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 <쥘리 또는 신 엘로이즈>. 정리 및 인용.

Reading 2015. 6. 14. 04:15

장 자크 루소. <신엘로이즈>. 1761. 전2권. 김중현 역. 책세상, 2012. [책세상 루소전집 5,6권. Trans. of Julie ou la Nouvelle Héloïse by Jean-Jacques Rousseau. 번역대본은 갈리마르Gallimard 판 루소 전집 2권]


 루소의 <쥘리 혹은 신엘로이즈>(이하 <쥘리>) 한국어역을 보았다. 18-19세기 전공자치고는 꽤 늦게 읽은 셈이고, 실제로 더 일찍 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먼저 국역본에 대해 간략하게 코멘트하자. 다른 책세상 루소전집과 마찬가지로, 번역은 무난히 읽히지만 그 수준과 별개로 판본 자체가 비평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쥘리>는 서문과 총 6개의 부(1부 편지65, 2부 편지28, 3부 편지 26, 4부 편지 17, 5부 편지 14, 6부 편지 13)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쪽에 몇 부 몇 번째 편지인지 전혀 표기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필요한 부분을 찾기 위해서는 별도의 표시를 해두어야만 한다. 역주는 인용출처 및 고유명사 소개를 간략하게 다루는 정도며 문학사 및 사상사의 주요 개념에 관한 설명은 없다. 이는 두 번째 권 말미에 붙은 20쪽짜리 역자해설에서도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전기적 설명에 할애된다. 18세기 서간체 로맨스 소설 전통에서 루소가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열정passion과 미덕virtue, 이성과 신앙 등과 같이 (당시 사회의 윤리 및 감정구조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서로 상반되는 가치들의 병치를 다룬 것이 어떠한 파급력을 끼쳤는지, <쥘리>가 루소의 다른 저작--단적으로 1년 뒤에 출간된 <에밀> 및 <사회계약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등 보다 넓은 맥락에서 루소를 이해하기 위한 물음들은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리오 담로시(Leo Damrosch)의 방대한 전기 <루소: 인간불평등의 발견자>Jean-Jacques Rousseau: Restless Genius(2005)의 17장이 <쥘리>에 할애되어 있으나 역시 루소의 개인사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은 감안한다면, 전문적인 연구로 들어서지 않는 이상 이 책을 다양한 사유전통들이 관통하는 역사적 장에 위치시켜 읽도록 안내받을 기회는 한국인 독자들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을 성싶다.


 각 대목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아래 인용정리 및 간략한 코멘트를 단 부분으로 대체하고 전체적인 요점만 잡아보자. 우선 (적어도 <고백> 3부작 이전에) <쥘리>가 <에밀>과 함께 루소의 가장 생산적인 시기를 대표하는 저작이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을 듯하다. 각각 1761년 및 62년(이때 <사회계약론>도 같이 출간되었다...나는 이 책을 공부량이 쌓이지 않은 채로 읽었기에, <에밀>과 <쥘리>를 읽은 뒤에 <사회계약론>을 보면 무엇이 시야에 들어올지 무척이나 기대된다)에 출간되었고 실제로 많은 사유를 공유하는 두 텍스트는 한편으로 독특한 인간형 혹은 '내면'의 한 전형의 형성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 안에 공간적으로도 광범위한 세계를 구축한다. 에밀은 프랑스를 떠나 외국을 돌아보며, 생 프뢰는 스위스, 프랑스만이 아니라 아예 세계일주를 하기에 이른다. 18세기 서유럽 서간체 소설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는 리처드슨Samuel Richardson의 두 작품, <패멀라 혹은 보상받은 덕>_Pamela: or, Virtue Rewarded_이나 <클러리사 혹은 젊은 숙녀의 이야기>_Clarissa: or, the History of a Young Lady_가 적어도 공간측면에서는 매우 협소한 세계 안에서 전개된다는 것과 비교하면 루소의 세계가 갖는 공간적 광대함이 더 잘 부각된다(물론 10년 뒤 영국에서 출간된 토비어스 스몰렛Tobias Smollet의 <험프리 클링커의 원정>_The Expedition of Humphry Clinker_을 보면 마찬가지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뿐만이 아니라 아메리카까지 등장한다). 세계의 '물리적' 크기와 함께 인물들의 행위의 다채로움도 지적되어야 하는데, 루소의 두 텍스트는 연애와 결혼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예술, 교육, 신앙, 경제, 공동체의 삶의 운용술과 같이 개인보다 더 큰 주체에게 허락되는 행위들까지 포괄한다. 역으로 로맨스 플롯에만 집중하는 독자들은 <쥘리>의 단순함에 지루함을 느낄지 모른다. 내 생각에 이 텍스트의 핵심은 로맨스 플롯이란 뼈대를 둘러싼 공간과 행위의 풍성함 자체로, 이 텍스트들을 일종의 백과사전적encyclopedic 서사라고 불러도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


