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텍스트, 총체성 [130316]

Critique 2014. 3. 18. 14:11

*2013년 3월 16일


1.

반추해보면 과거의 어떤 시점에서부터 내게 전공은 세계를 포착하고 또 사유하는 과정/수단으로서 가치를 지녀왔다. 역으로 말하자면 세계 자체에 대한 연구 혹은 비판적 개입을 위해서 영문학의 기준과 범위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면 그 틀들 안쪽에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진술이 반드시 텍스트의 무가치함 혹은 그것을 단순히 양적으로만 계산될 수 있는 평평한 무언가로 간주한다는 뜻은 아니다. 텍스트를 세계 해석의 차원에서 바라보려는 시선은 전자를 후자만큼이나 크게 늘려서 보는 노력을 요구한다. 이는 후자를 전자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함께 요청한다. 세계를 바라보려는 시선이 없이는 텍스트의 표면을 뚫고 지나갈 수 없다(이러한 비유는 자연 플라톤을 연상케하는데, 나는 '세계' 또한 특정한 종류의 이념idea에 속한다고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연구자/비판자로서의 문학연구자는 양 측의 원리를 동시에 견지해야만 한다. 텍스트들이 없다면 그것들의 총체로 이루어진 세계는 구축될 수 없다. 그러나 세계가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진다면 텍스트는 그 어떤 총체적인, 나아가 (총체성을 통해서만 분과학문이 획득할 수 있는)실천적인 성격도 갖지 못하는 굳어버린 파편이 되어버린다. 텍스트의 바깥은 있다. 정확히 그 바깥의 존재를 거쳐서만이 텍스트는 그 동적인 성격을 혹은 가상으로서의 위력을 획득한다.

2.

세계가 그 자체로는 접근불가능한 총체성--그것이 어떤 종류의 총체성이든간에, 심지어 총체성이라는 표현에 극도의 적개감을 표현했던 아도르노의 체계 내 존재하는 총체성을 포함해서--이라면, 세계 연구자로서의 문학연구자는 자신이 마주한 대상과 총체성을 연결짓고자 한다. 이러한 진술은 쌍방향적인 시도를 낳는다. 한편으로 텍스트로부터 총체성을 구축한다면, 다른 한편으로 총체성=세계로부터 텍스트를 구축하는 방향이 있다. 후자가 결여된 전자가 특수자가 보편자를 참칭한 결과로서 이데올로기적/자기폐쇄적인 '거짓된 총체성'을 만들어낸다면, 전자가 결여된 후자는 총체성의 선규정이라는 문제와 부닥칠 뿐만 아니라 그 문제를 지나쳐버린다고 해도 이미 상정된 세계의 틀 안에서 텍스트를 단순히 반복적인 메아리로 만들어버린다. 그렇다면 단순히 총체성과 텍스트의 상호매개적인 구조를, 쌍방향의 무한한 연쇄를 바람직한 인식틀로 판정짓는 정도로 충분한 것인가? 실제로는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인식된 혹은 가설로 설정된 총체성과 텍스트 양자 모두에 해당되지 않는 영역이 있다. 그것은 텍스트로 구축된 세계=총체성을 깨트릴 뿐만 아니라 그것들로 하여금 다시금 더 보편적인 성격을 띠도록 강요한다. 세계연구자로서의 문학연구자에게 최초로 주어지는 과제들 중 하나는 바로 그 바깥이 자신에게 무엇인지,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3.

칸트의 물자체라는 개념이 비유로서 갖는 효용은 정말로 탁월하지만(바로 이 개념 때문에 가라타니는 칸트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판단력비판>이 아닌 <순수이성비판>을 꼽았다), 내 얘기를 같은 층위의 형이상학적 진술로 받아들여주지는 않았으면 한다. 나는 철저히 형이하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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