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집회 및 "거리의 정치"에 대한 노트

Critique 2016. 11. 1. 18:15
며칠 지나서 쓰는 특별한 시의성은 없는 기록과 논평


1.

29일 회의가 끝나고 잠시 시청광장-경복궁 앞을 다녀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분위기가 어떤지를 직접 관찰하고, 느끼고 싶었다. 특히 집회와 같은 현상을 이해할 때 공식적인 뉴스기사로만은 알 수 없는 지점이 분명 있다. 오후 8시 조금 넘어 시청역께를 지나 광화문역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멀리서부터 사람들의 외침이 아직 형태가 불분명하지만 자체의 힘과 무게를 지닌 덩어리mass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과는 구별되는 뚜렷한 의지를 지닌 목소리가 빌딩 벽을 타고 일정한 리듬을 타듯 반복되어 들려왔다.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니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수의 인파가 결집해 있었다. 군중의 기세를 시각적 이미지로 그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주관적인 인상을 기술하는 게 허용된다면, 아주 순간적으로나마 '중동의 봄' 사태 때 TV로 보던 광경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집회참여자들은 이순신장군동상께부터 세종대왕동상까지의 구간에 결집해 있었다. 광화문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집회장소의 이순신장군 동상 좌편에는 노동당의 가두연설트럭이, 광화문역 9번 출구를 지나쳐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면 오른쪽 도로에는 집회참여자들을 위한 발언기기를 갖춘 트럭이 있었다(고등학생들의 발언이 종종 들렸다). 우편 도로부터 가운데 공간까지의 인파 사이에는 수많은 깃발들이 보였고, 좌편 도로께로 올수록 깃발은 줄어들고 좀 더 조직되지 않은 참여자들이 많은 것 같았다; 오늘날 전국적인 이슈를 다루는 집회를 이해할 때 가장 기초적인 전제 중 하나는 집회 참여자들이 절대로 균일하지 않다는 것이다. 좌편, 특히 세종센터 미술관과 대극장 사이의 계단에만 촛불을 든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었고, 거기에서부터 세종대왕상까지 이르는 길에 대극장 계단을 사람들이 가득 메웠다. 집단·조직차원이 아닌 개인이나 소규모 일행으로 참석한 이들은 스마트폰이 아니면 전체국면 자체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그나마 스마트폰도 막상 집회현장에 대해선 매우 제한적인 정보만을 제공한다--조금이라도 높은 위치에 올라가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집회 구성원 중 젊은 여성이 차지한 비중이었다. 2008년의 광우병/한미FTA 반대 촛불집회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당시 집회에 젊은 여성이 적지 않게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상당한 뉴스거리가 되었고, 이를 전의경들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예비군복을 입은 남성들이 집회군중과 경찰 사이에 위치하기도 했음을 기억할 것이다--물론 오늘날 이 상황을 돌이켜볼 때 예비군부대의 행동은 여성을 피보호자로 간주한다는 점에서 비웃음을 살테지만, 과거를 기술하는 시점에서 공정하게 말해보자면 2008년은 집회의 패러다임이 급격하게 변하는 과도기로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전 시기 집회의 보다 '폭력적인' 면모를 잊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로부터 8년 뒤인 2016년 10월 말의 집회에서 우리는 경찰의 저지선과 바로 맞닿는 지점에서조차도 여성이 상당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대통령의 퇴진·하야를 요구하는 구호 소리에도 반영되어. 멀리 보이는 광화문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외침소리는 전체적으로 목소리 톤이 높게 들렸다. 다시 말해 깃발을 공유하지 않은 개인·소규모 참가자들 중에 여성 비중은 상당히 컸고, 그들은 분명히 이 집회에서 가장 중요한 지분을 가진 집단 중 하나였다. 특히나 일베이용자들을 비롯한 젊은 우파들의 엄청난 여성혐오를 포함해 이들이 정치적 주체로 전면에 등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시선이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 흐름을 비가역적이라고 할 때 이것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를 주의깊게 예측해볼 필요는 있다.


2.

