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자오광, <중국사상사>의 도론을 읽고: 방법, 연구자, 학문의 존재이유

Intellectual History 2018. 1. 29. 01:52
지인이 갈조광(거자오광)의 <중국사상사: 7세기 이전 중국의 지식과 사상 그리고 신앙세계>( 오만종, 심규호, 이등연, 양충렬 역, 일조각, 2013)의 사상사적 방법론에 대해 코멘트를 해줄 수 있겠냐고 물어왔다. 시험공부 리딩을 하다가 잠시 머리도 식힐 겸 총 8절 170여쪽 분량의 "도론: 사상사의 서술방법" 부분만을 훑어보았다. 다음은 지인에게 보낸 코멘트를 약간 수정하여 옮긴 것이다.

나는 사상사 방법론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읽으면서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들었다.

첫째, 나는 저자의 방법을 지성사·사상사 연구를 하고자 하는 오늘날의 동학들에게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아날학파의 문제의식, 특히 '장기지속적 연속성'과 '일상생활의 탐구'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받아들이고 여기에 푸코 및 포스트모던역사학의 입장을 선별적으로 수용하고자 한다(단 저자 본인이 참고하는 대상들에 대한 저자의 이해가 얼마나 철저한지는 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다). 엘리트·상류층의 사상에 국한되지 않은 종합적인 연구를 수행하려는 저자의 열망은 '개인', 혹은 내가 좀 더 선호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행위자'(agent)의 개념에 대한 부인으로까지 나아간다. 그러나 특수한 시공간적·담론적 맥락에 속한 행위자에 대한 탐구없이 사상을 역사화하려는 시도에는 많은 제약이 따를 뿐더러, 특수한 사상적·언어적·문화적 실천의 집합을 도대체 어떻게 일반 사회적 개념인 "일상생활"의 총체와 연결시킬 수 있는지는 쉽게 풀릴 수 없는 난제다. 이 문제가 깔끔하게 풀릴 수 있었다면 연구방법론 정당화에 (종종 무익할 정도로)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하는 속박으로부터 사회과학자들이 일찍이 해방되었을 것이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이걸 풀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연구가 문화사·미시사로 전락하는 결과를 막기 위해 푸코의 에피스테메를 강하게 떠올리게 하는 지층과 같은 비유가 언급되는 것이겠으나, 그와 같은 "구조"를 도입할 때 우리는 다시금 구조의 역사화에 뒤따르는 이론적 난제들과 마주하게 된다. 이런 문제들은 사실상 인문학의 (사회)과학화 흐름을 주도했던 초기 아날학파와 구조주의·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선택에 내재해 있었고, 나는 구조 개념 및 그에 수반하는 (잘못된) 보편성에의 요구를 포기하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사회"·"구조"란 말이 "구조적 문제"와 같은 용례에서 볼 수 있듯 사고중지를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돌려말하는 식으로 악용되곤 하는 상황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거시적 구조를 말하자면 신학적 사고를 재도입하면서 역사로부터 이탈하는 곤경에 빠지게 되고, 구조와 거시를 포기하면 최악의 경우 단지 지금까지 조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빼고 도대체 이 연구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스스로도 정당화하기 힘든 미시사로의 비탈길이 기다린다. 저자가 이 책을 쓴 1990년대 중후반은 그런 이론적 곤경이 충분히 가시화되기 전이었으나, 오늘날 그런 난관이 있음을 알면서도 굳이 그 길을 택할 매력적인 이유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관련분야 전공자라면 이 책을 한번쯤 주의깊게 검토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 같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저자가 과연 사상사에 적합한 방법론적 흐름을 수용한 것인지, 그리고 그 조류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정확한지에 대해서는 분명 재고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저자가 드는 여러 사례들 및 그 사례들에서 찾아내는 연구의 난점들을 고려할 때, 저자는 이론적 틀의 엄밀함과 별개로 연구대상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축적했으며 무엇보다 실제로 특정한 방법을 채택하고 연구를 할 때 발생하는 여러 문제를 직접 대면해봤고 또 그걸 자신의 힘으로 풀어내려 시도했으리라는 인상을 준다(물론 실제로 그러한지의 여부는 해당 분야의 연구자들이 직접 판단할 일이며, 도론이 이 책의 가장 빼어난 부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그러하다면 이는 분명 간과될 수 없는 연구자로서의 미덕이며, 저자가 어떤 문제를 인지했고 이를 풀어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뒤따라가보는 건 다른 연구자들에게도 무척 유익한 일이다. 즉 어떤 연구자는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의 결함을 뛰어넘는 성과를 내기도 하는데, 이 저자는 적어도 그런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중국어 번역본의 인용으로 가득한 저자의 '서구 이론' 적용이 특히 '원본'과 무언가 다른 뉘앙스를 품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줄 때, 거기에서 지적 불충분함의 흔적을 찾아내고픈 유혹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은 어긋남이 반드시 그 명칭부터 종교적 경외감을 품은 '원전'에 대한 몰이해로부터만 비롯되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 본인의 연구를 실제로 해보면서 주어진 개념적 도구가 실제 연구에 100% 들어맞지 않을 수 있음을 자각한 지성이 손에 들린 도구를 슬쩍 개조하여 사용할 때도 나타날 수 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실제로 거자오광이 어떤 결과물을 내놓았느냐와 별개로 이 교훈을 밀고 가보자. 방법론은 도구이기에 도구를 엉터리로 쥐거나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상한 학문적 결과물을 내놓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실제 연구대상과 부딪히는 연구자에게 마주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전부 해결할 수 있는 만능 도구, 혹은 내가 지금 여기서 부딪힌 문제에 최적화된 도구가 시의적절하게 주어지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때 연구자는 연구를 밀고 나가기 위해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도구를 개조하거나 혹은 도구로 해결될 수 없는 어두운 영역을 자신의 경험, 직관, 비판적 능력에만 의지하여 헤쳐나가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방법의 한계상황을 경험한 연구자는 자신의 판단이 도구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그 역이 참임을 알고, 도구를 최대한 활용하고 그것을 더 잘 가다듬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언젠가 자신이 도구의 작동범위 바깥에까지 나아가야 할 순간이 있음을 잊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문제를 갖고 있는 연구자는 자신이, 자신의 문제의식이 방법론보다 더 큰 존재임을 자각한다. 그리고 거자오광은 자신의 연구대상이 요구하는 문제가 자신에게 주어진 방법론보다 더 크다는 걸 알고 있는 연구자처럼 보인다.

