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 <고백>, <대화>, <몽상>. 간략한 정리 및 인용

Reading 2015. 8. 22. 04:31

장 자크 루소. <고백>. 1764-70. 2. 박아르마 역. 책세상, 2015. [책세상 루소전집 1,2. Trans. of Les confessions by Jean-Jacques Rousseau. 번역대본은 갈리마르Gallimard 판 루소 전집 1]

---. <루소, 장 자크를 심판하다--대화>. 1772-76. 진인혜 역. 책세상, 2012. [책세상 루소전집 3. Trans. of Rousseau juge de Jean Jacques. Dialogues by Jean-Jacques Rousseau. 번역대본은 갈리마르 판 루소 전집 1]

---.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 말제르브에게 보내는 편지 외>. 1776-78[<몽상>의 집필년도]. 진인혜 역. 책세상, 2012. [책세상 루소전집 4. Trans. of Les Rêveries du promeneur solitaire by Jean-Jacques Rousseau. 번역대본은 갈리마르 판 루소 전집 1]

 

: 루소의 '고백' 3부작, <고백>, <대화>, <몽상>을 읽었다(<고백>의 초기 기획이라고 할 만한 "말제르브에게 보내는 편지"까지 포함하면 4부작). 8월 중순이 되기 전에 읽은 것 같은데 정작 다른 일들에 치여 지금에야 간단하게 기록을 남긴다(마이네케를 포함해 읽고 정리하지 못한 책이 쌓여 있다). 방대한 분량을 생각한다면 인용구를 찾아내어 타이핑한다거나 하는 건 무리일 듯 하고, 흥미로웠던 몇 가지 지점들을 지적하는 것 정도로 만족하려 한다. 책세상 국역본은 전부 한국어로 읽는데 무리는 없다. 주석의 충실함은 학술전집이라 불리기엔 다소 미달한다는 인상이 있다(그나마 진인혜 선생의 주석이 제일 충실해보인다). 아직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가 국역되지 않은 게 조금 아쉬운데--루소와 공화국, virtue 이야기를 할 때 상당히 중요할 것으로 예상된다--출간예정에는 들어있으므로 기다리는 중이다.

 

1760년대 초 <신 엘로이즈>, <에밀>, <사회계약론>으로 저자로서의 절정기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던 루소는 바로 그 <에밀>이 금서로 지정되고 신변에 위협을 느끼면서 프랑스를 떠나 떠도는 생활을 시작한다(고향인 제네바에서도 매우 격렬한 반응이 있었기에 루소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루소는 자신이 박해받는 까닭으로 자신을 시기하고 증오하는 다른 이들이 연계하여 자신을 괴롭히려는 음모가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그러했는지 혹은 루소 본인이 일종의 망상에 빠진 것인지는 다른 연구를 참고해서만 분별할 수 있겠지만--나는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루소는 이런 '음모'에 대항해서 스스로의 결백을, '투명성'을 입증해야 한다고 강박에 가깝게 생각했다. <고백>이 이를 위해 스스로의 인생을 은밀한 지점들까지 가능한한 투명하게 서술하려는 노력이었다면, <대화>는 자신의 인격과 저술에 가해지는 비판을 나열하고 그러한 해석이 틀렸음을 주장하며 일일이 반론을 제기한다. 3부작 중에서도 가장 기묘하고 슬픈, 어떤 면에서는 섬뜩하기까지 한 <몽상>에서 루소는 반론이나 해명을 제시하는 대신 자기 자신의 내면의 서술 자체에 보다 깊이 침잠하는 모습을 보인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고백>이 매 순간 매우 뚜렷하게 독자를 의식하며 말을 거는 저자의 모습이고, <대화>(루소를 오해하는) 프랑스인과 그 오해를 벗겨내는 루소 본인의 대화라는 극적인 형식을 띤다면, <몽상>은 부분적으로나마 독자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주저앉은 채 중얼거리는 노인의 독백적 일기에 가까워진다--물론 나는 그가 완전히 청자로부터 자유로워졌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아의 확장이야말로 근본적으로 낭만적인 것이다.

