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 <세계사의 구조> 읽고 인용 [130615]

Reading 2014. 3. 18. 13:51

*2013년 6월 15일 페이스북


<세계사의 구조>는 (애초에 저자도 언급하지만) 여러 모로 헤겔을 떠올리게 한다.이 책이 가장 고대적인 시스템에서부터 근대세계체제(자본=국가=네이션, 곧 완성된 근대국가들의 세계체제)까지의 진행구도를, 그리고 근대세계체제로부터 필연적으로 초래될 '미래의 체제'로의 이행과정을 서술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지적 배경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현대 프랑스철학의 영향도 있다. '정신'geist의 형성 및 진행과정이라는 시간적 계기에 철저히 몰두한 <정신현상학>과 달리 <세계사의 구조>는 각각의 역사적인 단계를 통시적인 틀 안에서만 설명하는 대신 공시적인, 즉 형식적인/구조적인 틀 안에서 그 전개과정을 그려내려고 한다. 따라서 미니세계시스템, 세계=제국, 근대세계체제, 세계공화국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교환양식"mode of exchange이라 명명된 이질적인 계기들이 각각의 단계를 어떤 식으로 구성해나가는지를 설명하는 챕터들의 이어짐이기도 하다. 한 챕터에서 다른 챕터로의 이행, 즉 세계사의 전개는 이러한 공시적인 구조들이 작동했을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에 대한 보충설명으로 해결된다(아마 이러한 단계와 단계 사이의 연결고리가 가라타니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기 위해 용이한 가장 취약한 지점이 될 것이다). 아주 멀리서 보았을 때 가라타니의 노작은 세계사의 전개 그 자체를 해명하는 작업이지만, 조금 각도를 비틀어 보았을 때 이것이 미시적 근본요소들elements로부터 형성된 '구조물'structure이라는 점도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이런 건축물=책을 만들었다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그는 (그의 설명틀이 갖고 있는 약점 또는 해명하지 못한 지점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 시대에 거의 비교할 사람을 찾기 힘든 인물임에는 틀림없다(당장 생각해봐도 오스발트 슈펭글러처럼 20세기 초반부에 살았던 이들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벤야민과 같은 이들을 개별적으로 인용했던 경우를 제외한다면 가라타니가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직접적으로 거명한 것은 적어도 국역된 그의 텍스트들 중에서는 이 책이 유일한데, 그의 비판적인 진술처럼 20세기 중반 이후의 비판적 사회이론들은 (알튀세르나 푸코처럼) 정신적인 것의 형성을 해명하려고 하거나 아도르노처럼 다소 파편적인 비판을 수행하는 경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역으로 경제사회적 이론 중에서 문화적인 것들을 포괄한, 그리고 통시적인 해명을 시도한 경우는 드물었다). "정치 종교 철학, 그 밖의 것이 상호 연관을 맺는 구조를 총합적/체계적으로 보는 시점" 자체가 20세기 중반 이후 비판적 사회이론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면, 가라타니의 시도는 그 희소성만으로도 찬탄할만하다. 약간은 경직된 번역과 함께 텍스트에 딸린 엄청난 인용들이 독서의 난이도를 높이긴 하지만 언뜻 봐서 평이한 서술로부터 미시적인 요소와 거대한 구조의 상호연결고리를 따라가보는 독서체험 자체가 오늘날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나 "현상지양을 전망하는 시점"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전역한 이후 반드시 세미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책 중 한 권이기도 하다(지금까지 두 번을 빨리--한번은 약간의 각주를 덧붙이면서--읽었는데, 천천히 한두번은 더 읽어야만 한다).

현재 인용할 수 있는 것들만 적는다. 더 중요한 내용들이 있지만...다음에.

"내가 생각하기에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이라고 부른 사태는 이런 자본=네이션=스테이트가 한번 완성되면, 그 이상으로 근본적인 변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최근 세계 각지의 '체인지'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가 붕괴되기는커녕 그 메커니즘이 잘 기능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네이션=스테이트라는 매듭은 무사태평이다. 그 회로 안에 갇혔다는 자각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안을 빙글빙글 돌고 있을 뿐인데도 역사적으로 전진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15)

"경제적 하부구조를 광의의 교환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파악하면, 도덕적 차원을 '경제' 바깥에 상정할 필요는 없다. 도덕성의 계기는 교환양식 안에 포함되어 있다....그것[교환양식D]은 바로 경제적=도덕적 과정이다." (22)

(산업자본주의와 국가와 관계)
"...인간적 노동을 분할하고 통합하는 것, 바꿔말해 인간적 노동을 '기계'화하는 것이기계 자체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것은 그때까지의 길드직인과는 달리 '분업과 협업'을 참는 노동자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용이하지 않다. 이와 같은 변화를 생산기술만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108)
-> 군대와 군대의 경험, 그리고 그 경험이 어떤 인간을 형성하는지를 보라.

