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감벤과 푸코 통치이론의 관계에 관하여

Critique 2015.11.11 01:05

이 글은 토마스 렘케의 <생명정치란 무엇인가> 독서노트에(http://begray.tistory.com/307) 대한 부록으로 쓰기 시작했으나 길이로 길어져 별개의 글로 남긴다. 독서노트를 참고하지 않아도 푸코와 아감벤에 대한 흥미만 있으면 읽을 수 있는 글이다.

 

(원서 기준 12쪽 밖에 안 되는 분량에 상세한 설명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생명정치란 무엇인가>에서 렘케가 아감벤을 다루는 부분은 조금 아쉬운 감이 있다. 렘케는 아감벤의 (명백한) 약점들을 지적하고 그가 푸코를 갱신하는 대신 어떤 지점에서 아이까지 내다버리는가를 잘 설명하지만, 아감벤이 권력과 통치의 문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 푸코가 말하지 않은 지점을 사고하는데 분명히 기여한다는 것은 무시한다(4장은 아감벤의 설명을 난타한 다음 마지막 문단 하나에서 선심쓰듯 아감벤의 장점을 무미하게 나열하는데, 이게 기본적으로는 형식적인 선심쓰기 수준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나는 푸코와 아감벤이 특히나 통치의 문제라는 좀 더 커다란 틀에서 상호보완적인 설명을 제공한다는 사실을 짧게 덧붙이고 싶다.

 

통치자의 권력행사의 정당성을 논의하는 고전적인 시선에 따르면, J. G. A. 포칵이 지적한 바와 같이, 사법(jurisdictio)과 통치(gubernaculum)라는 양극을 가진 스펙트럼을 상정할 수 있다(포칵을 다룬 이 블로그의 게시물을 참고하라 http://begray.tistory.com/305). 한쪽에는 통치자가 어느 순간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어디까지 행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일반적인(어느 때나 지켜야 하는) 규범으로서의 법이 있다. 법은 권력행사에 대해 외적인 한계선을 긋는다. 다른 편에는 법으로 정해지지 않은 지점들, 즉 전례가 없는 일이거나 너무 사소한 일, 변화무쌍하기에 일반화된 법규범으로 정할 수 없는 일을 처리하는 통치가 있다. 단적으로 전쟁상태, 국가의 승리를 위해 어떤 행위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지 사전에 합의할 수 없는 시점에 통치자의 통치행위는 엄청나게 넓은 재량을 갖는다. 통치의 문제는 전쟁 및 국가경영을 위한 순간에 더 나은 행위가 무엇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의 불분명함에 있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양자의 관계는 계속해서 변모해왔다. 특히나 중세의 정치사상에서 볼 수 있듯 법은 종종 귀족들에 대한 왕의 (아직 충분히 강한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했던) 통치행위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보댕, 홉스, 로크와 같은 저자들에서 볼 수 있듯 근세에 이르면 점차 법은 통치자 혹은 주권자의 과도한 권력행사를 제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하게 된다.

 

서구에서 17-18세기는 주권자의 통치권에 대해 푸코가 각각 루소의 길과 벤담의 길이라고 불렀던 두 가지 서로 다른 방향의 제약이 걸리는 시점이다. 루소의 길은 사법적 전통에 따라 법과 권리의 언어로 주권의 통치를 제약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로크의 <통치론>에서 볼 수 있듯, 주권은 왕의 손에서 나꿔채져 인민에게 귀속되며, 모든 인민은 침해불가능한 자연권/시민권/천부인권을 가지고, 모든 권력행사는 기본적으로 인민 혹은 시민사회의 위임을 받은 입법자들이 설정해놓은 법 규범의 테두리 안에서 작동한다. 물론 로크도 전쟁 시와 같은 순간에 법을 초월하는 권력의 행사를 인정하지만,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비하면 그러한 영역은 매우 신중하게 축소되어 있다. 주권(국가권력)이라는 거대하고 개인 따위는 그 앞에 서면 언제든 납작하게 짓눌릴 수 있는 힘을 어떻게 사슬에 매어놓을 것인가가 이러한 사유의 핵심이며(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는 심지어 법을 다루는 이들에게조차도 이러한 문제의식이 기본적인 것으로 자리잡히지 않았지만, 이것은 근대시민사회의 핵심적인 질문 중 하나다), 어떤 면에서 칼 슈미트와 같은 이들의 문제의식은 이것의 전도된 형태--약해진 주권에게 어떻게 그 초월적인 힘을 되돌려줄 것인가--라고도 할 수 있다.

