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주트. <20세기를 생각한다>, <지식인의 책임>,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Reading 2015. 11. 6. 15:31

토니 주트&티머시 스나이더. <20세기를 생각한다>. 조행복 역. 열린책들, 2015. Trans. of _Thinking the Twentieth Century_ by Tony Judt with Timothy Snyder, 2012.

토니 주트.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자유시장과 복지국가 사이에서>. 김일년 역. 플래닛, 2011. Trans. of _Ill Fares the Land_ by Tony Judt, 2010.

---. <지식인의 책임: 레옹 블룸, 알베르 카뮈, 레몽 아롱...지식인의 삶과 정치의 교차점>. 김상우 역. 오월의 봄, 2012. Trans. of _The Burden of Responsibility_ by Tony Judt, 1998.

 

토니 주트의 국역된 남은 책들을 읽었다. 짧은 독서노트를 남긴다. 이걸로 지금까지 한국어로 번역된 주트는 다 읽었다. 탁월한 저자의 책 여러 권을 괜찮은 한국어로 몰아서 읽을 수 있는 건 그 자체로 행복한 일이다.

 

<20세기를 생각한다>는 내 생각에 한국어로 번역된 주트의 저술들 중에서 두 번째로 중요하다(첫 번째는 당연히 <포스트워>). 한국어로 주트를 일별한 독자들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듯(이제부터 내가 주트의 저술들을 이야기할 때는 한국어로 번역된 것들만을 지칭하겠다), 90년대 후반에 집필된 <지식인의 책임>을 제외한 다른 책들은 대부분 2000년대 초반부터 2010년 주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출간된 글들이라 내용 및 관점이 사실 상당히 겹친다(사실 <지식인의 책임>도 그렇다). 뛰어난 역사가다운 박식함과 명료한 논지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것 때문에 독자들은 자신이 직전에 읽은 내용을 새롭게 붙잡은 책에서 또 마주하게 된다. <20세기를 생각한다>는 그러한 동어반복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그중에서 가장 숙고할 지점을 많이 제공한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이 책의 독특한 집필형식에서 기인한다. 서문과 후기를 제외한 총 9개의 장은 모두 주트의 (개인적인 삶과 학적인 관심사가 섞인) 회고담으로 시작한다. <포스트워>, <재평가>, <기억의 집>과 같은 다른 텍스트들과 공유하는 지점이 많은 회고가 어느 정도 그칠 때쯤 티머시 스나이더의 질문이 기습적으로 끼어든다. 그 자신이 뛰어난 동유럽/중부유럽 현대사 연구자이기도 한 스나이더는 단순히 호의적인 태도로 더 많은 내용을 끌어내려는 청취자에 머무는 대신 자신의 견해를 갖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논쟁을 촉발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독자들이 잘 정리된 주트의 회고담을 읽는 것만으로도 지적 포만감을 느낄 법 한 순간에 스나이더의 질문이 파고들면서 아직 언급되지 않은 중요한 주제들이 많으며 때로 주트의 입장이 불확실한 근거 위에 정초되기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그리고 주트는 그런 점들을 흔쾌히 받아들일만큼 성숙한 저자다). 솔직히 말해 <포스트워>를 제외한 다른 책들은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기에 독자에게 그다지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는다; 현대 서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역사적 지식만 있다면 주트의 책을 이해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20세기를 생각한다>는 확실히 '지적인' 자극을 주는 순간들이 있고, 적어도 내게는 이때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주제들에 대한 사고를 촉발했다(지금 읽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지만 않다면 한번 더 읽어야겠다고 생각이 들 정도다).

 

