책에 비해 지성사적 컨텍스트를 훨씬 폭넓게 수용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별점을 가진다. 목차를 볼 때 슈니윈드는 자기통치(self-governance)로서의 도덕성이 어떻게 칸트적 자율의 이상의 등장으로까지 이어지는지를 폭넓은 시공간적 조망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걸로 보이며, 이를 위해 기독교적 자연법과 공화주의적 정치 언어, 18세기의 감상주의(sentimentalism) 등 어느 하나 그 중요성이 결코 덜하지 않은 다양한 맥락들을 소환하고 또 복원하고자 하는 듯 하다. 물론 이러한 다양한 주제들 중 상당수는 2000년대 이후에도 분야마다 연구가 계속해서 업데이트 되고 있긴 하지만, <자율성의 발명>은 최근 연구문헌에도 어느 정도 인용되니만큼 아직 너무 낡은 책으로 분류되는 건 아닌 듯하다(반면 찰스 테일러의 <자아의 원천들>Sources of the Self은 적어도 18세기-낭만기의 철학·문예에 대한 서술에 있어 최근의 연구동향을 참고하는 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어 번역본을 직접 읽고 말할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중요한 책이 한국어로 옮겨진 것 자체가 기쁜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18세기 영국·서유럽은 물론 도덕철학·도덕담론을 역사적으로 다루는 데 흥미를 가진 분들은 영어의 부담을 상대적으로 덜고 저자의 논의를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번역이 무난하다는 전제 하에, 연구자들을 포함한 더욱 많은 독자들이 이 책에 흥미를 갖고 한번쯤은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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