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년생 정대현", 안티페미니즘의 여성의존

Comment 2018.03.24 14:11
[*이 글은 3월 22일 새벽 페이스북에 최초로 포스팅되었다. 보관 차원에서 옮겨둔다]

"서울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지에 올라온 "79년생 정대현 (82년생 김지영의 남편)"과 댓글을 흥미있게 읽었다(https://www.facebook.com/SNUBamboo/posts/1727482740676684).

본문에 온정적인 반응을 보인 (주로 남성) 독자들의 독해와 달리, 이 글은 실제로는 '남자다움'이란 이름으로 가해진 차별과 폭력을 진지하게 다루지는 않는다. 예컨대 남성집단 사이의 폭력성이나 위계문제, '남자다움'을 사회적·신체적 자아에 각인시키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폭력·상흔, 그렇게 형성된 남성적 인격이 다시금 자신보다 약하고 낮은 위치에 놓인 이들을 향한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초래되는 결과와 같이 '한국 남성'이란 범주에 결부되는 진정한 문제들은 이 글에서 전혀 다루어지지 않는다. 냉정히 말해 이 글은 한국 남성이 겪는 차별·고통을 본격적으로 조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볼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에 존중받을 가치가 없다. 차라리 20세기 초중반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이나 몇 해 전 개봉한 영화 <한공주>의 짧지만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강렬한 몇몇 장면을 보는 쪽이 어떻게 근대의 '남자다움'이 남성들에게조차 고통과 폭력의 경험을 강요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단지 오늘날의 페미니즘을 조롱하고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짜로 한국 남성이기 때문에 겪는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말해주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는 필자가 "남자이기 때문에 겪는 차별과 피해"를 보여준다고 드는 예시들이 실제로는 철저히 '여성=부당한 가해자'와 '남성=억울한 피해자'의 서사를 만드는 데 복무하고 있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좀 더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이 글의 모든 사례들은 남성 간 경쟁·위계에서 발생하는 폭력은 전혀 다루지 않으며, 그 대신 남성 대 여성이라는 경쟁구도를 설정하고 어떻게 여성이 남성의 '정당한' 권익을 부당하게 침해하고 또 거기에 기생하는지를 그리는 데만 집중한다(이중에는 군복무-군가산점 같은 오래된 클리셰 못지않게 강간무고, 임산부 배려석과 같은 최근의 클리셰들이 덧붙여져 있다). 필자와 동조자들의 상상 속에서 여성은 남성의 (비열한) 적이고, 남성은 자신을 옥죄는 갖가지 규범과 '차별'의 거미줄에 걸린, 혹은 좀 더 직설적으로 여성들이 만든 세계의 피해자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비록 말미에 필자가 약간의 거리두기를 시도하긴 하지만, 단어 그대로의 의미에서 '여성혐오' 텍스트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다.

나는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첫째, 글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알 수 있듯 필자는 자신의 이야기를 최근의 여성주의 운동의 '미러링'으로 만들고자 했다. 이는 필자의 상상력 속에서 최근의 여성주의·성평등운동은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만을 응집시키고, 그에 반해 [남성]은 [여성]의 희생으로 편익만 누리는 존재"라는 식의 내러티브를 유포하는 사회불화조장운동으로밖에 이해되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때로 그런 지나치게 단순화된 구도를 믿고 발화하는 페미니스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곳곳에 만연해있던 성폭력을 들추어내는 최근의 작업을 포함해 지난 수십, 수백 년에 걸쳐 활동해온 여성주의자들의 다양한 노력에서 오직 그러한 내러티브만 읽어내는 건 명백히 악의적이다. 솔직히 나는 필자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던 여성주의 운동을 이런 식으로 과도하게 단순화하는 사고는 여성주의 혐오, 즉 안티페미니즘적인 면모를 매우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둘째, 조금 더 흥미로운 점은 필자 그리고 필자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한국의 수많은 (잠재적) 안티페미니스트들의 사고가 놀라울 정도로 '여성'이라는 항목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79년생 정대현"의 일생은 한결같이 여성들만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혼당한 뒤에는 물론 심지어 죽은 뒤에도 "79년생 정대현" 씨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초점이 '여성들이 어떻게 남성을 대하는가'에 맞춰진 점은 경이롭다. 통상적으로 '피해자 여성'을 강조하는 통속적인 여성주의적 서사가 (때로는 과도할 정도로) 여성 자신의 삶과 경험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이 '남자의 일생'은 역설적으로 그 자신이 가장 비난하는 대상인 한국 여성들에, 여성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원하는지에 종속되어 있다. 여성, 그리고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빼버리면 도대체 "정대현"의 삶에서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약간 악의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79년생 정대현"의 의식구조를 이렇게 도식적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주의는 싫고, 여성은 필요하다. 물론 그의 의식은 자신이 원하는 여성과 공존하기 위해서라도 여성주의를 적어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협소하다. 그러나 그것이 서구 근대를 향해 줄기차게 달음질해온 2010년대 한국사회의 조건이라는 점에서 "79년생 정대현"의 운명은 아Q만큼이나 비극적이다. 페미니즘이 싫은가? 현재의 유일한 대안은, 유감스럽게도, 전근대로 돌아가는 것 뿐이다.

*이 글은 <직썰>에 편집게재되었다.
http://www.ziksir.com/ziksir/view/6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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