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더릭 바이저, <이성의 운명: 칸트에서 피히테까지의 독일 철학> 리뷰.

Intellectual History 2018. 2. 4. 22:51
프레더릭 바이저, <이성의 운명: 칸트에서 피히테까지의 독일 철학>, 이신철 역, 도서출판b, 2018 을 읽었다[원저는 Frederick C. Beiser, _The Fate of Reason: German Philosophy from Kant to Fichte_, Cambridge(MA): Harvard UP, 1987. 한국어판 알라딘 링크는 http://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132127992].

18-19세기 영어권 독일철학사 연구를 통째로 정리하다시피하고 있는 프레더릭 바이저의 첫 단독저작 <이성의 운명>이 번역되었다. 앞서 출간된 <낭만주의의 명령>(그린비)이 초기낭만주의 관련 논문집, <헤겔>은 연구동향을 소개하는 입문서, <헤겔 이후>(이상 도서출판b)가 19세기 후반부 독일철학사의 주요 주제를 간략히 정리한 책임을 감안할 때, 이번에 네 번째로 한국어로 번역된 <이성의 운명>은 실제로 철학적 논쟁을 소개함에 있어 논증의 밀도가 가장 높은 본격적인 철학사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역자 후기에 드러나는 역자·도서출판b의 바이저에 대한 애정은 무척 감사한 일이며, 1992년작 <계몽, 혁명, 낭만주의: 독일근대정치사상의 탄생, 1790-1800>_Enlightenment, Revolution & Romanticism: The Genesis of Modern German Political Thought, 1790-1800_이 한창 번역 준비중이라는 사실은 나와 같이 바이저의 저작이 더 많이 소개되어야 한다고 믿는 독자들에겐 무척 환영할 일이다.

먼저 한국어판의 만듦새를 보자. 철학적 논증과 독일어·라틴어 표현이 수시로 오가는 학술서임을 고려할 때 3만원이라는 가격에 불만은 없으나, 원저 400쪽 정도의 책이 육중한 700쪽 하드커버판으로 옮겨진 건 특히 도서출판b의 큰 글자와 더 큰 여백을 고려할 때 다소 아쉽다. 그러나 가장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것은 두세 쪽에 한 문장 꼴로 눈에 띄는 거친 영어직역투다(대략의 줄거리를 따라가는 데는 문제가 없으나 학적 인용을 하려면 반드시 원저와 대조해보기를 권한다). <트랜스크리틱>을 포함해 역자가 번역한 일본저자들의 책을 읽을 때는 역자의 한국어 번역에 어떠한 불만도 없었음에 비해, <헤겔 이후>에서도 드러나듯 영어텍스트 번역에서 역자의 한국어는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다. 유감스럽지만 도서출판b의 편집은 이 부분을 커버하지 못했으며 드물지만 이곳저곳에서 발견되는 비문은 (만약 추가 인쇄를 한다면) 2쇄를 찍기 전 전체적인 교정을 한번 더 거쳤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남긴다. 특히 역자가 깊은 애정과 존경을 드러내는--나는 그 감정을 충분히 공유한다--저자의 책이니만큼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은 무척 매력적이다. 특히 후반부에 철학적 논증의 빽빽함에도 불구하고--적어도 독자가 칸트를 직접 읽었거나 칸트를 둘러싼 통상적인 쟁점들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읽기가 비교적 수월하다--속도감있게, 그리고 뒷 이야기가 궁금해지게 쓰였기에 어지간한 소설 이상으로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다. 옥스퍼드에서 훈련받은 맥락주의자 바이저는 칸트와 그 이후 "독일 관념론"의 저작들로 이어지는 여정이 결코 몇 가지 돌출된 봉우리들만의 것이 아니며 수많은 논자들의 대결이 축적되어 형성된 숲과 산맥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독자가 직접 만져보도록 인도한다. 그는 18세기의 철학논쟁에 신학적, 과학적 쟁점등이 중요하다는 걸 명확하게 강조하며, 스피노자주의나 범신론, 생기론적 유물론 뿐만아니라 루터주의를 둘러싼 정통파 대 비정통파 대립 같은 주제도 중요한 맥락이었음을 보여준다. 신앙과 이성적 탐구 양자의 조화가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었던 계몽기 지성사의 중심구호 "이성의 권위"는 이제 이성을 끝까지 밀고갈 때 마주치는 회의주의 대 신앙, 도덕, 상식을 무비판적으로 옹호해야 한다는 교조주의의 양 극단 사이가 수복불가능하게 쪼개짐에 따라 도전받는다(18세기 전반부 유럽 신학·도덕철학·사회이론의 핵심주제가 인간본성과 도덕의 토대foundations of morality에 놓여있었음을 기억한다면 바이저의 주제가 그 연장선에 놓여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바이저는 1781년 <순수이성비판>으로 날개를 펼친 칸트의 비판철학이 두 극단의 틈새에 이성이 추락하는 것을 막고 가운뎃길 혹은 일종의 타협책을 제시하려는 하나의 유력한 시도였다고 설명한다. 물론 그 시도는 다른 전통적 입장들의 도전 뿐만아니라 마찬가지로 새로운 가운뎃길을 찾아내려 했던 다른 시도들로부터의 비판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으며, 마침내 1794년 피히테의 저작이 나올 때엔 더 이상 비판철학의 헤게모니는 지탱될 수 없었고 젊은 철학자들은 다시금 새로운 길을 탐색하게 된다. 저자는 이 14년 동안이 수많은 논쟁으로 가득한 매우 매력적인 시기였으며, 칸트가 하만(1장), 야코비(2,4장), 헤르더(5장) 등의 새로운 도전자들만 아니라 전통적인 로크주의자(6장), 라이프니츠-볼프주의자(7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력한 회의주의자들(8-10장)의 비판에 응전하면서 자신의 저술들을 가다듬었고 이 과정에서 이후 독일철학사의 여정에 영향을 끼치는 흥미로운 입장들이 적지 않게 출연했음을 강조한다. 나의 경우 낭만주의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하만, 헤르더, 스피노자주의 등이 눈에 더 들어오지만, 아마도 철학 전공자들에겐 책 후반의 비판철학에 대한 회의주의자들의 비판들이 특히 흥미를 끌지 않을까 싶다.