약 1년 전 故 백남기 선생이 치명상을 입은 민중총궐기와 비교할 때 두 가지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었다. 첫째, 흥미롭게도 경찰-집회 대치선이 지금까지의 익숙한 그림과는 달리 이순신장군 동상이 아니라 세종대왕상 근처에 형성되어 있었다.둘째, 저 멀리 광화문 앞에 신종 차벽이 설치되어 있는 게 보였고, 거기에서부터 세종대왕동상까지 경찰병력이 운집해 직접 집회참여자들과 대치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정확히는 왜 경찰이 이러한 상황을 허용했을까? 백남기 선생의 죽음과 같은 소수의 사례를 제외하면, 우리는 좋든 싫든 2008년 이후 한국대중집회의 모습을 결정한 가장 강력한 행위자가 경찰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한국 현대사에서 정부·국가기구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현재 나로선 집회 시작 때부터의 참여자수와 동선,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찰의 작전계획을 알 수 없기 때문에--후대의 연구자들을 위해 관련 내용이 세심하게 기록되기를 희망한다--여기에 정확한 답변을 내놓을 수는 없다.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대치선을 후퇴시키고 집회군중을 좀 더 광화문 쪽으로 끌어옴으로써 경찰은 광화문 네거리의 교통을 확보했다. 광화문 집회를 컨트롤할 때 경찰의 핵심의제 두 가지가 1)집회군중이 경복궁·청와대로 진출하는 것을 막고 2)주변 대중교통의 마비를 최소화하는 데 있다면, 29일 집회에서 경찰은 두 가지 목적 모두를 무리없이 달성했다. 1번의 과업이야 사실 2000년대부터는 실패한 적이 없다고 봐도 될테고, 2번의 경우 인파가 지금보다 압도적으로 늘어나지 않는다면 광화문 네거리를 통제하는 것보다 지금과 같은 형태가 경찰측에는 더 효율적일 수 있다. 실제로 광화문 네거리 자체에 머무르는 사람 수는 매우 적었고 경찰지도부는 이미 이 상황을 준비하고 있었던 듯 교통경찰들을 파견하여 정상적인 차량운행을 지시하고 있었다.

과거의 기록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듯(http://ppss.kr/archives/61414), 그리고 최근 집회의 전진방향에 관해 유용한 의견을 제시한 글에서도 암시되듯(http://m.media.daum.net/m/media/society/newsview/20161031132626555), 병력, 무장 및 장비, 훈련도, 조직적인 움직임, 전술적 판단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민간인 집회군중이 한국 경찰을 압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설령 지금보다 더 많은 수의 집회군중이 모인다고 할지라도 시청광장에서 광화문까지의 좁은 길목을 뚫고 청와대로 전진한다는 것은 지리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며, 그것이 가능해진다면 한국이 이미 유혈사태가 일상화된 내전상황으로 접어든 뒤일 것이다--극단주의자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원하지 않는 그런 상황 말이다. 앞일을 예측하기 몹시 어려운 상황이지만, 아마 경찰 지도부 자체에 심각한 트러블이 생기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집회는 경찰의 통제범위 안쪽에서 진행될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매우 높다.


3.

특히나 과거의 혁명 전통을 반복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오로지 거리만이 유일하고 참된 정치적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게 계신다. 물론 프랑스 혁명의 주도자들이 자신들이 고대의 로마 공화정을 반복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처럼 사람들이 과거의 정치적 상상력에 기초해 현재의 사태를 파악하고자 하는 일은 언제나 일어나며(특히나 '혁명적'인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금 상황이 지난 수 년간 그 어느 때보다도 그러한 모델을 떠올리기에 좋은 조건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먼저 짚어야 하는 지점은 지금은 1894년도, 1960년도, 1987년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거에 기초해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 것, 과거의 영광을 반복 혹은 더 낫게 되풀이해야 한다고 믿는 것은 언제나 매력적이지만, 대체로는 좀 더 중요한 차이를 잊어버리게 만든다는 점에서 우리가 신중하게 거부해야 하는 자세이다. 현재는 과거가 아니며 그것을 그대로 되풀이할 수도 없다.

나는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꼽고 싶다.

1) 가장 중요한 것은 여소야대 정국 및 언론사들의 경쟁적 취재에 따라 공식적인 의회정치 및 준공식적인 여론형성 과정 모두에서 대통령 비판적인 입장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장외투쟁을 전개해야만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데, 거리의 투쟁은 기본적으로 공식적인 권력을 보유하지 못한 집단이 마지막으로 쓸 수 있는 카드 중 하나다. 거리로 나오는 순간 더불어민주당은 제1야당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합법적인 그리고 위력적인 카드를 포기하는 셈이 된다(그리고 대통령 지지자들은 쾌재를 부르며 공식적인 기구들을 마음껏 조작하기 시작할 것이다...그리고 한국은 공식적인 기구들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척이나 많은 나라다). 나는 집회장소에 함께 나와주지 않는 잠재적 우군에 대해 서운한 감정이 생기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공식적인 정치행위자가 바로 그 감정에 휘둘려 전략적 판단을 결정하는 건 솔직히 말해...유리한 상황에서 유리한 카드를 버리고 맨손으로 게임에 임하는 바보짓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현실은 소년만화보다 좀 더 복잡하다.