 


<고백>은 출생인 1712년부터 40년까지 제16(국역본 제1), 파리에 와서 문필가로서의 명성을 얻고 끝내 다시 프랑스를 떠나는 41년부터 65년까지 제26(국역본 제2)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부의 분량이 1부의 1.5배 정도 된다. 어린 시절에 처벌을 받으면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처음으로 인식했다거나, 마리옹에게 리본 절도의 죄를 덮어 씌운 것, '엄마' 바랑 부인과의 (다자간 연애를 포함한) 독특한 관계, 테레즈와의 생활에서 아이를 전부 고아원으로 보낸 것 등의 이미 널리 알려진(!) 일화들을 굳이 여기에서 다시 언급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와 같은 자기 고백의 측면보다는 (마찬가지로 유명하지만) 자신의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은' 단독자적인 측면에 대한 강조, 자기 자신을 최대한 "온전하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는 욕구(1117), 사교적인 생활을 거부하며 혼자 있고자 하는 욕망(이는 사교성의 세기이기도 한 18세기에 명백히 반사회적인 욕망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러한 욕망과 끊임없이 충돌하는 성적 욕구와 강렬한 감수성, 그리고 플루타르코스와 같은 고전교육에서 기인하는(1123) 공화주의적 정신 등 루소의 독특한, 그러나 18세기적인 인성personality 혹은 성격character을 인식하는 쪽이 좀 더 풍요로울 듯 싶다.

 

상대적으로 덜 언급되는 주제를 포함해 <고백>의 서술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세 가지 주제를 꼽자면, 먼저 중간계급 답게 스스로를 평가함에 있어 '재능'에 대한 강조가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것, 그리고 음악 자체가 자신의 삶에 본질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심지어 우정도 음악을 통해 형성될 정도로!), 마지막으로 설령 자신이 기술하는 내용이 사실에 부합하지 않을지라도 자신의 감정이 진실한 이상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낭만주의를 예비하는) 정당화의 논법 등이 있겠다--누군가 충분히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일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8148). 그 외에도 혼자 있음을 선호하는 성향은 부분적으로 의무를 거부하는 자유로움에 대한 강한 갈망(1159),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를 거부하고 시골/자연을 찬미하는 윤리적-미학적 태도와 결부된다(16315, 호라티우스의 인용). 한편으로 공화국의 시민임을 강조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연과 고독을, 사회로부터의 자유를 희구하는 양가성이 그를 18세기의 가장 포괄적인 인물로 만든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솔직할 것을 강조하는 태도와 스스로의 욕망을 이겨내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 사이의 긴장 또한 마찬가지다(8188). 이는 고대의 텍스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루소의 '미덕'이 이제 그 자체에 근대적인 긴장을 품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나는 각 저자들의 책을 읽으면서 내 생각이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덧붙이지 않고 저자와 결코 논쟁도 벌이지 않으며 그의 생각 모두를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다. [...] 말하자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거의 이치도 따져보지 않은 채 그저 다른 사람의 견해를 따라서만 정확하게 생각하면서 몇 년을 보낸 끝에 나는 나 자신으로 충분하여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생각할 정도로 많은 지식의 토대가 갖춰졌음을 발견했다."(6330-31) / 로크를 향한 존경(2782). / "만일 내가 어떤 일로 사람들의 평판에 다시 굴복한다면, 머지않아 나는 모든 것에 다시금 복종하는 처지가 되고 말 것이다. 나는 항상 나 자신이 되기 위해 내가 선택한 상황에 따라 옷차림을 하는 것을 어떤 장소에서든 부끄러워해서는 안 될 것이다."(28148)

 

