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 벙찌게 만드는 수능만점자"? / 포퍼, 쿤, 문빠 혹은 과학철학과 대중정치의 기묘한 만남

Comment 2017. 9. 23. 18:21

하루에만 두 개의 오류 지적 포스팅을 쓰는 일이 생기다니.


1. 


"석사 벙찌게 만드는 수능만점자"라는 포스팅이 페이스북 지인들을 통해 내 시야에 들어왔다(http://www.instiz.net/pt/4761104 / 페이스북은 https://www.facebook.com/instiz/posts/1553765021374721 )



마침 인용된 지문이 영문학 지문이라서 읽어보다가 짜증나서 글을 쓴다(많은 사람들이 의외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난 제도상으로는 영문학 전공자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적어도 캡처된 내용 및 관련 기사만 참고할 때(나는 위키트리 기사를 참고했다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269994 ) 아마 문학비평 혹은 연구서를 별로 읽어보지 않았을 타일러 라쉬도, 수능 만점자라는 문제해설자도, 전현무도, 이걸 한국 수능영어시험의 괴상함을 보여주기 위해 캡쳐해서 포스팅한 분도 다 틀렸다. 이들은 모두 "Whitmans' poet"이 영어권 사람들이 쓰지 않는 잘못된 영어라는 틀린 전제를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며 결과적으로 "한국식 영어교육"이 얼마나 이상한지를 강조하려는 진부한 내러티브를 되풀이한다. 그러나 2016년 수능영어 34번 문제의 악명과 별개로, 해당 표현은 영문학 연구서에서 종종 볼 수 있는, 한국어로 치면 "윤동주의 시인은" 혹은 "윤동주 시에서의 시적 자아는" 쯤으로 별 문제없이 번역될 평범한 문학비평용어고, "Whitman’s poet sought the approval of his contemporaries"은 "휘트먼 시의 시인[혹은 시적 자아]는 동시대인들의 인정을 받고자 했다"는 역시 그 자체로는 특별할 게 없는 문장이다. 전문적인 용어를 낸 게 문제라고 투덜거리실 분이 있다면, 과학지문에서 볼 수 있듯 수능영어시험에서 어느 정도 전문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는 흔하며 애초에 해당 시험의 목적 중 하나가 모르는 단어가 나와도 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지 여부를 측정하는 데 있다는 걸 상기하면 될 것이다.

먼저 내 말보다 직접 증거를 봐야 믿으실 분들을 위해 "Whitman's poet"이라는 표현을 직접 구글링해보면 아주 많지는 않아도 몇 가지 예시를 찾을 수 있다. 그중 하나는 Sacvan Bercovitch가 전체 편집을 맡은 _The Cambridge History of American Literature_ 시리즈, 그중에서도 1800년부터 1910년까지 19세기 시를 다룬 4권이다(Cambridge: Cambridge UP, 2004). 그중 프린스턴에서 비교문학으로 박사를 받고 현재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The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에서 영문과 교수로 있는 Shira Wolosky(http://english.huji.ac.il/people/shira-wolosky)가 쓴 월트 휘트먼에 대한 챕터를 보면 정확히 "Whitman's poet"의 용례가 나온다(대표적으로 365, 373 쪽). 내용은 휘트먼의 시인 혹은 시적자아에 대한 설명으로, 표준적인 19세기 미국문학사를 수강했고 "Song of Myself" 같은 휘트먼의 시를 읽어본 사람들은 바로 눈치채겠지만, 이 주제는 휘트먼 시 비평에서 고전적인 이슈에 속한다. 애초에 그러니까 <케임브리지 미국문학사>에 실렸겠지만(해당 챕터명 자체가 "월트 휘트먼: 시인의 책무" Walt Whitman: The Office of the Poet 이다). 당연히 이 표현/주제는 휘트먼에게 한정되어 쓰이는 것도 아니고, 윌리엄 워즈워스처럼 자신의 시작(詩作) 내에서 시인 혹은 시적 자아의 탐구에 깊은 관심을 쏟은 시인들에 관한 연구에서 종종 볼 수 있다. 한국인인 나를 믿지 않으실 분을 위해 직접 "Wordsworth's poet"으로 검색해보면 <옥스퍼드 핸드북 윌리엄 워즈워스 편>(_The Oxford Handbook of William Wordsworth_)에서도 용례를 찾을 수 있다. 나를 믿고 말고는 여러분의 자유지만,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에서 나온 영문학연구서, 그것도 케임브리지 역사와 옥스퍼드 핸드북의 필자와 편집자들이 해당 분야를 공부하지 않은 타일러 라쉬보다 영어를 못한다고 반론을 제기할 분이 없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위 방송에서 전개된 상황을 좀 더 제대로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타일러 라쉬는 그냥 문학비평용어의 용법을 몰랐던 건데, 본인이 읽다가 모르는 내용이 나오고 한국 수능이라고 하니까 이걸 당연히 "틀린 영어"라고 단정지어버렸다(poet이라는 lexicon의 해당 usage가 케임브리지 미국문학사에 나온 사례였다고 해도 같은 반응을 했을 것 같진 않다). 방송에 불려온 (아마도 문학관련 텍스트를 별로 읽어보지 않은 학부생으로 추정되는) 수능만점자는 타일러가 "틀린 영어"라고 이의를 제기한 표현의 용법을 마찬가지로 몰랐으므로 그냥 문맥을 따져 맞춰보면 된다는 그다지 적절하지 않은 답변을 했고, 전현무도 동조했고, 방송제작진도 이후에 편집을 하면서 구글링을 해보지 않았고, 저 포스팅을 올린 사람도, 타일러의 비판이 맞다고 생각해서 댓글을 달거나 공유한 사람도 모두 직접 찾아보는 대신 한국 수능영어를 욕하는 흔해 빠진, 그러나 잘못된 결과에 도달했다. 한국 중등과정의 영어교육이 이상할 수도, 해당 문제가 전체적으로 좀 이상한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적어도 "Whitman's poet"이란 표현이 틀린 영어이기 때문인 것은 분명 아니다.