 담로시도 지적하듯, <쥘리>의 전반부(1-3부)와 후반부(4-6부)는 사못 다른 느낌을 준다. 1-3부가 쥘리 데탕주와 생 프뢰의 사랑과 (신분차로 인한) 고난이라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닥 낯설지 않은 로맨스적 도식에 입각해 있다면, 4-6부에서 볼마르와 함께 미덕의 공동체를 구성한 쥘리는 본인이 (루소적인) 미덕을 체현하는 인물로 다시 등장한다. 어떤 면에서 후반부의 생 프뢰는 볼마르 부부를 보면서 감복하고 덕성의 길을 다시 생각하는 역할을 맡는다; 볼마르가 쥘리를 인도했다면, 쥘리는 다시금 생 프뢰를 인도한다. 물론 전반부의 (루만의 용어를 빌려) '열정적 사랑'이 오늘날과 달리 당대의 윤리적-심리적 체계에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는 숙고할 가치가 있다; 이성으로 제압해야 할 열등한 힘이었던 열정은 <쥘리>에서 신분제의 편견과 대립하는 진실한 사랑으로 격상되며, 이것이 어린 날의 미숙함으로 평가되고 미덕으로 인도되는 후반부에서조차 단순히 버려지지는 않는다. 4-6부에 있어서도 여전히 쥘리와 생 프뢰의 감정은 미묘한 여파를 지속적으로 남기고 있으며 양자가 직접적으로 자신들이 과거의 열정을 극복했다고 말하는 순간에서조차 과거의 열정이 진짜로 극복되었는지는 불투명하다. 실제로 마지막 부분에서 쥘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읽으면서 나와 같은 독자는 이것이 열정과 미덕의 갈등관계를 양자의 합치로 풀어내려는 기획의 실패를 덮는 서사적 장치가 아닌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한쪽에는 진실된 열정이 있고, 다른 쪽에는 우리가 따라가야 할 미덕이 있다면, 우리는 양자 사이에서 어떠한 길을 취해야 하는가? 쥘리가 자신을 가장 성숙하게 표현하는 순간에조차도 열정과 미덕의 합치가 완전하게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열정과 미덕의 관계가 문제적이 되는 것은 (명백히 미덕의 편을 들어주는) 리처드슨에게서도 마찬가지여서, 특히나 클러리사의 경우 우리는 그녀가 텍스트가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의도하는 것만큼 미덕으로만 가득한 인물인지, 그녀에게 열정passion은 어떤 의미인지를 곱씹어 묻게 된다--패멀라가 이해관계interest와 미덕virtue 사이의 관계를 고민하게 되는 것에 비해 클러리사에서는 열정과 미덕의 관계가 보다 미묘해진다.


사소하지만 흥미로운 점을 덧붙이자면, 나 자신이 서간체 장르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잘은 모르겠지만, <쥘리>의 저자주가 갖는 기능은 소설 기법상 독특하다. 어쨌든 평범한 서간체 로맨스가 편지를 통해서만 내용을 전달한다면--물론 <클러리사>의 수정판들에서처럼 저자가 직접 내용이해를 위한 각주를 달기도 했지만--<쥘리>의 장 자크 루소는 하나의 독자적인 목소리가 되어 편지를 비판하거나, 동의하거나, 냉소하거나 등 명백히 거리를 두는 목소리로 등장한다. 저자주는 의외로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서 루소가 특히 윤리적/철학적 판단에 저자 주를 넣으면서 어떤 효과를 의도했고 그것이 실제로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가는 독자로서 한번쯤 질문해볼 만한 주제다.



이하 주요한 대목을 인용 및 소개하고 간략한 코멘트를 덧붙인다.



[서문]


"대도시에는 연극이 필요하며, 타락한 국민들에게는 소설이 필요하다. 나는 이 시대의 풍속을 보았기에 이 편지들을 출간했다."(15) : 서문의 첫 대목. 미덕, 풍속, 예술의 연관관계.


"나는 이 서간집 표지에 내 이름을 밝히는데, 그것은 이 서간집을 내것으로 삼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지기 위해서이다. [...] 만일 이 책이 형편없는 것이라면 나는 더욱더 그 점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나 자신 이상의 인간으로 인정받고 싶지 않다." : "온전한 나 자신으로 인정받기"; 말년에까지 이어지는 루소의 욕구.


