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 <공포와 전율>의 두 가지 모티프, "윤리적인 것"과 "믿음"에 대한 간단한 설명

Intellectual History 2018. 4. 28. 13:36
*이번 학기 조교를 맡고 있는 (딱히 직접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일은 없는) 학부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쇠렌 키에르케고르의 <공포와 전율>(임춘갑 역, 치우, 2011)을 참고문헌으로 읽혔다. 개인적으로는 이 기회에 처음으로 키에르케고르를 접하면서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특히 17-18세기 지성사를 거칠게나마 알고 있으면 한국어로 봐도 정말 재밌는 대목들이 많다--이런 맥락을 배웠을 리 없는 (그것도 교양수업이다보니 여기 저기 전공이 섞인) 학부생들이 과연 어디까지나 이해를 할까 싶었다. 아래 내용은 학부생들을 위해 개인적으로 몇 가지 자료들을 참고하여 <공포와 전율>의 주요 모티프 일부를 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려 시도한 내용으로, 원래는 해당 수업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업로드되었다. 물론 이 내용은 영미권 키에르케고르 연구에서 너무 명백한 상식에 속하며 또 학부 저학년 학생들의 이해를 위해 매우 도식적인 서술을 택했다는 점을 덧붙여 둔다.





오늘 쪽지시험에서 아브라함과 아가멤논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여러분들이 제출한 답변을 훑어보니 역시 키에르케고르의 텍스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더군요. 상당히 재미있는 텍스트임에도 불구하고, 또 저자의 정념이 향하는 지점은 비교적 일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포와 전율>이 쉽게 와닿지 않는다면, 그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 1843년, 즉 지금으로부터 175년 전의 덴마크, 그중에서도 독일어권 철학·신학의 언어가 크게 영향을 미친 덴마크 문인사회에서 빚어졌다는 데 있겠습니다. 불과 30년 전의 문헌을 보더라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게 놀라운 일이 아니라면, 이만큼이나 다른 시공간의 사람들을, 그들의 언어를 곧바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지요. 그래서 이 게시물에서는 <공포와 전율>을 읽고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될만한 배경지식 두 가지만 짚겠습니다. 하나는 <공포와 전율>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인 "윤리적인"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다른 하나는 역시나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믿음"이란 말을 주의깊게 읽기 위한 맥락입니다. 물론 저는 키에르케고르 및 19세기 독일철학,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대신 제가 공부하고 있는 (영국을 중심으로 한) 18세기 지성사에서 일반적인 맥락의 수준에서 아주 간단한 배경지식을 드리는 걸로 만족하고자 합니다.

첫째. <공포와 전율>에서 "윤리적"이란 단어는 무엇을 뜻할까요?