이 일의 교훈으로는 뭐가 있을까? 첫째, 모르는 영어용례가 나오면 구글링을 좀 해보자ㅠㅠ. 둘째, 좋은 학교를 나온 지적인 외국인이라고 해도 영어 마스터인 것은 아니며, 본인 필드가 아닌 영역이면 더욱 그렇다. 셋째, 외국인이 주장한 내용이 맞는지 교차검증을 할 거면 가능하면 해당 분야를 공부해 본 사람을 부르자. 수능만점이라고 해봐야 기껏 학부 1-2학년생인데 괜히 능력을 초과하는 일을 맡겨서 웃음거리로 만드는 게 제대로 된 일은 아닌 것 같다. 넷째, 가짜뉴스가 판치는 시대에 방송도 아주 약간은 지적 신뢰도를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구글링만 하면 5분도 안 걸려 다 찾을 수 있는 실수가 방송을 타서 꽤 긴 기간 동안 진짜처럼 받아들여지는 게 무슨 코미디인가.



2.


교수신문 칼럼 링크(http://m.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4032)



읽다가 너무 어처구니 없이 웃겨서 공유한다. 한번 필자를 선정하면 지면에 되도않는 헛소리를 해도 용인하는 게 교수신문의 방침인 건지, 아니면 투철한 문재인 지지자를 필자로 보유하는 게 신문의 현실적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 글은 해도 너무 한다 ㅋㅋㅋㅋ

특정 정치인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포퍼적 태도고, 맹목적 지지가 쿤적인 태도라는 참신한(!) 도식은--물론 필자는 쿤의 사상적 요점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제시하지 않는다--필자가 시민의 덕과 정치체의 부패에 대한 고전적인 정치사상의 주제를 전혀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인이 전문 라이센스를 보유한 필드에 대해서도 신뢰할 수 없는 글을 쓰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특히 쿤의 연구가 다루는 학문장의 영역과 대중정치담론의 장을 멋대로 뒤섞는 매우 문제적인 태도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조금 진지하게 말하자면, 패러다임은 기본적으로 상황을 기술, 이해,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개념이며 바로 이 글의 필자가 시도하듯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규범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쓰이는 도구가 아니다! 과학철학 입문서만 읽어도 하지 않을 황당한 주장을 무려 전공자란 양반이 하다니, 포퍼와 쿤이 무덤에서 돌아눕다 못해 데굴데굴 구를 것 같다. 이 논리대로라면 박사모와 자유한국당의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지지자들도, 갖가지 음모론 지지자들도 똑같이 자신들을 쿤 주의자(?)로 정당화할 수 있다. 합리적인 문재인 지지자라면 명백한 곡학아세일 뿐만아니라 적들에게도 무기를 주는 독약 같은 글과 그 필자를 멀리하는 쪽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나는 최성호 교수가 의도적으로 자신이 배운 걸 왜곡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포퍼와 쿤을 이렇게 활용해도 된다고 믿는지 모르겠다. 전자라면 그냥 조기숙처럼 나쁜 의미의 폴리페서로 보면 될 일이지만, 혹시라도 후자라면 서울대 과학철학 박사과정 교수진은 자신들의 교육커리큘럼에 심각한 결함이 없는지 진심으로 반성해야 하며, 아울러 불행히도 서울대가 배출한 문제적 연구자를 넙죽 받아먹은 경희대 철학과는 학생들의 지성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적지않은 고심을 해야 할 것이다. 교수신문에 기고한 최성호 교수 칼럼은 지금까지 대체로 문제적이었는데, 이번 화는 화룡점정을 찍는다. 앞으로 어떤 글이 교수신문의 명예에 오점을 남길지 슬픈 예감을 갖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과학철학/과학기술사회학에서 학술장의 정치적 성격에 대한 연구가 오랫동안 되어온 건 맞지만, 그렇다고 그 논의가 대중정치담론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건 그냥 지적인 태만이다. 최성호 교수의 뒤를 따르는 신진과학철학연구자가 나타날 불행한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덧붙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