편견없는 정신의 "루소"와 편견에 빠진 "프랑스인"이 "J. J."에 대해 논평하는 <대화>는 몇몇 대목에서 루소의 인간학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자연nature이 마음 속에 따로 심어놓았지만 정념passion 때문에 억눌려 있는 공정하고 인간적인 감정을 찾아 되살릴 줄 안다면 말입니다."(첫 번째 대화, 28) "[완벽한 자연을 바라보면] 그것은 그런 감수성sensibilité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 즉각적인 즐거움을 줍니다. [...] 정념은 모든 행동의 원동력입니다. [....] 자연의 모든 첫 움직임은 선하고 올바른 것입니다. 그 움직임은 최대한 직접적으로 우리의 보존과 행복bonheur을 지향하지요. 그러나 많은 저항에 부딪혀 처음의 방향을 계속 유지할 힘을 곧 잃어버리고, 수많은 장애에 의해 굴절되고 맙니다. [...] 최초의 정념은 직접적으로 우리의 행복을 지향하고, 우리가 그 행복에 관계되는 사물들에만 집중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직 자애심Amour de soi을 원칙으로 삼고 있으므로, 모든 정념이 본질적으로 사랑스럽고 다정합니다. 그러나 장애 때문에 목표에서 우회하게 된 정념은 목표에 도달하기보다는 장애에서 벗어나는 데 더 전념합니다. 그래서 성격이 변하여, 조급하고 증오에 넘치는 정념이 되지요. 이렇게 해서 선하고 절대적인 감정인 자애심은 이기심amour-propre으로 변합니다. 이기심이란 다시 말해 서로 비교하고 더 좋은 것을 요구하는 상대적인 감정입니다. 그런 감정을 즐기는 것은 순전히 부정적인 것이고, 우리 자신의 행복보다는 타인의 불행으로만 만족하려고 하지요."(29-31) "이때 현명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음과 같은 것뿐입니다. 즉 최대한 군중으로부터 빠져나와, 초조해하지 않으며 우연히 정해진 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이지요. 행동하지 않으면, 최소한 실패를 향해 달려가거나 새로운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피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말입니다."(30) 강한 정념-강한 영혼-(31) / "그는 내가 아는 다른 어떤 사람과도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에요"(두 번째 대화, 154) /


 "감수성은 모든 행동의 원동력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활기가 있어도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면 행동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행동하는 동기가 무엇이겠습니까? 신도 행동하기 때문에 감수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에게는 감수성이 있습니다. [...] 우선 신체적이고 유기적인 감수성이 있는데, 이것은 순전히 수동적인 것으로서 기쁨과 고통의 관리를 통해 오직 우리 신체와 종의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듯이 보입니다. 또 다른 감수성은 내가 능동적이고 정신적인 감수성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바로 우리에게 낯선 존재에 대해 애착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능력입니다. 이것은 신경에 대한 연구로는 알 수 없는 것으로, 육체의 흡인력과 아주 흡사한 능력을 영혼에게 제공하는 듯합니다. 그 감수성의 힘은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느끼는 정도에 비례하고, 그 관계의 성격에 따라 상대를 긍정적으로 끌어당기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물리치기도 합니다. [...] 긍정적인 혹은 끌어당기는 행동은 우리 존재의 감정을 확장하고 강화하려는 본성의 단순한 활동입니다. 부정적인 혹은 물리치는 행동은 타인의 감정을 억압하고 축소하는 것으로, 심사숙고에서 나오는 결과물입니다. 전자에서는 정답고 다정한 모든 정념이 나오고, 후자에서는 증오하는 잔인한 감정이 나오지요. [...] 긍정적인 감수성은 자애심에서 직접 유래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즐거움을 확장하려 하고, 틀림없이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고 느끼는 것을 애착을 통해 차지하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 그러나 이 절대적인 사랑이 비교에 기반을 둔 이기심으로 변질되면 부정적인 감수성이 생겨납니다."(두 번째 대화, 191) "자연스럽고 좋은 정념을 인위적이고 나쁜 정념으로 바꾸는, 서로 비교하는 그 경향이 어디에서 유래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사회적인 관계, 생각의 진보, 정신의 연마에서 온다고 답하겠습니다. 절대적인 욕구에만 전념하면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추구하는 데 그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공연한 시선을 던지는 일이 없지요. 그러나 사회가 상호 욕구의 관계에 의해 긴박해짐에 따라, 정신이 확장되고 훈련되고 계발됨에 따라, 정신은 더 많은 활동을 하고, 더 많은 것을 파악하고, 더 많은 관계를 포착해 검토하고 비교합니다. 빈번히 비교함으로써, 정신은 자기 자신과 동료들과 동료들 속에서 자기가 바라는 위치를 잊지 않습니다."(192)