그것이 이 다소 투박한 듯한 도론을 읽은 뒤 내가 씁쓸함을 느꼈던 이유다. 그동안 문혁 이후 중국 인문학계에 대해 가져왔던 편견과 달리, 중국의 일급 연구자는 해외의 방법론을 (때로 이상하게) 수입해와도 정말로 중요한 건, 자신이 가장 진지하게 대해야 할 것은 갓 수입한 도구가 아니라 자신의 주제, 자신이 대면하는 세상임을 깨닫고 있다는 솔직한 찬탄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 인문학의 '학문후속세대'로서 지켜본 바를 말한다면, 특히나 1990-2000년대에, 어쩌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한국의 인문학 연구자들은 많은 경우 서구에서 가져온 학적 도구를 진지하게 해체·재구성하여 자신의 걸로 만들어보지 않았다. 불행히도 단지 서구의 신품을 보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를 인정하는 한국의 소중화주의적 풍속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쥔 도구의 한계상황을 마주할 필요도 없이 그저 그걸 적당히 휘둘러보는 걸로 충분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그 반대편에는 '수입상'·'앵무새'를 조소하면서 역으로 도구에 대한 반지성주의적 거부감을 정당화하여 자신의 사유를 반성조차 해보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국은 이미 1990년대에 자신의 문제를 갖고 그걸 철저하게 파고들어가보려는 사람이 있었으며 그 작업이 이곳저곳에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한국의 1990년대-2000년대 인문학계는 어땠을까? 소수의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일본 혹은 서구의 것을 먼저 수입했다는 우연적 요소에 힘입어 실력에 비해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혹은 단지 "가장 신뢰할 만한 역자"가 가장 좋은 연구자처럼 받아들여지는--고백컨대 나 또한 이런 인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지금 생각하면 낯부끄러울 일이 파다했다(가령 한국에서 affective turn에 대해 벌어진 가장 큰 논쟁이 affect의 역어를 무엇으로 채택할 것인가였음은 조소감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자신이 마주한 세계에서 자신의 문제를 찾아내는 연구자도 드물며, 그런 연구자가 있다한들 유의미한 논쟁을 거의 일으키지 못한 채 해외 저널에 논문을 게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논문의 내용보다 더 크게 평가받는 게 한국 인문학계의 여러 영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라면, 내가 방법론에 대해서만 몇 편의 글을 내면서 (그 질에 상관없이) 논쟁과 고민의 이어간 1990년대 중국 연구자의 사유를 보면서 소위 "클래스의 차이"를 절망적인 기분으로 느끼는 게 그다지 무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얼마 전 구경할 기회가 있었던 학회에서, 한 중국철학 연구자는 이제 중국학계가 일본학계의 연구는 읽어도 한국학계의 연구는 찾아볼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며 학문의 영역에서도 "코리아 패싱"이 벌어지고 있음을 경고했다. 과연 그게 해당 분야에서만의 일일까? 우리 한국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어느 저널에 어느 언어로 실리고 말고를 넘어 자신의 문제의식을 방법의 끝에까지 밀고 가볼, 그리고 그것을 받아 논쟁할 기회가 몇이나 있을까? 과연 우리는 우리의 존재이유를 강한 자신감을 갖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좌절감을 털어낼 수 있을 때가 조속히 오기를 바란다.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적 가치의 위기도 인문학자 생존의 위기도 아닌, 한국 인문학계의 무능이 초래한 위기임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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