"이 책은 세상에 배포하려고 쓴 것이 아니며 아주 소수의 독자의 취향에나 맞는 것이다. [...] 미덕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감정이 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다." (16) : 미덕, 취향, 감정의 연관.




[<신엘로이즈>의 서문, 또는 발행인과 한 문인의 소설에 대한 대담]: 두 번째 서문. 루소와 한 (비판적인) 평자의 대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풍속, 미학(예술론), 도덕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이 마주할 비판을 미리 예상하고 반비판하며 각 주제에 대한 루소의 입장을 드러낸다.


"[인물들이 부자연스럽다는 비판에 대항하여 R이] 당신은 사람들이 어디까지 서로 다른지 압니까? 풍속과 편견이 시대와 장소, 연령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압니까? 감히 누가 자연에 명확한 한계를 정하고, '인간은 여기까지만 갈 수 있고 그 이상은 안 된다'라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20) : (몽테스키외에게서도 볼 수 있던) 자신이 속한 문명의 '특수성'에 거리를 두는 태도.


"[표현의 모자람에 대한 비판에 대항하여] 당신은 열정적인 사람들이 실제로 희곡과 소설에서 당신이 감탄하는 그런 생기 넘치고 힘 있고 화려한 말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충만한 정열은 힘 있게 자신을 표현하기보다는 오히려 풍요롭게 표현합니다. 정열은 설득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의심받을 수 있다는 의심도 하지 않습니다. 정열이 자신이 느끼는 바를 말할 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해방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대도시에서의 사랑을 더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그렇지만 작은 마을들에서보다 그곳에서 사랑을 더 잘 느낄까요? [...] 때때로 언어의 빈약함은 적어도 감정의 진실은 보여줍니다. [...] 폭발적인 감정이 넘쳐나는 그의 가슴은 끊임없이 같은 말을 되풀이할 뿐 결코 말을 끝맺지 못해서, 마치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마르지 않는 샘과 같습니다. 두드러진 것도 놀라운 것도 없어서 사람들은 단어도 표현법도 문장도 기억해두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아무 것에도 감탄하지 않으며 아무것에도 깊은 인상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영혼의 감격을 느끼며, 이유는 모르지만 감동하게 됩니다. 비록 감정의 힘이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지는 못하지만 감정의 진실성이 우리를 [/] 감동시킵니다. 그렇게 가슴은 가슴에 말을 할 줄 압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정열로 치장한 독특한 언어만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종류의 미를 전혀 알지 못하며, 경멸합니다."(24-25) 


: 대도시 및 궁정-언어-가짜(장애) VS. 시골-열정-진실성(투명성)이라는 루소의 핵심적인 대립구도. 이것을 단순히 낭만적 언어로 치워버릴 게 아니라, 이러한 도식이 18세기 중반의 상업사회 및 사치논쟁, '세련됨'과 같은 당대의 문화적 코드에 대한 비판에서 나왔음을 인식해야 한다. 당연히 이것은 루소의 또 다른 키워드, 조국-공화국-애국심-미덕 같은 것들과도 연결된다. 투명성 및 고독에의 갈구는 물론 루소의 매우 독특한 태도이지만, 루소를 단순히 독특한 천재 또는 전체주의적이거나 낭만주의적 사유의 소유자로 재단하지 말고 공화주의적 덕성의 언어라는 보다 큰 흐름에서 읽기.


"[당시에 유행하던 소설들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 그러나 불행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불행할 뿐인 시골 사람들에게 오락과 교훈과 위안을 동시에 제공할 수 있는 이 책들은, 그 반대로 자신의 처지를 경멸할 만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편견을 증대하고 강화함으로써 오로지 그 처지를 싫어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기도 합니다. 상류사회 사람들, 인기 있는 부인들, 귀족들, 군인들. 이들이 바로 당신이 말하는 모든 소설의 인물들입니다. 도시의 세련된 취향, 궁정의 규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 쾌락 추구의 도덕. 이것들이 바로 그 고설들이 전파하는 가르침이고 그 소설들이 주는 교훈입니다. 그 소설들의 가장된 미덕의 화려함은 참된 미덕의 광채를 흐리게 만듭니다. 행동상의 술책이 실제의 의무를 대신합니다. 멋진 담화가 훌륭한 행동을 경멸하게 하며, 순박한 품행은 교양 없는 것으로 통합니다.