 

사법적인 것이 권력이 "하지 말하야 할 것"에 대한 외적인 제한이라면, 푸코가 강조하는 벤담의 길은 통치에 훨씬 내재적인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것은 통치행위를 평가하는 새로운 기준으로 잘하고/못하고의 언어를 도입한다. 비유하건대, 달리기 선수가 있다면, 그가 경주를 마무리할 때까지 실격하지 않기 위해 지켜야 할 각종 규칙들이 사법적인 것이라면, 벤담의 길, "효용"(utility)의 길은 그 선수가 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지켜야 할 다양한 기술들(식습관, 자세, 훈련강도, 체온조절, 심지어 성생활과 심리적 문제에 이르기까지의 기나긴 목록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좋은 기록을 내기 위해서라면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벤담의 길은 새로운 형태의 '규범'을 제시한다. 국가의 경우 도시계획처럼 명확한 사례부터 시작해 산아제한 캠페인, (푸코가 생명정치의 핵심적인 기제로 꼽는) 인구 관리, 시장의 유동성 조절, 생태문제, 치안 개선까지 등 "더 강하고 효율적인 국가가 되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들을 꼽을 수 있겠다. 더 효율적인 통치와 그렇지 않은 통치가 있고, 국가는 전자를 실현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과제들을 부여받는다.

 

푸코는 특히 18세기에 중농주의자들을 기점으로 해서 국가의 통치행위를 제약하기 위한 내적인 합리성의 규범으로 시장경제에 대한 '과학적' 관념이 등장한다고 설명한다. 효율적인 통치행위가 이루어지려면 시장메커니즘이 알아서 잘 굴러갈 수 있도록 국가권력은 손을 떼어야만 한다. 당장의 손익에 급급한 왕/정부의 부적절한 개입은 시장의 마치 생태계 내 물의 순환처럼 자연스러운 작동방식을 교란시켜 더 큰 손해를 초래할 따름이다.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초반부에서 푸코가 '자연과학적 개념으로서의' 시장경제를 포함한 "자유주의"가 국가권력을 제약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설명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주권의 거대한 권력은 시장 앞에서 멈추고 쪼그라든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들은 주권/국가권력의 통치권을 단순히 제약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과제들을 위해 근대국가는 이전과 비교할 때 훨씬 더 넓은 범위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치안을 위해 CCTV를 곳곳에 설치함으로써 시민들의 삶을 훨씬 더 면밀히 지켜볼 수 있게 되었고, 국가보안을 위해 휴대전화와 이메일에 대한 감청을 실시함으로써 사적인 대화까지도 언제든지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활성화를 이유로 다양한 사업을 규제하거나 지원하며, 보건분야에서 마음만 먹으면 거의 모든 국가구성원의 이동경로를 추적하고 제약할 수 있다. 오늘날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행정기구는 과거 절대주의 국가의 왕이 행사하던 신성화된 통치권 따위는 가볍게 비웃을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더 효율적이고 편리한 사회"를 위해서는 왕보다도 훨씬 더 손쉽게 법을 우회할 수 있다. "살게(번식하고 번영하게) 만드는 권력""죽일 권리"보다 압도적으로 크다.

 

생명정치는 이처럼 근대화된 통치행위를 위한 중요한 토대를 구성한다--행정기구는 시민사회의 '생물로서의 삶'에 대한 엄청난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하고 이에 기초해 시민들의 생명에 대규모의 통치행위를 실천할 수 있다. 주체에 대한 훈육과 인구에 대한 조절로 특징지어지는 푸코적 권력이론은 어떻게 국가의 행정적인 권력이 생명정치라는 형식을 통해 점점 더 넓고 깊게 시민사회로 침투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하는 역사적 이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푸코에게서 "미시적 권력"만을 강조하는 입장은 명백한 오독이다; 푸코가 미시적 권력장치들이 배치되는 방식에서 권력의 거대한 작동을 읽어낼 수 있다고 보았다는 쪽이 더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푸코의 논의가 주로 국가권력이 행정 혹은 내치police를 통해 어떻게 국가 안의 시민사회에 개입하게 되었는가를 설명한다면, 주권권력과 생명정치에 대한 아감벤의 권력이론은 푸코에게서 상대적으로 경시되어 있던 주권의 측면, 특히 자신의 적을 "죽일 권리"를 가진 점에 주목한다(물론 <호모 사케르>의 후반부에서 볼 수 있듯 아감벤은 생명정치가 시민사회 내부에서 작동한다는 사실 역시 언급하지만, 기본적으로 그의 초점은 주권이 어떻게 먹이를 찾느냐에 있다).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의 핵심으로 적과 동지의 구별을 꼽은 것은 푸코와 아감벤의 주안점을 개략적으로 파악하는 데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 동지, 요컨대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에 중점을 둔 시민사회를 어떻게 더 잘 길러내고 번식시킬 것인가가 행정적/내치적 생명정치의 주 관심사라면, (적어도 <호모 사케르> <예외상태>에서) 아감벤이 강조하는 주권적 생명정치의 핵심은 주권권력이 무제약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의 "벌거벗은 생명"(bare life, zoê)이 항존하게 되는 논리적 메커니즘에 있다.