<포스트워>가 국제정치경제적인 측면에 가장 많은 공을 들인 작품이었다면, <20세기를 생각한다>는 지성사, 특히 '지식인'이라는 주제에 깊이 있는 진술들을 다양하게 제공한다(물론 우리는 애초에 주트의 학자로서의 경력이 지성사 쪽에서 출발했음을 상기할 수 있겠다). 1장은 2차대전 이전의 중부/동유럽의 유대인 지식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검토하고 20세기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홀로코스트를 포함해 "유대인 문제"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은 맥락을 살핀다. 2장에서는 20세기 전/중반부에서 걸쳐 영국의 대학 및 지식인에 대한 스케치를 제공하며, 3장은 맑스주의를 다룬다(당연하지만 비판적이다). 4장은 키부츠 경험에서 시작해 현대 미국의 시오니즘이 홀로코스트의 교훈을 망각하게 하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주장으로까지--스나이더와의 의견충돌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이어지며(주트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전쟁에 비판적인 유대인이다), 매우 흥미로운 장이기도 한 5장에서는 6-70년대 프랑스의 지적 환경 및 주트 자신의 경력을 회고하다가(그는 프랑스 고등사범학교에서 박사논문을 썼고 이후 프로방스 지역에 대한 사회사적 연구를 수행했다) 스나이더의 질문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파시즘, 반파시즘, 공산당에 대한 이야기로 들어간다. 양차 대전 사이 파시즘, 특히 파시스트 지식인들에 대한 주트의 언급은 그가 독일만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나아가 중/동유럽의 사례까지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같은 독자들에게 매우 새롭고 중요하게 읽힌다. 몇몇 대목을 인용하자.

 

"마르크스주의자들에 관해 얘기할 때는 개념에서 시작할 수 있다. 파시스트들은 실제로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파시스트가 갖고 있는 것은 태도이다. 파시스트는 전쟁과 불경기, 후진성에 독특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파시스트는 일련의 관념들로 시작한 뒤 이를 세상에 적용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213). "파시스트들은 파시즘 자체와 비슷하다. 내용보다는 스타일과 그 적에 비추어 볼 때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던 것이다"(229). "공산주의자들은 끝까지 권력이 선하다고 믿었다. 옳은 신조로 적절히 포장한다면 권력에 호소하면서 굳이 변명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아무런 변명도 없이 권력을 아름다운 것으로 제시한다면? 그렇다, 그것은 파시스트만의 독특한 점이다"(222).

"당연히 파시즘은 여기에서 생긴다. 국가는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행동해도 된다는 관념 말이다. 필요하다면 화폐를 찍어 내고 필요한 곳에 비용과 노동자를 다시 할당하며 몇십 년 동안 성과가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기반 시설 사업에 공적 자금을 투자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 자체가 파시스트적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생각은 좀 더 정교한 형태로 곧 케인스의 저작과 연결된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오직 파시스트들만이 이러한 생각을 채택하는 데 관심을 두었다.

독일에서 케인스 이론과 뉴딜의 경험을 채택한 사람으로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자는 햘마르 샤흐트Horace Greely Hjalmar Schacht였다(그가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묵인했다는 사실을 잊는다면). 부분적으로는 이런 이유 때문에, 파시즘은 존중받을 만했을 뿐만 아니라 1942년까지 상당히 많은 혁신적인 경제적 사고를 보호한 제도적 우산이었다. 파시즘은 국가를 이용하는 데 제약이 없었으며 정치적 장애를 뛰어넘어 과격한 정치 혁신을 가져왔고 공공 지출에 대한 인습적인 규제를 기꺼이 초월했다. 그러나 뒤이어 파시즘이 적자를 보전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외국을 정복하는 데 맛을 들였음을 주목하라"(226).

"20세기를 옳게 이해했던 자들은, 카프카처럼 미리 내다보았던 자든 당대의 관찰자들이든, 전례가 없었던 세계를 떠올려야 했다. 이들은 언뜻 보기에 불합리한 이 전례 없는 상황이 실제라고 생각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것이 너무 기괴하여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20세기를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당대인들에겐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253).

 

6장은 현대 동유럽사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한 계기와 함께 2차 대전 이후 냉전기 유럽의 좌파 및 자유주의자를 다룬다. 7장은 미국의 뉴욕대 재직시절부터 시작해 역사학, 역사기술, 역사교육의 주제에 대해 주트의 입장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개인적으로는 5장과 함께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다)--그는 역사가와 역사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사람들에게 무엇을 전달해야 하는가를 질문한다는 점에서 여기서도 강력한 규범적인/윤리적인 면모를 보인다. 8장은 그가 미국에서 서평가/칼럼니스트로서 공적 여론의 장에서 활동하면서 겪은 일들을 다루는데(주트는 이라크 전쟁 비판 및 시오니즘 비판으로 매우 논쟁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결국 핵심적인 주제는 오늘날 한국에서 잊혀졌기에 소중한 지식인의 의무에 관한 것으로 귀결된다; 어떤 면에서 주트의 삶은 자신이 연구해온 대상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고까지 이야기할 수 있겠다. 9장은 미국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을 포함해 주트의 사회민주주의적 견해를 보여준다(우리는 적어도 이 대목에서는 주트에게 가장 중요한 모범이 케인즈였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번역은 전반적으로 무난하나 종종 잘 읽히지 않는 문장들이 나온다(특히 스나이더 및 글 말미에 부록으로 실린 홉스봄의 글이 그렇다). 가끔은 좀 더 천천히 교정을 봤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게도 한다.