특히 논쟁적인 저술을 이해하고자 할 때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저자가 누구를 자신의 적수로 설정하고 있는지를 먼저 보는 것입니다. 수업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본문 뒤에 실린 역자 후기 앞부분에서 역자는 키에르케고르의 주 공격대상이 "헤겔 철학"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한국어판 260-61쪽). 실제로 한번쯤 헤겔의 향기를 맡아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키에르케고르의 텍스트 곳곳에서 상당히 전형적인--그러니까 보통 "헤겔적인 것"이라 이야기되는--표현을 찾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제가 헤겔을 먼저 언급한 까닭은 키에르케고르가 계속해서 딴지를 거는 "윤리적인"이란 말이 실제로 헤겔 정치·역사·도덕철학의 핵심어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가 사용하는 "윤리적"이란 말은 독일어로 sittlich(영어로는 "ethical")에 상응하는 것으로, 한국의 헤겔번역에서는 보통 "인륜[人倫]적"이라고 번역합니다. 이것과 연관되는 표현이 Sittlichkeit(영어로는 "ethical order" 또는 "ethical life"), 한국 번역으로는 보통 "인륜성"이라고 옮기죠. 사실 제가 번역한다면 그런 점에서 헤겔식 용어 번역을 따르거나 아니면 적어도 주석이라도 달아놓는 걸 고려했을텐데요, 어쨌든 한국어판은 "윤리적인"으로 옮겨놨기 때문에 키에르케고르가 헤겔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으면 매우 모호하게만 이해하기 쉽습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이 단어가 영어, 독일어, 한국어 등등으로 어떻게 옮겨지냐가 아니라 이 말에 실제로 어떤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지 이해하는 일입니다. "윤리적"이나 "인륜적"이나 추상적이긴 매한가지니까요. 그럼 헤겔은 이 단어를 어떤 의미로 쓰는 걸까요? <공포와 전율>에서 키에르케고르가 곧질러 말하듯, 헤겔은 이 말을 사용할 때 그리스 정치/도덕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론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철학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분이라도 아마 중고등학교 교과서나 하다못해 언젠가 화장실에 붙어있는 명언 스티커에서라도 한번쯤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문구는 보신 적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조금 더 책을 읽거나 수업을 들어보신 분이라면 여기서 "정치적인"이 그리스어에서 도시·국가·공동체 등을 가리키는 폴리스(polis)에서 온 말임을, 그러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인간은 본성적으로 '폴리스[=도시, 국가,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기에 적합한 동물(politikon zōon)'"(<정치학> 1권 2장, 도서출판 길 판 33쪽)이란 이야기임도 아실 것입니다. 물론 저는 그리스 고전기를 공부한 사람도 아닐 뿐더러 여기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제로 의도한 바가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요점은 저런 식의 '아리스토텔레스적 인간관', 즉 인간이 본성적으로 (정치적) 공동체·국가·사회를 만들고 그에 속해 살아가는 존재라는 전제가 17-18세기까지의 유럽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헤겔도 거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물론 17-18세기는 서유럽의 지성사에서 이 인간관을 둘러싸고 엄청난 격돌이 있었던 시기입니다만, 지금은 그냥 지나가죠). 헤겔은 실제로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그리스 철학을 굉장히 주의깊게 탐구하고 자신의 논리로 흡수한 사람이었고, 우리가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인륜적"("윤리적")이란 말도 아리스토텔레스적 인간관으로부터 따로 떼어놓기 힘듭니다. 즉 헤겔이, 또 헤겔철학을 비판하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하는 "인륜적"("윤리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사람이 따라야 할 옳은 것'과 같은 국어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국가·사회·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 따라야 하는 규범을 가리킵니다. 이제 다시 <공포와 전율>을 읽으면 조금 감이 잡히실 거라 생각합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윤리적인" 삶, 그리스적인 것, 아가멤논식의 '비극적 영웅'(이것 또한 무척 고대적인 것, 적어도 18-19세기에 '고대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던 것이죠)을 비판할 때, 저자는 막연한 추상개념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같은 사람들로 구성된) 국가·사회·공동체가 정해놓은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가장 올바른 것으로 여기고 따르는 삶이 정말로 옳은 삶,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삶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무척이나 모호해보이는 말들, 가령 "개별자"와 "보편적인 것"과 "높은 곳"(<공포와 전율>한국어판 110쪽)·"절대자"(같은 책 112쪽) 같은 말을 이야기할 때, 키에르케고르가 실제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도식적으로 풀어보면 우리 개개의 인간들("개별자")은 "보편자"(윤리/인륜적인 것, 인간사회)에만 머물지 말고 그보다 더 위에 있는 "높은 곳" 혹은 "절대적인 것", 다시 말해 (기독교의) 신(God)을 지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되겠습니다. 이 요지만 이해하고 있으면 <공포와 전율>의 핵심논리를 따라가는 데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둘째, "믿음"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앞서 첫번째 항목에서 (쪽지시험에 비추어보면 아가멤논에 해당하는) "윤리적인 것"의 개념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았습니다. 이렇게 키에르케고르가 "윤리적인 것"을 비판했다는 게 분명해졌다면, 키에르케고르가 칭송하는 아브라함의 삶이란 건 어떤 것이며 아브라함과 같은 삶의 핵심으로 꼽는 "믿음"이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아주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키에르케고르의 논리는 15-16세기에 살았던 신학자 마르틴 루터, 흔히 종교개혁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루터의 교리에 많은 걸 빚지고 있습니다(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과 독일은 종교개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19세기 덴마크에서 루터파는 국교의 위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문제도 루터의 신학을 모르면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물론 루터 자신의 신학적 교리와 루터파 교회의 교리를 제대로 설명하는 건 지금 제게는 도저히 무리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루터의 교리라고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만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흔히 종교개혁은 (부패한) 카톨릭에 대항해 개신교(Protestant)가 등장하는 과정이며, 이때 로마 교회의 의례·전통 및 성직자 계급의 안내와 지도를 따를 때에만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는가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됩니다. 틀린 설명은 아닙니다만, 여기서는 구원의 문제가 중요합니다. 종교개혁시기부터 18세기까지 끊임없이 발생하는 갖가지 신학적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바로 사람이 도대체 어떻게 신에게 구원받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루터 혹은 종교개혁-전쟁기의 신앙과 영성(spirituality)을 이해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이 사람들이 카톨릭 혹은 프로테스탄트였을 거라는 데서 시작하는 대신 이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아주 진지하게 던진 사람들이었다는 데서 출발하는 게 좋습니다. 루터가 내놓은 대답은 고전적으로는 다음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기존에 정해진 종교적 전통이 아닌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인간의 업적이나 노력이 아닌 "오직 믿음"(sola fide), 인간의 뛰어남이 아닌 "오직 (신이 부여한) 은총"(sola gratia).