 

아감벤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앞서 사법과 통치의 고전적인 구별을 다시 유용하게 참조할 수 있다. 사법의 기능이 권력이 따라야 할 일반규칙을 만드는 것이라면, 근대시민권은 사법을 통해 권력이 개인의 삶에 침입할 수 없는 영역을 만들어낸다; 생명보존의 권리, 재산권, 거주이전의 자유, 직업의 자유, 표현의 자유, 사상의 자유 등등. 요컨대 시민적 삶(bios)을 살아가는 한 우리는 법을 통해 제한적으로나마 '통치로부터의 안전'을 획득할 수 있다(강대국의 시민인 경우 적절한 절차를 걸쳐 외국에서도 해당 국가의 권력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다). 아감벤은 이것을 정 반대로 뒤집어 보여준다. 고대의 '성스러운 인간'(homo sacer)처럼, 시민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인간존재는 주권적 권력 앞에 완전히 발가벗겨져 먹이로 주어진 셈이다--우리가 입고 있는 것은 주권의 통치/권력행사로부터의 안전복이다. 어느 국가로부터도 시민권을 보증받지 못하는 난민, 관타나모 수용소에 갇힌 ('전쟁포로'가 아닌) '적 전투원', 나치 독일이나 북한, 소련의 수용소 수감자와 같은 존재들은 문자 그대로 주권권력의 자의적인 권력행사에 전적으로 노출되어 있고, 주권권력은 이들을 어떠한 법적인 제약도 받지 않고 문자 그대로 "살아있는 물질 덩어리"(biomass)처럼 다룰 수 있다. 이것이 아감벤이 말하는 주권권력의 생명정치다.

 

또 다른 강조점은 특히나 20세기부터의 근대국가에서 주권권력이 점차적으로 법적인 제약을 우회하거나 무력화시키는 영역을 늘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외상태" 혹은 "비상사태"를 통해 슈미트가 주권자가 의회와 법을 정지시키고 새로운 법 질서를 만들 수 있음을 강조했다면, 아감벤은 바로 그러한 순간에 주권자가 의회에도, 법에도 구속받지 않는 초법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문자 그대로 괴물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조지 W. 부시 주니어가 의회의 개입을 회피하는 수단을 남용한 것은 중요한 사례다).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진압을 위해 무장한 군대를 투입한 전두환 전 대통령처럼 말이다. 전두환의 목표가 시위대를 몰살시키는 것이었다면, 나치나 일본제국은, 나아가 오늘날의 국가권력은 인간을 생물자원으로 간주하여 활용할 수 있다. 각종 생체실험과 같이 '의학적' 목적을 위해서든, 노동력을 극단적으로 갈취하고 시체로 비누를 만드는 식의 '경제적' 목적을 위해서든 말이다. 그리고 아감벤은 이러한 '생명정치적 실천'이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고 말한다. 이때 생명정치는 푸코가 관찰한 "살리는(번식시키는) 권력"과는 달리 주권국가가 자신의 적/먹이를 "죽일 권리"에 입각하여 활용된다.

 

여기에서 아감벤과 푸코가 가리키는 대상이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법과 통치의 분할에서, 통치가 어떻게 내적인 합리성을 확보하고 또 그것을 통해 생명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는지를 추적하는 게 푸코의 주 관심사였다면, 아감벤은 통치가 어떻게 사법의 테두리를 무력화시키고 외적인 한계에 구속받지 않는 초법적인 영역을 만들어 내어 그 안에서 생명정치를 실천하는지를 주목한다. 푸코는 국가에 현미경을 들이대어 어떤 실체로서의 국가가 아닌 다종다양한 실천 및 장치들의 배열을 본다면(이것이 종종 푸코가 국제관계에 무감각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감벤은 주권/국가권력이 하나의 실체로서 작동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푸코는 국가의 내부에서 보려고 했고 그래서 사법적인, 주권적인 권력이 말하지 않는 행정적 통치를 들춰내었다면, 아감벤은 국가의 바깥에서 법적인 논리와 긴밀히 결부된, 혹은 사법을 기만하는 주권의 문제를 보려고 했다. 따라서 우리는 양자가 사법적 시각을 비판할 때 실제로 완전히 다른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아감벤이 법적인 것의 관점에 여전히 집착한다는 렘케의 비판(108)은 이 점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아감벤은 법적인 논리 위에서 만들어지는 독특하지만 필연적인 역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고, 이는 법이 손대지 못하는 영역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양상을 보는 푸코의 시선과는 다른 방향의 시선이다. 이런 점에서 양자는 상호보완적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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