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무죄 판결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는 어째서 틀렸는가?

Comment 2018. 8. 31. 06:09
나는 이전의 포스팅(https://www.facebook.com/leewcman/posts/1120166441472102 ; http://begray.tistory.com/470)에서 최성호 선생의 "안희정 무죄 판결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를 무척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해당 기고의 논증과정을 매우 대략적으로 요약했을 뿐 상세한 분석을 제시하지 않았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해당 기고의 논증이 어떤 점에서 문제적인지 적어도 내 글을 읽는 분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곧바로 판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감스럽게도 내 예상은 무척이나 안이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비록 최성호 선생의 이름을 종종 틀리게 인용하긴 하지만 해당 기고에서의 선생의 명료한 논리와 뛰어난 지성에 대한 찬탄을 아끼지 않는 어떤 분께서 내가 그처럼 빛나고 명명백백한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무지에 휩싸여 무분별한 인신공격을 가하고 있다고 지적해주셨던 것이다. 나는 그분의 지적에 최선을 다해 여러 차례 답변해 드렸기 때문에, 비록 나의 답변이 그분의 이해에 가 닿으리라는 기대는 들지 않지만, 여기에 해당 논쟁의 쟁점을 다시 옮길 이유는 없다(정말 궁금하신 분은 그냥 포스팅의 댓글을 보시면 된다). 대신 나는 아주 약간 더 생산적인 귀결을 위해 최성호 선생의 기고가 어떤 점에서 비판받을 만한지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1.

먼저 최성호 선생은 기고에서 1심 재판을 둘러싼 논란의 쟁점을 (재판부의 사건해석에서) 어떤 자유 개념을 채택할 것인가의 문제로 재구성한다. 그의 논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재판부는 고발인이 피고인 안희정과의 "관계를 진심으로 원했다는 것"을 추론했으며, 이는 "자기근원성"으로서의 자유개념, 즉 필자에 따르면 "행위자가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수행하는 것"으로서의 자유개념에 따라 고발인의 행위를 볼 때 고발인은 자유로웠고 따라서 위력에 따른 행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필자는 재판부의 사실해석이 옳다는 전제 하에 논증을 전개한다).
2) 1심 재판부의 판결에 비판적인 입장 중 핵심적인 요소는 이 사건에서 피고인의 위력에 직면한 고발인이 해당 행위를 자유의사에 따라 했다고 볼 수 없다는 논리인데, 이 논리의 중심에는 통제권으로서의 자유("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 개념이 있다.
3) 현재의 맥락에서 통제권으로서의 자유보다는 자기근원성으로서의 자유개념이 "법적·도덕적 맥락에서 적합한 자유 개념"인데, 그 이유는 해당 행위자(여기서는 고발인)의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자를 채택한 "재판부의 무죄 판결이 힘을 얻는"다.

이 논증을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까다로운 지점은 오류와 비약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엉켜있어서 하나하나 풀어내는 데 상당히 힘이 든다는 데 있다. 최초에 내 비판이 무지와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주신 분이 아니었다면 해당 기고문의 논증이 이 정도로 엉망인지 실제로 검토하고 확인하지 못했을 거란 점에서, 해당 댓글을 달아주신 분께 심심한 감사의 뜻을 전한다.


2.

첫째, 기고자의 상황요약("나는 안희정 1심 재판을 두고 최근 벌어지는 논란은 일정 부분 이 두 [자유] 개념에 대한 혼동과 오해에서 말미암았다고 생각한다")은 논쟁의 핵심을 왜곡된 형태로 소개한다. 고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받았다는 비판은 자유개념의 잘못된 이해·적용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비판자들의 주장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 사건의 사실해석은 '고발인의 자기통제권으로서의 자유가 침해받았음'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는 것, 즉 사실해석에 어떤 논리를 적용하는 게 가장 타당하느냐의 여부가 있다. "법적· 윤리적 책임을 묻는 맥락에서 더 적합한 자유 개념"이 무엇인가가 진정한 쟁점이라는 필자의 주장은 논쟁의 구도를 완전히 오도한다.