(신석기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실은 이 시기에 '노동을 절약하는 기술'이 발명되었다. 그것은 노동의 조직화였다. 관개농업에서 중요한 것은 농경노동보다도 치수관개 공사이다. 이와 같은 노동은 수렵이나 채집과 닮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재배나 농경과도 닮지 않았다. 그것은 비트포겔이 말한 것처럼 중공업에 가깝다. 그것에는 다수의 인간을 조직하여 '분업과 협업'을 하도록 하는 시스템, 그리고 discipline[푸코를 상기]이 필요했다. 농업혁명을 초래한 것은 기계까 아니라 루이스 멈포드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기계'mega-machine이다. 멈포드가 말하는 것처럼 군대조직과 노동조직은 거의 같은 것이다.
자연에 대한 테크놀로지라는 의미에서 고대문명이 가져온 혁신은 그렇게 크지 않다. 하지만 인간을 지배하는 기술이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획기적이었다. 무릇 고고학적으로 시대를 나누는 '청동기'나 '철기'라는 것은 생산수단으로서보다는 오히려 국가에 의한 전쟁수단(무기)으로서 고안되고 발달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지배하는 테크놀로지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료제이다. 관료제는 인간을 인격적인 관계나 호수적 관계로부터 해방시킨다. 군대 또한 관료제에 의한 명령체제에 의해 조직되었을 때 강력하게 된다. 대규모 관개노동도 그것에 의해 가능했다.
다시 말해, 인간을 지배하는 기술이란 단순한 강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규제에 따라 노동하는 discipline을 부여하는 것이다"(109-10)

"공동체 간에 상품교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거기에 존재하는 '전쟁상태'를 극복하고 일정한 우호적 관계가 구축되어야 한다. 증여는 그것[전쟁상태를 극복하고 교역의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는 우호적 관계의 구축]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138)
-> 계약 혹은 교환을 근본적인 지점에까지 묻는다면, 최초의 전제는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사의 확인에 있다.

"프랑스에서 '중간세력'[귀족, 교회 등]이 사라진 것은 프랑스혁명(1789년)에 의해서이다. 시민혁명은 절대왕정을 없앴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중간세력을 없앰으로써 절대적인 주권자를 확립했던 것이다. 그것은 인민이 주권자인 국가(시민독재국가)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와 같은 과정은 영국에서도 훨씬 이전에 절대왕정을 무너트린 청교도혁명(1648)에서 생겼다. 그러므로 <리바이어던>을 쓴 시점에서 '주권자'라고 할 때, 홉스가 염두에 둔 것은 절대왕정이라기보다도 오히려 왕을 처형함으로써 출현한 인민주권이었다. 즉 주권자는 왕이든 인민이든 누구를 대입해도 상관이 없는 '장소'를 가리킨다."(146)

"화폐경제가 침투하면, 타인을 주[술]력이나 무력에 의해 강제할 필요성이 감소한다. 상호합의에 의한 '계약'에 의해 강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베버가 말하는 '주술로부터의 해방'은 화폐경제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다. 화폐는 사람과 물건을 '그것'으로 삼아, 즉 계산가능한 것으로 다룰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207)

"홉스의 견해는 주권자를 국가의 내부에서가 아니라 외부와의 관계에서 보는 것이다. 내부만을 보면, 왕이 주권자인가 국민이 주권자인가는 커다란 차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를 들어 아일랜드인이 보면 절대왕정과 크롬웰의 차이는 없을 것이다. 영국의 정치체계가 어떻게 바뀌든 주권국가가 하는 일은 똑같다. 홉스가 생각하기에 주권은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라는 정치체계와 관계가 없다. 예를 들어, 개인이 주권을 가진 경우도 있고, 합의체가 주권을 가지는 일도 있지만, 그것이 주권의 성질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예를 들어, 그리스의 폴리스는 각기의 내부에서는 민주정이다. 즉 주권은 시민의 '합의체'에 존재한다. 하지만 식민지나 노예에 대해서는 '군주정에 의한 통치'인 것이다. ... 홉스가 생각하기에는 "주권자 이외의 모든 자는 그의 신민subject이다. 즉 국민이라는 주체는 절대적인 주권자에 복종하는 신민으로서 형성되는 것이다. 국민주권은 절대왕정에서 파생된 것이고, 그것과 떼어낼 수 없다. 절대왕정이 무너지면, 국민이 주권자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주권이라는 사고는 국내에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권은 먼저 바깥에 대해서 존재한다. 따라서 절대왕정이 무너져도 다른 국가에 대한 주권의 성격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251)

