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디&아미티지, <역사학 선언>, 간단히 읽고 소개

Intellectual History 2018. 6. 29. 04:39

조 굴디, 데이비드 아미티지, <역사학 선언>, 안두환 역, 한울아카데미, 2018 을 사서 바로 읽었다(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51660254 / 안두환 선생의 번역은 말끔하게 잘 읽힌다). 원저 서지사항은 Jo Guldi&David Armitage, _The History Manifesto, CUP, 2014,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 최초의 오픈 억세스 저서이기도 한 원저의 pdf전문은 다음 링크에서 읽을 수 있다(https://www.cambridge.org/core/what-we-publish/open-access/the-history-manifesto).

 

내일 하루 종일 세미나 리딩을 해야하기 때문에 간단히 정리하자면, <역사학 선언>은 다른 무엇보다도 역사가들이 "새로운 비판적 사회과학"을 통해 대안적인 공적 미래에 기여하는 공적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시 새롭게 수행해야 하며 이를 위해 역사학의 성격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의 주장은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항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

 

1) 서론과 1장에서 강하게 이야기되듯, 역사학자는 (주로 기후과학자로 대변되는) 자연과학자, (주로 경제학자로 대변되는) 사회과학자, 전문경영인, 기술 엘리트 등에 의해 잠식된 공적 담론장을 되찾아야 한다. 이 과정은 일부 자연과학자·경제학자들이 주창하는 "근본주의와 교조주의"(213), 역사학적 훈련을 받지 않은 저자들에 의해 남용되는 "더러운 장기 지속"(dirty lonue duree, 64)의 역사서술 등에서 제시된 잘못된 이론·역사적 주장을 엄격하게 비판하고, 동시에 역사로부터 대안적 미래를 위한 원천을 탐색하여 제출하는 작업으로 제시된다. 요컨대 역사학자는 지금의 국가·사회가 나아가는 방향 혹은 그에 대한 학문적·담론적 주장들을 검토하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다.

 

상기한 목표를 위해 저자들은 2-3장에서 1970년대 이래 현재의 (서구) 역사학계가 따르고 있는 두 가지 경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단 이 두 가지 경향이 반드시 동일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종종 양자가 무비판적으로 묶이는 점은 주의해야 한다.


2) 첫째, 역사학적 연구의 시간적 길이를 수 년 단위로까지 축소시켜 거의 통시적 측면을 제거해버리는 사태에 가까워지는 "단기주의"(short-termism)적 흐름이 극복되어야 하며, 새로운 역사학적 연구는 그 시간적 길이를 수() 세기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이 특정한 시간대의 대상을 깊고 엄밀하게 파고들어 분석하는 전문화된 훈련--물론 저자들은 "민주적" "공적 지식인"을 옹호하는 (주로 미국식 진보적) 논자들이 그렇듯 "전문화"에 대한 경계심을 종종 드러낸다--자체에 대한 거부는 아니며, 저자들은 이러한 미시적인 전문연구와 거시적인 설명이 효과적으로 결합할 수 있다는 데 희망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3) 둘째, 역사학자의 관심사를 전통적이고 거시적인 의미에서 공적인 영역으로부터 배제시키는 미시사·문화사에의 경도를 극복해야 한다(공정하게 말하자면 저자들은 이러한 연구가 기존의 각종 "신화들"을 파괴하는 데 기여한 바가 있다고 인정한다). 저자들은 1960년대까지 전문적인 역사학자가 관료·정책담당자 등을 위해 중요한 지침을 제공했던 시기를 (다소 장밋빛으로) 상기시키면서 역사학자가 이러한 역할을 다시 수행하기 위해 기후변화를 포함한 오늘날의 생태적 이슈, (글로벌)거버넌스, 불평등 등의 전사회적 중요성을 지닌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어야 하며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제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다양한 맥락의 자료들을 비판적으로 다루어 종합적인 서사를 도출하는 능력이 필요하며, 저자들은 20세기 후반기에 사회과학자들에게 넘겨준 이 영역을 역사학자들이 다시 가져와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들이 "장기 지속" 개념과 관련 줄기차게 언급하는 페르낭 브로델을 조금 심술궂게 활용한다면, 독자들은 <역사학 선언>이 마치 브로델과 아날 초기세대들이 그러했듯 사회과학적 연구를 역사학에 종속시키려는 또 하나의 시도가 아닌지 질문해볼 수 있겠다(전후 프랑스 학계에서 사회과학을 역사학 아래로 포섭시키려 했던 브로델의 시도에 관해서는 프랑수아 도스의 <조각난 역사>를 참고하라).

 

그렇다면 이러한 방향전환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4) 특히 4장에서 저자들이 새로운 접근법의 핵심으로 제시하는 것은 "빅 데이터". 최근 미국 인문학 연구에서 빅데이터/디지털 휴머니티의 열풍을 조금이라도 느껴본 사람이라면 딱히 놀랄 일이 아니겠지만, 저자들은 역사학 연구자들이 기존의 미시적 자료를 다루는 엄격한 훈련에 더하여 (각종 국가안보관련 문서를 포함한) 여러 영역의 방대한 자료를 거시적으로 다룰 수 있는 훈련을 받는다면 다양한 맥락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는 작업을 다른 어떤 학문분과의 연구자들보다도 잘 수행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라:


"역사학자는 데이터의 출처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설령 그 데이터가 다른 역사학자에 의해 제시된 것이라고 해도 정말로 좋은 데이터인지를 의심한다. 전통적인 역사학에서 다양한 인과관계는 역사학과의 구조 자체에 내재되어 있으며, 이에 역사학을 공부하는 이는 역사의 수많은 가능성과 그 원인에 대한 경험을 지성사, 미술사, 또는 과학사 [...] 수업을 들으면서 쌓는다. 오늘날 대다수 역사학자는 이와 같은 여러 도구를 한데 녹인다. [...] 즉 그는 불평등과 정책 그리고 생태계에 대한 데이터를 같은 면에서 다룰 수 있고, 큰 노이즈를 복잡한 인관 관계로 얽힌 하나의 이야기로 압축시킬 수 있다. [/] 빅 데이터의 세상, 세계는 양립할 수 없는 별개의 양적 데이터 세트와 질적 데이터 세트를 비교하도록 훈련받은 분석가를 필요로 한다. [...] 역사학자는 종합적인 수준에서 사회 변화를 탐색할 새로운 방법론의 고안을 진두 지휘해야 할 것이다"(212-13).

 

내 생각에는 이 책을 읽는 과정에서 "선언"(manifesto)으로서 집필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많은 주장, 진술들은 흥미롭지만 아주 철저하게 다듬어졌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종종 무시할 수 없는 논쟁의 여지를 포함한다. 다른 누구보다도 역사가적 감각을 지닌 독자 본인들이 잘 지적할 수 있듯, 1960년대 이전 영미권에서 역사학자가 통치 엘리트로서 수행해온 역할이 오늘날 쉽게 수복될 수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으며, 역사학자들이 각자의 전문화된 분과에서 자료의 축적과 검토에 쌓아온 전문화의 수준만큼이나 다른 학문분과의 전문화 수준 또한 고도화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무시하기는 어렵다. 더불어 아마 저자들이 일차적으로 누구를 독자로 상정했을지를 떠올려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 책에서 강조하는 대안적 태도/목표는 미국 대학의 리버럴-프로그레시브적 연구자들의 언어를 적지 않은 비중으로 공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언어의 힘이 다소간 퇴색되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겐 거리감이 느껴질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역자가 지적하듯 빅 데이터 연구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지는 저자들의 낙관주의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아직 지켜볼 필요가 있음은 분명하다. 지성사·정치사상사의 독자들에겐 아미티지가 공저자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지성사적인 관심사가 그다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대신 한국어판 서문에서 아미티지는 "내전" 개념의 2000년간의 역사를 다루는 자신의 최근작 <내전: 사상 속의 역사>(Civil Wars: A History of Ideas, 2017)가 본저에서 주창된 이론의 실천적 사례라고 언급하니만큼 관심있는 독자들은 해당 텍스트를 참고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특히 동료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에게 한번쯤 주의깊게 읽어볼만하다고 추천하고 싶다. 추천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역사적 접근법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이 책의 여러 논쟁적인 주장들은 설령 많은 부분 동의하지 않더라도 한번쯤 주의깊게 검토하고 반론을 제기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한국의 여러 학문분과에서 소위 "역사적 접근"을 다룰 때, 심지어는 다수의 역사학과에서조차도 방법론적인 고민을 충분히 자극하지 않는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감안할 때, 굴디와 아미티지의 저작을 비판적으로 곱씹어보는 것은 좋은 지적 훈련의 기회를 제공한다.

 

둘째, 이 무척이나 박식한 저작은 최근 영미권 역사학계의 주요한 흐름과 의제, 뛰어난 사례들을 적지 않게 제공하며, 일부 연구자들은 이중에서 자신의 관심사와 관련이 있는 연구들을 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미권 연구를 파헤쳐야만 하는 일부 분야를 제외하면--심지어 종종 그런 분야에서조차도--영미권 학술장이 현재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 종합적인 전망을 갖기 어렵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비록 특정한 방향으로의 편향이 있다고 해도 2014년에 출간된 <역사학 선언>은 유용한 면이 있다.

 

셋째, 인문학의 사회적 소명이 사실상 상실된 한국의 학계에서 설령 곧바로 적용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역사학 선언>이 주창하는 공적 지식으로서 역사학의 책무와 가능성은 분명 주의 깊게 참고할 만한 모델이다. 민중주의 및 그에서 파생된 여러 진보적 담론의 쇠퇴 이래 한국의 인문학은 스스로를 다양한 형태의 취미교양·자기계발·힐링담론에 끼워넣거나 과거 민중주의의 도식을 반복하려는 시도 정도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공적인 존재의의를 설득력 있게 입증하는 담론을 창출해내지 못했다. 그 두 가지 방향의 시도 또한 무엇보다 '전문적인 학문으로서의 인문학'을 역할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다지 성공적이었다고 하기는 힘들다. 거시적·전사회적·국가적·공적 의제를 인문학이 정면으로 다루어야 하며 이에 관련된 지식들을 생산·검토·공급하는 실천적-공적-전문가집단으로서의 인문학/역사학 연구자라는 상은 자신의 존재의의에 별다른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에게 분명 매력적인 선택지로 비춰질 수 있다. 그것이 영미권에 비견될만한 인문사회 학술엘리트 교육체제 및 이들이 참여하는 거버넌스 모델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한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는 쉽게 답변할 만한 질문이 아니지만 말이다.

 

상기한 이유에 따라서, 이 책이 좁은 의미의 역사연구자들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활발하게 읽히고 또 논쟁을 촉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 연구자들은 이제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스스로의 목표와 역할에 대한 논쟁을 진지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될 때를 맞이했고, <역사학 선언>은 나쁘지 않은 부싯돌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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