<몽상>에서 우리는 낭만적 자아가 고유의 공간으로 확장되고 비대화되어 의식을 뒤덮어가는 과정을 본다: "나는 나 자신을 탐구하고 나에 대한 보고서를 서둘러 미리 준비하는 데에 내 마지막 날들을 바치고자 한다. 내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달콤한 즐거움에 온전히 몰두하자. 그것만이 사람들이 내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니까." (첫 번째 산책, 21) "어떤 점에서는 물리학자가 매일의 대기 상태를 알기 위해 실험을 하듯 나 자신에 대한 실험을 행할 것이다. 즉 내 영혼에 기압계를 갖다 대는 것인데, [...] 실험을 체계화하려고 애쓰지 않고, 다만 기록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내 시도는 몽테뉴의 시도와 동일하다. 그러나 목적은 그와 정반대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수상록>을 썼지만, 나는 오직 나를 위해 내 몽상을 기록한다. [...] 그렇게 내 과거가 되살아남으로써, 이를테면 내 삶은 두 배로 늘어나리라.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여전히 친교의 매력을 맛볼 수 있을 것이며, 늙은 나는 마치 더 젊은 친구와 사는 것처럼 다른 나이의 나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22-23) / "사람들이 더 잘 알아주기를 바라는 욕망이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렸으므로, 내 진실한 글들과 내 결백을 보여주는 저작의 운명에 극히 무관심할 뿐이다. [...] 사람들이 내가 무엇을 하는지 염탐하든, 이 글에 대해 불안해하든, 이 글을 탈취해 없애버리거나 위조하든, 이제 아무 상관도 없다. 나는 이 글을 숨기지도 드러내지도 않을 것이다. 살아생전 이 글을 누가 내게서 빼앗아간다 해도, 이 글을 썼다는 기쁨, 그 내용에 대한 기억, 이 글을 낳은 고독한 명상, 내 영혼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근원이 절대 사라질 수 없는 그 고독한 명상은 내게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23) / 개와의 부딪힘, 꺠어나는 순간의 감미로움: "첫 느낌은 감미로운 순간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아직 그 정도의 지각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삶에 눈뜨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내 가벼운 존재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직 현재라는 순간만이 느껴질 뿐,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라는 개체에 대한 분명한 개념도 없었고, 조금 전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픔도 두려움도 불안도 느껴지지 않았다. 피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것이 내 피라는 것조차 생각하지 못한 채, 마치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보듯 보고 있었다. 내 전 존재에서 황홀한 평온이 느껴졌다. 그 후 그 순간을 떠올려볼 때마다 내가 경험한 모든 쾌락의 행위 중 그에 견줄만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두 번째 산책, 29) / 몽상으로 하나의 완전한 세계를 만들고 그에 침잠하는 것(다섯 번째 산책, 82-83)


"지식에도 실천을 하는 데도 전혀 쓸모없는 진실이라면, 어떻게 그것을 정당한 자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건 자산도 아니다. 소유property는 오로지 유용성에 근거를 두고 있으므로, 무용한 곳에는 소유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네 번째 산책, 55)


"나는 혼자서 구불구불한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 숲에서 저 숲으로, 이 바위에서 저 바위로 돌아다니다가, 평생 본 적이 없는 야생적인 풍경 안에 깊숙이 자리한 외딴 오두막에 이르렀다. 검은 전나무들이 거대한 너도밤나무와 어우러져 있었고, 그중 몇 그루 노목들이 쓰러져 얽히고설켜 넘기 힘든 울타리를 이루고서 오두막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두운 울타리 틈 사이로 보이는 저 너머에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와 무시무시한 낭떠러지 뿐이었는데, 배를 깔고 엎두려야 겨우 볼 수 있었다. 수리부엉이, 올빼미, 흰꼬리수리가 산간에서 울어대고, 희귀하지만 친숙한 작은 새들 몇 마리가 적막함의 공포를 가라앉혀주고 있었다. 거기서 나는 일곱 장의 이파리를 가진 미나리냉이, 시클라멘, 새둥지란, 커다란 라세르피티움, 그 밖의 몇몇 식물을 발견했고 그것들에 매료되어 한참 동안이나 즐거워 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여러 대상의 강한 인상에 압도당한 나머지 식물학이니 식물 따위는 잊어버리고 석송과 이끼 위에 자리를 잡고 앉게 되었다. 그리고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르는 은신처에 있으니 박해자들도 나를 찾아내지 못하리라 생각하며 마음껏 몽상에 잠기기 시작했다. [...] 별로 멀지 않은 곳에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이자, 똑같은 소리가 반복되며 더 커지는 것이었다. 나는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일어나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무성한 가시덤불을 헤치며 들어갔다. 그런데 내가 제일 처음 들어왔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곳에서 스무 발짝쯤 떨어진 작은 골짜기에 양말 공장이 있는 것이 아닌가."(일곱 번째 산책, 111): 근대에 고유한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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