2) 특히나 30년 전의 과거와 지금을 겹쳐놓을 수 있다고 믿는 분들께서 망각하는 사실은 더 이상 거리의 정치가 차지하는 위치가 30년 전과 같지 않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30년 전에 비해 확실히 물리적 충돌 및 유혈사태를 단지 회피할 뿐만 아니라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었으며--이는 시위대와 경찰 모두에게 적용된다--이제 거리가, 집회군중이 올바르고 유효한 정치적 결정의 유일한 근원이 될 수 있다는 (신학적인) 믿음은 오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설득력을 지닐 뿐이다. 지난 30년 간 각 분야 전문가들의 판단이 갖는 무게 및 공식적인 절차를 통한 일처리에 대한 의존도는 매우 상승했다. 요컨대, 비록 현재 공적 영역 전반에 대한 심각한 불신이 초래되긴 했지만, 지난 30년 간 제도적 정치 및 각 영역의 전문화 정도는 큰 폭으로 상승했으며(예를 들어 20대 국회의 민주당 의원실들의 역량과 12대 국회 신민당 의원실들의 평균역량을 비교하면 확실히 전자의 업무처리능력이 나아졌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반비례하여 집회군중이 갖는 정치적 영향력 또한 신화적인 위치를 상실했다.

87년에는 대학생들이 곧 사회의 올바른 방향을 지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2016년에는 박사학위 소지자나 교수라고 할지라도 쉽게 보편적인 지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힘들어졌다. 다시 말해 거리의 정치에 전체적인 국정운영을 진두지휘할 역량과 자격이 있다는 믿음은 매우 퇴색되었다. 더불어 이미 집회구성원 자체가 여러 조직들의 결합체가 아니라 개별적인 시민참여비중이 매우 늘어난 상태에서 시민대표를 손쉽게 선출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자체가 비현실적이다--그 열정은 물론 무척 고결한 것이지만 말이다.

3) 결론적으로 오늘날 대중집회·거리의 정치는 공적 영역의 정치에 영향을 주는 여러 가지 요소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한편으로는 경찰의 막강한 통제력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사회 전반에 걸친 비폭력 선호 경향의 증진에 의해 대중집회의 물리적 영향력은 더 이상 그다지 강력하지 않게 되었다. 정확히 말해 오늘날 대중집회의 정치적 영향력은 특정한 메시지가 더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며 그러한 노출을 통해 공론장의 의견을 형성해가는 것, 나아가 공식적인 행위자들이 그러한 의견표출을 근거로 하여 정치적 결정을 제시하게 되는 과정에서 나온다. 즉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을 집회군중, (언론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론, 의회·행정부 등의 공식적 행위자라는 세 가지 주체의 상호작용으로 단순화시킨다고 할 때, 오늘날 집회군중은 단지 셋 중의 하나일 뿐이다--여전히 중요한 구성요소이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가 보다 발전된, 안정적인 국가와 사회를 만들어나간다는 것은 대중집회가 여러 요소 중의 하나로 축소되는 경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내 생각에, 비록 지난 수 년 간 한국의 공적 영역의 효율성과 신뢰도가 매우 하락하긴 했지만, 우리가 장기적으로 이러한 발전궤도에 따라 움직여왔음을 부인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 흐름을 역행하거나 모든 것을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자고 주장할 것이 아니라면 거리의 정치가 갖는 특권이 쇠퇴했음을, 그리고 그것이 보다 커다란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의 일부분임을 인정하고, 다른 영역에 속한 행위자를 단순히 비난하기보다는 그 행위자가 어떻게 움직이는 게 최종적인 선에 기여하는지를 숙고해봐야 한다.


이 세 가지 차이점만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요점은 과거의 익숙한 프레임에 현재를 성급하게 끼워맞추려는 열망을 억누르고 현재 상황 자체의 특수한 성격을 이해해야, 그리고 그로부터 현재 상황에 최적화된 행동방향을 도출해내야 한다는 점이다. 내 생각에는 그러한 현실주의야말로 우리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저주로부터 풀려나게 해줄 유일한 원칙인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