현재의 논쟁은 '어떤 자유 개념이 고발인의 책임을 묻기에 더 유용한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발인이 해당 행위에서 자유로웠는가의 여부를 해석함에 있어 재판부의 사실해석이 옳은가 그른가를 핵심적인 지점으로 하고 있다. 달리 말해 설령 기고자가 처음부터 "김지은의 피해자다움에 관한 각종 증언을 직접 청취하고 기록을 직접 확인한 재판부의 판단을 일단 존중"할 것은 전제하고 시작할 때, 이는 달리 말하자면 처음부터 기고자가 가장 중요한 쟁점에서 재판부의 해석을 지지하는 걸 전제로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장 중요한 쟁점을 처음부터 논의대상에서 제외해버렸는데 제대로 된 논쟁의 재구성이 될 리가 없다. '두 자유 개념의 충돌' 같은 게 억지로 중요쟁점으로 추켜세워진 진짜 까닭은 이 기고가 논쟁의 진정한 논점을 처음부터 다루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데서 비롯된다. 이 기고문의 괴상한 면모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지점, 즉 처음부터 논의의 구도가 이상하게 출발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3.

둘째, 이 케이스에서 두 자유 중 어느 것이 더 적합한지에 대한 기고자의 논변 또한 매우 이상하다. 기고자는 통제권, 즉 피고인이 달리 행동할 수 있었는가에 입각한 자유 개념과 자기근원성, 즉 피고인이 특정 행위를 정말로 원했는가에 따른 자유 개념을 대조하면서 "[고발인과 피고인의] 행위를 법적·윤리적으로 평가하는 현재의 맥락에서 두 자유 개념 중에서 무엇이 더 적합"한지를 물을 때 후자가 더 우월하고 그에 따라 재판부의 판결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유감스럽게도 이 논변은 여러 가지 점에서 그대로 정당화되기 힘들다.

나는 애초에 통제권적 자유의 적용이 곧 고발인이 위력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걸 의미하고 자기근원적 자유의 적용이 곧 고발인이 피고인과의 관계를 욕망했다는 식의 구도가 설정되는 것 자체가 상당히 의아하다. 왜냐하면 통제권적 자유를 적용하는 경우에도 고발인의 행위가 실제로 자유의지에 따른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사법적 입증문제는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그게 실제로 이번 재판의 핵심적인 쟁점이기도 하다). 원칙적으로 자기근원적 자유 개념을 적용하는 경우에도 고발인이 실제로 그것을 원했는지 여부를 어떻게 입증할지가 중요한 쟁점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해당 구도가 깔끔하게 성립되지는 않는데, 다만 해당 기고는 처음부터 재판부가 고발인이 그것을 원했다고 판단한 게 사실이라는 전제를 제시하므로, 바로 이 경우에만 자기근원적 자유의 채택이 피고인의 무죄로 이어지게 된다.


4.

셋째, 아마도 이 글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필자가 자기근원적 자유 개념의 우월함을 설명하기 위해 드는 예시의 괴이함에 있다. 다음은 기고문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외과 의사인 철수가 고정의자에 포승줄로 꽁꽁 묶여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그때 한 명의 응급 환자가 제때 철수의 수술을 받지 못해 사망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많은 이들이 철수는 응급 환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없고, 그것은 철수에게 신체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제 한 가지를 더 가정해 보자. 평소 수술을 귀찮게 여기던 철수는 의자에 묶여 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고. 철수는 의자에 묶여 있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그래서 설사 포승줄이 없었다 하더라도 의자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렇게 가정할 때 의자에 앉아 있는 철수의 행위는 자유의사에 따른 것인가 아닌가? [...]

그러나 철수가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실행했다는 점에서 철수의 행위가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상당한 호소력을 갖는다. 철수는 비록 포승줄에 묶여 있기는 했지만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행위, 즉 의자에 앉아 있는 행위를 수행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의자에 앉아 있는 철수의 행위는 다른 누구도 아닌 철수에게서 말미암았다. 그 행위의 근원이 철수 자신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자기근원성을 통해 자유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데, 그때 의자에 앉아 있는 철수의 행위는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것이 된다.
[...]
철수가 의자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 인해 응급 환자는 사망에 이르렀다. 그럼 그 응급 환자의 사망에 대하여 철수는 책임이 있는가? 많은 이들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비록 포승줄로 묶여 있어 의자에 앉아 있는 것 이외에 달리 행동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철수는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고, 그런 이유로 설사 포승줄로 묶여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응급 환자에 대한 수술을 집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철수의 행위를 법적·윤리적으로 평가하는 맥락에서 그 행위는 철수의 자유의사에 따라 실행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법적· 윤리적 책임을 묻는 맥락에서 더 적합한 자유 개념은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이 아니라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이라는 말이다."

