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2일 일기: 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고를 접하고

Comment 2015. 11. 22. 04:06
김영삼 전 대통령의 부고 앞에서 많은 이들이 복잡한 심경을 내비치고 있다. 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 죄수복과 백담사이기에(내 머릿속에서 그들은 영원히 하늘색 옷을 입은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사실상 내가 처음으로 그 직책을 분명하게 인식한 대통령은 고인이다. 큰 집에는 <논리야 놀자> 시리즈와 함께 고인을 등장시킨 유머집(물론 최불암 시리즈에서 이름만 바꾸었다)이 있었고, 나는 잦은 제사 때마다 둘 모두 읽고 또 읽었다. 유머집에서의 고인은 어리숙하고 친근한 인상이었다. OECD 가입을 앞두고 온 세계에 희망의 빛이 차오르는 것 같았고, 곧이어 짙은 어둠과 함께 IMF가 왔다. 칼국수는 갑작스레 조롱을 담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어머니는 남매를 앉혀놓고 아버지의 실직가능성을 이야기하며--다행히 몇 년을 더 버티셨지만--이제부터 무엇이든 아끼며 살아야 한다고 일렀다. 부도란 말을 배웠고, 음식을 남기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책과 먹을 것을 제외하고는 좀처럼 무언가를 사지 않는 습성이 몸에 배었다. 이후 김대중과 노무현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고인은 가끔 별 의미없는 막말을 내뱉곤 하는 증조부 이상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존중은 하지만, 별채에 가지 않으면 기억조차 하기 힘든 그런 어른처럼 말이다(고인의 정치적 삶을 짧게 정리한 기사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1220143221 참조).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고인을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 본 것은 7년 전 가을이다. 학교 발전기금에서 동문대상 모금을 위한 만찬을 열었고, 관련 행사에서 스태프로 일했던 나도 초대 받을 수 있었다. 식사 후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바닷길이 갈라지듯 주변 사람들이 벽으로 피했다. 머리를 검게 물들이고 검은 정장을 입은 고인이 등을 꼿꼿이 세우고 팔을 쭉 핀 채 걸어왔다. 내 삶의 어느 다른 누구도 비견되지 못할만큼 당당한 걸음걸이여서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곁을 지키는 경호원 서넛을 능히 거느리는 사람처럼 보였다(잠시 "IMF!"라고 외치고픈 마음이 들었으나, 고인에 대한 존중이라기보다는 행사에 대한 존중에서 그만두었다). 다음 해 5월 당시 20대가, 심지어 가장 격렬한 비판자조차도, 자기 세대의 대통령이라고 부를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인 노무현이 비극적으로 죽었고, 3개월 뒤 한국 현대 정치에서 비견될 이 없는 거물이었던 김대중이 세상을 떠나면서 98년부터 10년간 지속된 자유주의 진보의 정신적 헤게모니가 종말을 고했다. 6년 뒤 오늘 새벽 고인이 영면에 들었으니, 20여년 길이의 좀 더 긴 사이클이 마침내 닫힌 셈이다. 한국 정치에는 이제 더 이상 거인이 없다.

2008년부터 우리는 이미 난장이들만이 남아 활개치는 걸 볼 수 있었고(이명박 일가가 축적한 부는 우주에 한번쯤 다녀올만한 수준이겠지만, 그들에게 티끌만큼이라도 명예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12년 대선은 유령들의 대리전이었다. 한때 고인이 스스로의 거인됨을 보여주었던 장소는 아직도 세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70년대의 퇴물들과 이때를 틈타 어떻게든 개구리의 볼마냥 주머니를 부풀리려는 탐욕스러운 이들에게 조종당하는 속이 텅 빈 꼭두각시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 어떤 진정성도, 공적인 정신도, 정의와 공평함도 찾아볼 수 없는 2015년이 20년 전보다 뛰어난 점이 하나 있다면, 오늘날의 각료들과 집권여당은 미리 프로그래밍 된 절차에 따라 녹음된 막말을 반복해서 트는데 좀 더 뛰어난 자질을 보여준다는 것 뿐이다. 고인의 혼이 천상으로 뛰어오르는 와중 고개를 돌려 세종로와 여의도를 내려다보았다면, 그곳에 단 하나의 영혼도 남아있지 않은 살지도 죽지도 않은 시체들이 흐느적 거리며 상투적인 어구를 되풀이하여 읊고 있음을 보고 경멸섞인 분노감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인들의 시대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영도자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영구히 노예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하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인의 삶에서 적어도 두 가지 면모는 기억할 수 있다. 고인은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단식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고(이러한 결의는 오늘날에는 오로지 비정규직들과 해고노동자들만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다), 위험한 군부를 축출하기 위해 보여준 용기와 기민함, 결단력은 정부를 이끄는 시민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미덕이었다. 오늘날 모든 진지함이 과장된 제스처로 조롱받는 빈곤한 시대에 고인의 미덕은 자유로운 시민들의 민주적인 공동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인도하는 불빛과 같다. 고인의 굴곡 많은 삶은 민주공화국의 기억이 더욱 더 소중해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더욱 귀감이 된다.

삼가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워즈워스의 시 한 편을 붙인다.


"London, 1802"

Milton! thou shouldst be living at this hour:
England hath need of thee: she is a fen
Of stagnant waters: altar, sword, and pen,
Fireside, the heroic wealth of hall and bower,
Have forfeited their ancient English dower
Of inward happiness. We are selfish men;
Oh! raise us up, return to us again;
And give us manners, virtue, freedom, power.
Thy soul was like a Star, and dwelt apart:
Thou hadst a voice whose sound was like the sea:
Pure as the naked heavens, majestic, free,
So didst thou travel on life's common way,
In cheerful godliness; and yet thy heart
The lowliest duties on herself did lay.





고인에게 이토록 "너그러운" 추도를 남긴 것에 놀라움을 표한 분이 계셔서, 내 입장을 설명한 댓글을 덧붙인다.


"우리 세대에서 그의 단점과 실패가 무엇이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그걸 지금 되풀이할 이유는 없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은 그러한 사람조차도 보이지 않는 2015년 박근혜 정부 통치기니까요. 이 글을 단순히 너그러움의 산물이라고 느끼셨다면, 제가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거라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정치가 하나의 위대한 소명으로 존재하던--적어도 그렇게 생각되던--때가 있었고, 이제 그 시대의 마지막 증인이 사라졌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의 추도는 한 개인의 영광과 실패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한 시대의 정신을 향합니다.

덧붙여, [고인이 현 대통령을 평한] "칠푼이"는 악다구니라기보다는 진심으로 그렇게 평가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자부심 강한 YS라면 자신의 시대와 비교할 때 현 대통령의 격이 (요즘 시쳇말로 하면 "클래스가") 다르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느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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