"일찍이 라이트 밀즈가 분석한 것ㅊ러럼 화이트칼라는 사기업의 관료층이다. 선진자본주의국가에서는 화이트칼라의 역할이 크다. 그들은 화폐와 상품이라는 경제적 카테고리에 근거한 계급class으로...실제로는 블루칼라를 지배하는 신분status에 있다. 화이트칼라의 고뇌는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 '과거'와 같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단느 것, 또 들어가면 자신의 의사를 희생하여 조직의 톱니바퀴로 일하고, 위계를 올리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즉 이것은 임금노동제라기보다는 오히려 관료제에 특징적인 문제이다.
...
국가의 관료제에 대해 말하자면, neo-liberalist(libertarian)는 그것을 '민영화'나 '시장경제원리'에 의해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료제는 비능률적이어서 그것을 기업과 같은 기준으로 한다면, 능률이 오르고 관료는 축소될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민영화에 의해 관료제를 해소할 수 있다는 기만이다. 사기업 그 자체가 이미 관료제적이기 때문이다." (264-65)

"산업노동자가 노예나 농노는 물론이고, 임금노동자 일반과도 다른 점은 그들이 스스로 만든 것을 사는 자라는 것에 있다. ... 예를 들어 노동자는 노동력 이외에 팔아야 할 것은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할 때, 그들의 빈곤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노동자가 생활물자를 자급자족하지 않고 구입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노예는 자신이 생활물자를 사는 일은 없으며, 농노는 공동체에서 자급자족한다. 그에 반해 산업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판 돈으로 자신 및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들이다. 산업 노동자의 출현이란 동시에 그들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상품을 사는 소비자의 출현이다" (274-75)

"산업노동자는 근면하고 시간을 지키며 분업과 협업에 적응가능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산업자본주의에 적합한 근면한 에토스를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에토스는 학교와 군대의 집단적 훈련을 통해서 초래된다는 쪽이 보편적이다.
학교교육은 직인의 도제제 훈련과는 다르다. 산업자본주의에서의 '노동력' 상품에는 특정한 기능이 아니라 어떤 직종으로 이동해도 적응가능한 능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계산능력이나 언어능력과 같은 일반적인 지식을 부여하는 교육이 필요하다. 게다가 산업자본의 가치증식은 기술혁신(생산성의 형성)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노동만이 아니라 고도의 과학기술을 가져다주는 노동력을 육성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학이나 연구기관이 불가결하다. 이와 같은 과제를 완수하는 것은 개별자본이 아니라 총자본, 즉 현실적으로 국가이다.
국가에 의해 노동력이 육성된다는 것은 영국 이외의 후발자본주의국가를 보면 명백하다. 그곳에서는 오히려 영국의 산업에 대항하기 위해 국가가 솔선하여 의무교육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실행한 것은 계몽전제군주나 그와 닮은 체제(보나파르트나 비스마르크로 대표되는)이다. 비서양국가 가운데 급속한 공업화를 지향한 나라에서도 같은 것이 이루어졌다. 즉 공업기술의 도입 못지않게 노동력의 육성이 중시되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은 메이지유신 후 4년째에 징병령과 의무교육령을 발포했다. 공업은 발달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의무교육과 집단적인 규율에 의해 자본제생산에 적합한 노동력이 먼저 창출되었던 것이다. 후발자본주의 국가는 메뉴팩처를 통해서 직인기질을 서서히 바꾸어가는 느긋한 방식을 취할 수 없었다. 이처럼 산업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개입이 불가결하다. 국가도 존속을 하기 위해서는 산업자본주의의 발전이 불가결하다. 국가와 자본은 이질적이지만, 상호의존함으로써만 존속가능하다."(287-88)

"[베네딕트 앤더슨]은 네이션[민족]을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로 파악했다. 일견 이것은...네이션은 사람이 그로부터 깨어나야 할 공동환상이라는 견해, 즉 계몽주의적 관점처럼 보인다. 하지만 앤더슨이 한 가지 다른 점은 네이션이 오히려 계몽주의의 결과로서 생겨났다는 점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는 18세기 서양에서의 네이션 발생을 오히려 계몽주의, 합리주의적 세계관의 지배 속에서 종교적 사고양식이 쇠퇴한 것에서 발견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네이션은 종교를 대신하여 개개인에 불사성, 영원성을 부여하고 그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 것이었다."(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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