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일-28일. 일기 및 시간강사법 관련 코멘트.

Comment 2015. 11. 30. 14:36

11월 27일 일기.


기쁜 소식 하나가 일감과 더불어 왔다.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용어를 물어보았는데, 제주도에 놀러갔다고 했다. 손전화 너머로 섬바람 소리가 거셌다. 창가 틈새로 겨울의 냄새가 새어들어왔다. 지인의 학위논문 계획에 관해 내가 할 수 있는 조언들을 했고, 몇 년 만에 우연히 마주친 후배에게 현 대통령이 YS의 장 중간에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우리의 흐릿한 미래를 별다른 걱정없이 걱정했는데, 아마 둘 다 웃음과 냉소를 같이 달고 사는 인간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이에 눈은 오다말다를 몇 번이고 반복했고, 밤의 어둠 사이로 창백하게 빛나는 가스등 곁으로 눈송이들이 다시 오지 않을 시간들처럼 흘러지나갔다. 옛 연애 이야기를 하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몸이 부르르 떨릴 때쯤 발걸음을 돌려 방으로 향했다. 바짝 깎은 머리 옆에 그대로 드러난 귀는 발갛게 발갛게 푸석거렸다. 내일 아침과 점심을 떄울 빵을 창가에 올려놓았다. 하얀 블라인드 아래로 겨울밤의 한기가 기어내려와 보일러를 튼 바닥을 횡단하여 발 끝을 얼렸다. 두꺼운 이불 속에서 마이클 하워드Michael Howard의 <유럽사 속의 전쟁>_War in European History_을 다 읽었다. 이따금씩 깡 깡 거리는 소리가 창 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주 잠시만 귀를 기울여도 그 소리가 겨울 특유의 음색을 지녔음을 알 수 있었다. 작년 선물받은 싸구려 수면양말을 신고 이불 밖으로 나왔다. 내일 세미나를 위해 귀족적 시민-인문주의자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가 나오는 장을 읽었다. 몸은 무겁고 일정은 빽빽한데 목을 빼고 연말의 행차를 바라본다. 마차 뒤꽁무니에 올라타고 뒤돌아보면 그제서야 지난 한 해의 부산스러움과 소득없음을 계산기로 두드려보게 되겠지만, 지금은 언제쯤 방학이 시작될지를 떠올려보다가 포기한다. 영하의 온도가 문득 서러운 지난 날들을 떠올리게 한다.


겨울밤은 그저 따뜻하게 잠드는 게 제일이다. 꿈을 선택할 수 있다면, 아무 꿈 없이 그저 깊게 잠들고 싶다.






11월 28일, 시간강사법 기사 관련 코멘트.

기사원문: [교수신문] 시간강사법 시행되면 고등교육 미래 없어
http://m.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1771 


(이하 나의 코멘트)


당장 내가 속한 학과 및 다른 학과에서도 엄청난 파급이 예상되고 있다. 별다른 대책 없이 현재의 법이 그대로 시행될 경우 몇 가지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데,


1. 시간강사 일자리의 급속한 축소. 박사학위취득부터 임용/연구소 취직까지의 수 년 간 대규모 박사급 실업자가 양산될 것이다. 대학 바깥에서 소득경로를 찾을 소수의 예외를 제외한다면, 가족 등의 경제력으로 뒷받침되는 경우가 아닌 한 상당한 인력이 경제력을 박탈당한다.


2. 기존에 임용된 교원의 노동강도 증대. 전임교원 강사 고용량이 줄어든다면 그만큼의 강의부담이 기존 교원에게 전가된다. 지금도 서울 시내 사립대학 교수들의 강의부담이 엄청난 상황인 경우가 잦은데(예컨대 교수 1인당 1년에 6-7과목을 소화해야 하는 사례가 이미 존재한다) 강의시수가 늘어날 경우 사실상 해당 교수는 강의도 연구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학계 전체의 지적인 질이 하락하며 수업의 충실성 또한 침해될 것이다. 정년트랙에 속한 교수 및 학부생들도 강사법 시행이 가져올 파급에서 비껴나 있지 않다.


3. 수료 이후 학위취득까지 강사를 통해 소득을 마련할 수 있는 일자리의 급감(당장 내 지인들도 여기에 걸리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인문사회처럼 학위논문작성에 긴 시간이 소요되는 경우, 강사 일자리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은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한국처럼 박사 수료 후 기댈 수 있는 장학금 지원이 매우 미미한 나라에서는 이걸 완충시킬 장치가 없다.


4. 결론적으로, 이 법이 시행되어 지속된다고 가정할 때 학계는 사실상 지적 능력과 무관하게 학위취득 및 임용 시까지 별다른 소득이 없어도 버틸 수 있는 (가족 등의) 경제적 배경을 갖춘 사람들만이 진입할 수 있는 영역이 될 것이다. 더불어 한국 대학의 박사과정은 (지금도 멀쩡한 곳은 드물지만) 초토화될 것인데, 유학생활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최대한 박사학위까지 기본적은 소득을 기대할 수 있는 (주로 미국의) 해외 대학에 진학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임을 곧바로 눈치챌 것이다. 랩에서 연구원으로 고용될 수 있는 이공계열 학과들을 제외한 인문사회의 박사수료 이후 전망은 절망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


솔직히 나 역시도 현재의 시간강사법이 그대로 지속될 경우 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지금까지 교육부는 한국 고등교육의 재생산 과정 개선에 그다지 좋은 성적을 남기지 못했는데, 시간강사법은 확실히 그 숨통을 끊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등교육 해체 및 포기라는 목표의 달성에서는 교육부(및 이 법의 개정에 무관심한 국회)가 보여준 빛나는 역할은 매우 인상적이다. 한국에서 돈 없는 이가 연구자로 사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만큼이나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이하 기사 본문 인용)


"시간강사법을 시행하게 되면 강사들도 전임교원이 되기 때문에 책임시수 9시간 이상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리고 1년 이상 계약하기 때문에 4대 보험과 퇴직금, 방학 중 강의료 지급 등의 재정지출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강사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대학이 비정년트랙 전임교원 제도를 철폐하고 정년이 보장된 법정 전임교원 확보율을 100% 충족시키지 않는 한, 겸·초빙교원을 교원확보율에 포함시키는 현 시행령이 없어지지 않는 한, 강사의 처우를 개선하기에 충분한 재정이 확보되지 않는 한, 시간강사 대량해고와 시간제 교원의 양산이라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에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강사법이 시행되면 대학원생의 미래도 사라지고 학문 재생산과 양질의 고등교육이 사실상 불가능한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시간강사법은 2012년과 2013년에 두 차례에 걸쳐 유예됐지만, 시행되기도 전에 대학은 이미 시간강사들을 해고하기 시작했으며, 비정년트랙 전임교원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시간강사법이 국회에서 통과된 이후부터 시간강사들의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그들 중 일부는 비정년트랙 전임교원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이번 설문조사에서 소속 대학, 대학 위치, 직급, 전공 등을 불문하고 모두가 비정년트랙 전임교원제도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시간강사법과 비정년트랙 전임교원제도는 모두 교육부가 고안한 것이다. 대학의 편법을 조장하고 당사자들 대부분이 반대하는 악법과 제도를 교육부가 앞장서서 만들고 확대하고 있다. 2016년 1월 1일로 예정된 시간강사법 시행은 당장 중단돼야 하고, 그동안 확대돼온 비정년트랙 전임교원제도는 정년보장 정년트랙 전임교원 제도로 올바르게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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