 손님을 접대할 때의 자신의 진솔함이 조롱당하고 자기가 사는 지역에 [/] 넘치게 해놓은 기쁨이 야만적인 통음난무로 파괴되는 것을 보는 시골 귀족에게, 주부의 살림이 자기 신분의 귀부인들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그의 아내에게, 도시의 부자연스러운 태도와 독특한 언어 때문에 자신의 남편이 될 수도 있었을 성실하고 투박한 이웃 남자를 경멸하게 된 그의 딸에게 그와 같은 묘사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이 가족은 시골뜨기가 되고 싶지 않아 자기 마을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게 되고, 자신들의 오래된 저택을 버려 그 저택이 이내 폐옥으로 변하도록 방치한 채 수도로 갑니다. 그곳에서, 성 루이 훈장에 빛나는, 영주였던 아버지는 하인이나 사기꾼이 되고 어머니는 도박장을 세우고 딸은 도박꾼들을 끌어들이며, 대개는 세 사람 다 불명예스러운 삶을 산 뒤에 비참하고 수치스럽게 죽습니다."(30-31)


: 위에서 설명한 도식을 입증하는 사례. 소박하고 진솔하게 살아가는 시골귀족을 대도시의 사치에 맞서 '자연의 덕에 가까운 모범'으로 설정하려는 루소의 노력은 4-5부에서 볼마르와 쥘리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상세한 설명으로 나타난다. 투박한 시골귀족과 세련된 도시인의 갈등은 사치논쟁과 함께 18세기 내내 나타나는 문화적 코드로, 예컨대 영국의 로맨스에서도 이러한 코드가 다소간의 변형을 거쳐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_Evelina_ 등을 참고). 19세기 초의 (영국) 낭만주의에서도 상업과 도시는 종종 인간을 타락시키는 원인으로 그려진다(Wordsworth의 시들). 예술(소설)이 풍속과 덕을 타락시키거나 (루소 자신의 작품이 의도했듯) 고양시킬 수 있다는 것도 눈여겨두자.


"사람들은 소설이 머리에 혼란을 준다고 불평합니다. 저도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소설을 읽는 사람에게 그 자신의 상황이 아닌 어떤 상황의 이른바 매력을 끊임없이 보여줌으로써, 그 매력들이 그를 유혹하고, 그로 하여금 자신의 상황을 경멸하게 하고, 자신의 상황을 소설을 통해 사랑하게 된 상황과 상상 속에서 바꿔보게 합니다. 사람들은 지금의 자신이 아닌 사람이 되고 싶어함으로써, 자신을 지금의 자신과 다른 존재로 생각하기에 이르게 되는데, 이런 식으로 그들은 어리석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소설이 독자에게 그를 둘러싸고 있는 대상들에 대한 묘사와, 그가 이행할 수 있는 의무와, 그의 상황에 어울리는 즐거움만을 보여준다면, 소설은 그를 어리석게 만들지 않고 오히려 현명하게 만들 것입니다. [...] 그들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그 작품들이 그들의 마음에 들어야 하며 그들의 흥미를 끌어야 합니다. 그 작품들이 그들의 상황을 유쾌한 것으로 만들어서 그들로 하여금 그 상황에 애착을 갖게 해야 합니다. 그 작품들은 상류 사회의 규범들과 싸워서 그것들을 파괴해야 합니다. 그 작품들은 그 규범들이 허위적이고 경멸할 만하다는 것을, 다시 말해 그 규범들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33)


: 진실과 덕의 결합, 허위와 어리석음/타락의 연결. 이런 점에서 루소는 확실히 사실주의(리얼리즘)의 정신과 그 나름의 방식으로 맞닿아 있다; 인간의 삶을 사실에 가깝게 표현하는 것 자체가 (가상schein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태도에 대해) 우위를 갖는 도덕적 미학. 그리고 예술이 잘못된 풍속을 비판하고 교정할 수 있다는 믿음.




1부에서는 쥘리와 그녀의 가정교사 생 프뢰(남자 주인공이 이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은 후반부의 일이다)의 연애가 시작되고, 두 사람의 로맨스 및 장애를 구성하는 조건들이 계속해서 주어진다. 사랑을 방해하는 조건들, 그 조건들과 충돌하는 강렬한 열정, 그와 미덕을 병존시키려는 쥘리의 노력, 생 프뢰의 합리주의적 철학 설파 등이 나타난다. 사랑은 종종 서로에 대한 "지배"(편지 4,5)로 표현된다. 스위스 귀족 부부와 그 딸 쥘리, 쥘리의 사촌 클레르, 평민 신분의 가정교사 생 프뢰, 생 프뢰의 친구가 되는 영국 귀족 에드워드 봄스턴Edward Bomston과 같은 주요 인물들의 등장. 생 프뢰는 쥘리와의 연애가 발각되지 않도록 결국 다른 지방으로 떠난다.