 

 

<지식인의 책임>은 본래 강좌에서 출발한 내용이라 서술 자체는 평이하고 번역도 그럭저럭 잘 읽힌다. 전간기 프랑스의 정치가 레옹 블룸, 소설가 알베르 카뮈, 프랑스 냉전기의 자유주의 철학자/사상사가 레몽 아롱을 다룬다. 주트 자신이 프랑스의 수정주의 혁명사가 프랑수아 퓌레를 언급하는 데서 시작하는 걸로 알 수 있듯, 주트가 강조하는 이 셋의 공통점은 기본적으로 좌파 맑스주의자/공산주의자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관철했다는 데 있다. 인물의 전기 및 저술을 다루는데, 카뮈는 <재평가>에 실린 글과 많이 겹치긴 하지만 블룸과 아롱은 전공자가 아니고서는 한국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았던 이들이라 그 자체로 흥미롭다(개인적으로 아롱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다만 한국인의 입장에서 한 대목만 인용하자.

 

"1차 세계대전 종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프랑스의 공적인 세계를 만들기도 했고 망치기도 했던 주범은 세 가지의 얽히고설킨 집단적 개인적 무책임 형태들이었다. 그것들은 무엇보다 정치적인 형태를 띠었다. 양차 대전 사이의 프랑스 역사를 읽노라면, 국가를 통치하고 시민을 대표하는 인간들의 무능함, 태평함, 욕을 먹어도 아깝지 않을 정도의 방만함을 끊임없이 목격하게 된다. 당파적인 측면에서 정치적으로 관찰한 결과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관찰한 결과다. 모든 당의 하원의원과 상원의원, 대통령, 수상, 장관, 장군, 공무원, 시장, (공산당부터 군주를 지지했던 정당까지) 당의 간부 등 모두가 자기가 사는 시대와 장소를 놀라울 정도로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인가 주장할 게 있을 때 그들은 정책을 내걸었지만, 편협할 정도로 당파적으로 행동했다. 예컨대 그들은 공동체의 작은 분파의 전통과 이익에 의존했으며, 선거나 공직을 위해 출마할 때도 분파 이외의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25-26).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원제 "Ill fares the land"18세기 올리버 골드스미스Oliver Goldsmith의 시 "버려진 마을"["The Deserted Village"]의 한 대목으로, 직역하면 이 땅은 나빠지고...쯤이 되겠다)는 주트의 저작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책은 아니다. 주트는 사회민주주의자의 입장에서 미국이 신자유주의 이후 어떻게 잘못된 길로 들어서고 있는지를 직접적으로 비판하는데, 특히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이 사회와 공공성을 무너트린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사회민주주의-도덕경제의 오래된 전통에 합류한다(이 책에서 케인즈는 물론이고 주트가 지금까지 통렬하게 비판해온 E. P. 톰슨이 짧게나마 호의적으로 인용된다는 사실은 재미있다). 최종적으로 주트가 지지하는 결론은 사민주의적 경제제체를 토대로 공적인 사회를 다시 구축하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그 자신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주트의 입장에서 공화주의적 태도를 읽어낼 수 있다. 번역은 깔끔하고 서술은 평이하기에 이런 종류의 입장에, 그러니까 신자유주의 이후의 사회비판에 이미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주트가 그 어느 저술에서보다도 강력한 윤리적/도덕적 성향을 드러낸다는 점을 제외하고) 특별히 어렵게 읽힐 점은 없다. 역으로 이런 주제에 처음 입문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명쾌하게 논거를 마련해주는 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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