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당, 게임과 주체형성, 자아의 범위와 성숙함 [130827]

Comment 2014. 3. 18. 13:30

* 2013년 8월 27일 페이스북


1.

"다들 그렇잖아. 솔직히 너도 마찬가지고." '양식적인' 데카당들, 자신의 악덕 혹은 불의한 욕망을 인정받고픈 이들은 종종 이런 류의 변명을 내놓는다. 그러니까 자기도 특별히 부패한 게 아니라고, 너도 똑같이 썩었다고, 혹은 이제부터라도 똑같은 인간임을 수긍하라고 말이다(심지어 사드의 텍스트에도 이런 논법이 보일 때가 있다). 자기 자신의 가슴 속 깊은 지점에서부터 스스로의 욕망 혹은 악덕을 순수하게 긍정하지 못하는 데서 보이는 떨떠름함--대조적으로 당당한 악인은 애초에 스스로의 행위로부터 어떠한 부당함도 찾지 못할 터이다--이외에도 이러한 주장은 세 가지 잘못을 품고 있다. 단지 스스로의 내면에서부터 발견했을 뿐인 하나의 풍경을 추체험하여 일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일반적인 판단을 눈 앞의 '너'에게 성급하게 부여한다는 것--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안쓰러운 잘못은 옳지 않은 일을 수행하면서조차 다수의 편에 있고 싶은 마음, 대중의 틈바구니에 스스로를 숨겨야만 입을 열 수 있는 비겁함이다.

2.

소설 읽기가 근대 독자-대중들의 자아 형성에 중요한 계기였음을 인정할 수 있다면, 우리의 동시대인들에게 (PC와 콘솔을 포괄하는) 게임이 마찬가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단적으로 묵독은 자아를 '내면=깊이를 갖춘 개인'의 모습으로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다. 우리는 소설을 읽는 경험으로부터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방법을, 스스로의 사고를 단문들의 나열이 아닌 하나의 길고 통일성을 갖춘 언어로 직조하는 법을 배운다. 일정 이상의 읽기 혹은 그에 상당하는 경험을 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근대적인 의미에서 '단일한 건축물로서의 내면'을 형성할 수 없다; 순전히 인간의 언어가 기존의 언어를 모방하는 과정 없이는 형성될 수 없다는 점 때문에라도 그러하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육체적인 활동과 사교적인 관계형성의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는 오늘날의 대도시에서 결코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게임을 통해 가상으로나마 신체를 움직이며 최초의 사회적인 경험을 한다--동시에 이러한 행위를 하는 법을 배운다. 예컨대 원사운드onesound가 그린 만화 중에서 어떤 연애시뮬레이션 애호가가 생애 최초의 소개팅과 데이트에서 자신이 게임에서 배운 경험을 응용하여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단순히 게임이 사회적으로 유용하다고 간주되는 협동과 경쟁 등등의 덕목을 가르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게임에서 나오는 내용을 수행하는 것이 어떠한 사회적인 행위를 수행해보는 최초의 경험이자 그 행위를 어떻게 수행하는가를 배우는 과정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다수의 게임들이 기존의 근대적 독서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반복적인 '실천'을 요구한다고 할 때, 그 실천의 양태들이 게임하는 인간의 몸과 정신에 새겨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오로지 표현의 자유와 자기통제의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만을 보내는--단적으로 "게임하는 사람들은 충분히 알아서 현실과 게임을 구분할 수 있다"는 류의--입장은 오히려 "게임이 애들의 정서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외치는 편협한 목소리보다도 현실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다. 문제를 진지하고 지적으로 다루는 태도는 게임을 단순한 유희로 간주하는 것, 잘못된 습관으로 간주하는 것 그 어느 쪽도 아니다. 현대인의 경험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은 게임의 경험, 그 안에서의 다양하고도 반복적인 실천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느 방향으로 자아를 빚어내고 또 움직이는지를 살펴야만 한다. subject가 그렇게 단단한 물건이 아님을 이미 잘 아는 이들에겐 더욱 그러하다.

3.

우리는 통상적으로 스스로가 자아에 포괄시키는 범위와 인간적인 성숙함을 동의어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은 미성숙하며 바로 곁의 존재를 챙길 수 있는 사람은 조금 성숙한 편이고, 가족, 지역공동체, 민족-국가 등등 누군가가 자기 자신의 염두에 두는 범위가 넓어질수록 그 사람은 보다 성숙했다는 식이다. 이러한 도식이 규범적인 가치를 지닐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그러한지는 조금 의문의 여지가 있다. 분명히 특정한 세대 혹은 집단에서는 인물의 성숙함과 그 인물이 배려하는 집단의 범위는 비례했다. 그러나 애초에 그러한 기준 자체가 주어지는, 주어지지 않는 문화적 집단이 있다고 보는 편이 맞지 않을까?(나는 이러한 척도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단지 사실의 차원에서 이러한 척도가 통용되지 않는 인간집단이 있음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특정한 집단에서 누군가가 성숙하다고 간주되는 것과 그가 배려하는 인간집단의 범위는 전적으로 무관할 수 있다. 오로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의 삶에만 집중하는 문화라고 한다면, 해당 문화에서는 앞서 들었던 기준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인정받는 데는 오로지 그 자신의 삶만이 척도가 될 것이다. 나는 때때로 한국 사회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집단적인 삶과 인간적 성숙을 연결시키는 틀을 버리게 되었다고, 혹은 어떠한 단절이 있어 그러한 결과를 낳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을 한다. 꽤나 여러 집단에서, 심지어 집단적인 삶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에서도, 누군가의 삶이 얼마나 많은 범위를 포괄하는가와 그에게 주어지는 사회적 인정은 별개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단순히 도덕적인 한탄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삶의 기초적인 규범 자체가 변모하고 있음을, 우리가 더 이상 새로이 도래할 세대를 이해하기 힘들어지고 있으며, 역으로 과거의 세대을 이해하기 힘들어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삶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협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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