덧붙여 지성사 연구에 관심을 가진 연구자로서 이 책에서 강조하고픈 장점이 있다면 이는 무엇보다도 바이저의 모범적인 서사구축 스타일이다. 저자는 논자들과 텍스트들이 속해 있던 맥락에 어떤 위기상황·딜레마가 있었는지를 재구성하고, 그러한 맥락 속에서in context 각 행위자들이 어떠한 문제의식을 형성했으며 문제를 자신들의 저작을 통해 어떻게 돌파 혹은 보수하고자 했는지 설명한다. 여기서 바이저의 서술과정을 재구성하자면, 그는 일차적으로 맥락과 '맥락 속의 논자'를 제시하는 데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논자의 저술=언어적 실천을 하나의 '행위'action로 설정하면서 해당 언어적 실천의 언어·논리가 어떤 의미meaning를 갖는지까지 조명하며 우리는 편의상 이를 거시에서 미시로 향하는 방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어 저자는 이러한 언어적 실천이 완전한 문제의 해결로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다시금 (아마도 처음에는 예측하지 못했을) 논쟁과 난점을 낳고 결국엔 위기상황=맥락을 재형성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 즉 미시에서 거시로의 방향을 이어 기술하면서 맥락-행위(의 의미)-맥락으로 되돌아오는 서사적 운동패턴을 완성한다. 여기서 맥락, 행위(자)는 논쟁이란 형식을 통해 상호연결되며, 이러한 논쟁들의 연속으로 철학·사상의 역사가 재구성된다.

지성사의 방법론과 서술전략에 깊은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라면 논쟁을 통해 맥락-행위(자)-의미의 연결 및 사상사의 운동을 기술한다는 점에서 서로 다른 지적 전통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키너, 비버, 바이저가 유사한 서술전략을 공유한다는 점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전략은 비교적 적은 자료들을 갖고도 연구물 생산을 시작할 수 있으며 연구물 간의 연결이나 보완관계를 구성하기 수월하다는, 특히 처음 지식생산을 시작하는 필자들에게는 무척 매력적인 장점을 보유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지성사 연구물 상당수는 아직도 맥락과 언어적 실천의 연결·매개라는 문제의식에 둔감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언어적 실천이 하나의 행위로서 갖는 의미를 해명하는 작업 자체를 시도하지 않은 채 단지 '지적인' 대상을 다룬다는 것만으로 스스로의 연구를 지성사라고 명명하는 데 어떠한 문제점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연구의 방법론과 서술전략에 대한 메타적 비판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 역사는, 특히 지성사는 단순히 사료더미를 그저 보기 편하게 나눠놓는 비전문화된 글쓰기에서 나아갈 수 없다. 이 책을 포함한 바이저의 여러 저작들이 서구 철학 연구자들 뿐만 아니라 지성과 정신을 다루고자 하는 내 또래 연구자들에게 더 많이 읽힐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대목에서도 드러나듯 19세기 이전 철학사를 설명하는 바이저의 핵심적인 키워드는 "이성" 개념이며, 실제로 종교개혁시기 루터·칼뱅의 신학론에서 18세기 초중반 자연법과 감성주의(Sentimentalism)에 이르기까지 영국지성사를 검토하는 <이성의 주권: 초기 영국 계몽에서 합리성의 옹호>(The Sovereignty of Reason: The Defense of Rationality in the Early English Enlightenment, 1996)는 18세기 후반 이성을 둘러싼 독일철학계 논쟁의 전사(pre-history)까지도 시야에 넣고자 하는 저자의 열망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타 참고:
**<이성의 운명>부터 <독일 역사주의 전통>(_The German Historicist Tradition_, 2011)까지 자신의 주요 저작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는 바이저의 인터뷰 기사
http://www.3ammagazine.com/3am/diotimas-child/

***바이저의 2012년 CV
http://asfaculty.syr.edu/pages/phi/_CVs/beiser-fredCV201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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