여기서 성경문제를 일단 제쳐두고 본다면(물론 키에르케고르에 대한 연구는 키에르케고르가 성경 해석의 문제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만), "믿음"과 "은총"의 문제가 있죠. 우리는 단지 신을 믿어야 할 뿐이고, 우리의 구원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을 통해 획득하는 것이 아닌 신의 은총에 따라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리에 따르면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우리가 살아서 알 수 없기 때문에--19세기 유럽에서, 그리고 오늘날 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지금의 삶 이후 구원의 문제는 단순한 상상의 문제가 아닌 정말로 '실존적' 문제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믿는 사람들도 불안을 떨치기 정말 힘듭니다. 따라서 원래의 교리가 오랜 기간 동안 변하지 않고 지속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보통은 얼마있지 않아 도덕적인 삶, 성공한 삶, 성직자와 교회를 잘 따르는 삶 등을 살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식으로 교리가 은근슬쩍 바뀌게 됩니다. 수업 시간에 언급되었던 막스 베버Max Weber의 주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도 이 교리 때문에 난처해진 상인들이 어떻게 교리를 슬쩍 바꿨는지를 살펴보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과정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렇게 좋은 게 좋은 거 식으로 가는 경향을 모두가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돈 많이 벌고 존경받으면 천국간다는 이야기가 도대체 어떻게 기독교 신앙일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나타나고(보통은 그래서 당시에 급진주의자, 극단주의자, 개혁자, 약간 운이 없으면 광신도, 열광주의자 취급을 받지요), 이 사람들은 다시 처음의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구원(못)받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바로 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결국 지금의 세계가 (신을 떼놓고 생각하기 힘든) '절대정신'이 현현한 결과라는 식의 헤겔 철학이나 '부르주아적 도덕' 정도로 밍숭맹숭해진 주류 개신교회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는 거지요. 이런 맥락에서 그는 다시 루터 신학의 핵심 개념이었던 "믿음"을 꺼내들고 아브라함을 사례로 들어 믿음을 지향하는 삶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그런 사람이 견뎌내야 하는 '부조리'가 어떤 것인지를 묻고 사고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실제로 키에르케고르의 텍스트를 직접 파고 들면서 꼼꼼히 읽는다면 위와 같은 내용으로 정리되지 않는 대목도 많으며, 최근의 연구들은 키에르케고르와 헤겔철학, 키에르케고르와 루터/루터파 교회의 관계 등이 전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위와 같은 내용을 염두에 두고 다시 읽으면 좀 더 논지가 분명히 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좀 더 공부해보고 싶은 학생이 있다면 스탠퍼드 철학백과사전의 쇠렌 키에르케고르 항목(https://plato.stanford.edu/entries/kierkegaard/)을 보실 수 있겠습니다. 이 글에서 설명한 <공포와 전율>의 쟁점에 관해서는 특히 4, 5번 항목을 볼 수 있고, 좀 더 공부하고 싶으신 분은 Bibliography에 수록된 연구서들을 참고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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