이 당황스러운 논증과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①의사 철수는 의자에 묶여 있는 걸 진심으로 좋아하고 누가 구속하지 않아도 계속 의자에 머무르기를 원한다.
②어느 때인가 철수는 의자에 묶여 있었으며, 그로 인해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한 응급환자는 사망했다.
③비록 철수가 묶여서 행동의 자유가 없었지만, 철수는 해당 환자를 방치하고 사망에 이르게 하더라도 의자에 머무르길 진심으로 원했으므로, 그는 유죄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사법적 논리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법은 일차적으로 행위를 판단하며, 본래의 의도나 욕망과 같은 요소는 행위를 판단하는 해석과정의 참고요소로 쓰일 뿐 그 자체로 행위를 대체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놀랍게도 최성호 선생은 누군가에게 행위능력이 결여된 상황에서조차도 그가 행위능력이 있었다면 그렇게 행위했을 거라는 걸 전제로 그 누군가게에 법적·윤리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이웃을 진심으로 미워하고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도 그를 죽도록 방치하길 원했다고 해서, 내가 잠을 자고 있을 때 그가 나의 도움을 받지 못해 사망할 경우 내가 이웃의 사망을 방조한 죄로 법적·윤리적 책임을 져야만 한다는 이야기인가?!

조금 더 진지하게 사법적 판단에서의 적용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자기근원적 자유로부터 행위의 책임을 묻는다는 논리가 심각하게 곤란하다는 걸 바로 깨달을 수 있다. 위 철수의 사례는 처음부터 철수가 무엇을 진정으로 원했고 또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현실의 사법적 판단 과정에서 누군가가 진짜로 무엇을 원했는지 입증하는 건 매우 힘든, 대개의 경우 불가능한 과제다. 바로 그런 과제에 입각하여 누군가의 책임능력을 사법적으로 판단내리는 게 법적·윤리적으로 우월한 논리라면, 그 우월성은 내게 제기한 두 가지 문제, 즉 근원적 욕망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와 설령 행위능력이 없는 경우라도 행위하지 않음에 대한 사법적 책임을 져야한다는(!) 당황스러운 가정으로 인해 심각하게 손상당한다.

내 생각에 기고자가 이런 당황스러운 논증을 보다 법적·윤리적으로 적합한 자유 개념의 근거로 제시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즉 이 기고문은 처음부터 고발인이 피고인과의 관계를 원했다는 것이 사실임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같은 전제 하에서는 자기근원적 자유 개념을 도입할 때 피고인의 행위는 거의 필연적으로 무죄, 즉 고발인의 자유로운 합의에 따라 행동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간단히 말해 기고자는 자신의 목표, 즉 안희정의 무죄를 논증하기 위해 본인이 생각하기에 절대로 안희정이 무죄일 수밖에 없는 논리를 만들어 제시하고 싶었을 수 있다. 그 결과물이 얼마나 양호한 상태인지는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할 문제이지만 말이다.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철학적(?) 주장을 사법적 판단에 적용할 때는 당연히 그것이 사법적 판단의 논리 내에서 어떻게 기능할 것인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매우 기괴한 키마이라를 보게 될 뿐이다.


6.

끝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기고인은 처음부터 재판부의 판단이 사실이라는 전제 위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비판자들은 재판부의 사실해석에서부터 동의하지 않았다. 기고인은 여기서 비판론을 정면으로 다루는, 즉 사실해석의 문제를 따지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가 선택한 경로는 이 문제를 대충 보면 그럴싸해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기괴한 거의 동어반복적인 논증을 고르는 것이었다. 고발인과 피고인의 관계는 고발인의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라는 전제 하에, 이 사건이 고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따른 것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하므로 자기근원적 자유가 더 법적·윤리적으로 타당하며, 법적·윤리적으로 타당한 그 자유에 더 부합하므로 "안희정의 성폭행 혐의에 대한 재판부의 무죄 판결이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 논증을 달리 말하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안희정이 무죄라는 전제 하에, 안희정이 무죄라는 판결을 내릴 수 있으므로 자기근원적 자유 개념이 더 적합하며, 안희정이 무죄라는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자유 개념에 따라 설명될 수 있는 재판부의 무죄판결은 정당하다.

기고문은 놀랍게도 기괴하게 뒤틀린 동어반복 장치이다. 순수하게 논지 전개의 측면에서 볼 때, 두 자유 개념을 둘러싼 논의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필자는 처음부터 안희정이 무죄라는 전제에서 출발해 결론도 안희정이 무죄라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이 글의 제목은 "안희정 무죄 판결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결국 안희정은 무죄이기 때문에 안희정은 무죄라는 것이다. 이게 이 기고문의 본질이다. 나는 합리적인 판단력을 가진 독자들이 이것으로 이 기고문이 왜, 어떤 점에서 문제적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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