"[생 프뢰 to 쥘리] 당신은 절도를 말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자연의 목소리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목소리가 마음의 목소리와 일치할 때 그 자연의 목소리를 거역할 방도가 있습니까?"(80 편지10) : 열정과 자연의 동일시. 생 프뢰에게서는 자연 또는 열정의 지배가 강하게 드러난다. 쥘리 또한 열정의 지배력을 느끼지만, 동시에 미덕--여기서는 규범의 준수--을 향한 마음 또한 공존한다.


"[생 프뢰 to 쥘리] 나는 항상 선은 미의 실천일 뿐이며 선과 미는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또 그것들은 공히 아주 질서정연한 자연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바로 그런 생각에서 심미안은 분별력과 동일한 수단에 의해 완성되며, 미덕의 매력에 크게 감동받은 영혼은 그 감동에 비례해 다른 모든 종류의 미에도 역시 민감해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는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는 것을 연습합니다. 보다 정확히 말해, 세련된 시각은 섬세하고 예민한 감정일 뿐입니다. [...] 심미안은 어느 정도는 판단력의 현미경입니다. 작은 대상들을 판단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그 심미안이기 때문입니다. [...] 판단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는 것을 훈련해야 하며, 감정에 의해 선을 판단하는 것처럼 면밀한 검사에 의해 미를 판단해야 합니다."(90, 편지12)


: 선과 미가 동일한 판단력에 의해 판정된다는 것에서 곧바로 18세기 초 영국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던 샤프츠베리(Shaftesbury, 3rd earl)의 저술이 떠오른다. 판단력은 작은 것들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능력이며--이러한 관점은, <에밀>에서도 그러했듯 루소가 기본적으로 감각론과 감수성sensibility의 언어 하에 있음을 보여준다--그것은 훈련을 통해 계발될 수 있다. 훈련을 통해 인간의 능력이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은 단순한 감각론과는 다른 계기, 푸코가 "영성" 또는 "자기 배려"의 계기라고 부른 것(<주체의 해석학>)이 루소에게도 있음을 보여준다; 애초에 <쥘리>와 <에밀> 모두 교육에 대한 텍스트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후에 루소가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로크의 (신스토아주의의 영향이 명백한) <교육론>은 이러한 믿음을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물론 '훈련'의 모티프 자체는 데카르트(<규칙들>)나 스피노자(<오성개선론>)에게서도 볼 수 있다.


편지23은 쥘리의 부탁을 받고 발레(Valais)의 산악지방을 방문한 생 프뢰의 묘사를 그린다. 험악한 산맥, 거대한 바위, 폭포, 빽빽한 숲처럼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황량한 자연과 인간의 노동이 개척한 풍경이 공존하는 광경이 새로운 미적 기준의 전형으로 제시된다. 물론 당대의 독자들은 '공존'보다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자연의 묘사에 훨씬 더 깊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알프스는 루소의 텍스트와 더불어 미학적 대상이 되었다. 이것 자체는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실제로 이 편지는 자연묘사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자연에서 살고 있는 발레의 주민들에 대한 풍속스케치로 이어진다는 점을 주목하자; 당연히 자연-풍속-덕의 연결고리도 제시된다. 발레 고지대의 주민들은 화폐경제에 편입되지 않은 채 자신들이 경작한 농산물에 의지해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며, 그들의 경제생활은 이득을 추구하지 않고 손님을 환대하는 소박하고 선한 품성을 빚는다. 이어지는 발레지방의 여성들에 대한 생 프뢰의 풍속묘사는 당연히 덕과 미의 묘사와도 이어져 있다.


편지57은 에드워드와 생 프뢰의 결투를 말리는 쥘리의 간곡한 설득이다. 쥘리의 아버지는 절은 시절 결투로 친구를 죽였고 영원히 후회한다. '결투에 대한 혐오'는 루소가 '시골귀족의 무덕(武德)'까지 옹호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결투의 소재는 19세기 소설에 이르기까지 자주 나타나며, 시대에 따라 소설들이 결투를 어떻게 평가하느냐 역시 흥미로운 주제다.



2부는 생 프뢰가 에드워드의 인도를 받아 스위스를 떠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에드워드 to 클레르] 신분이 능력에 의해 결정되고 마음들 사이의 결합이 각자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 바로 그것이 진정한 사회 질서인 것입니다. 그것을 출신이나 부에 의해 결정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사회 질서를 교란하는 자들입니다."(270, 편지2) : 영국인 에드워드의 입을 빌어 표현되는 이 내용은 사실 평민 루소의 목소리이기도 할 것이다.


"[쥘리 to 생 프뢰]당신은 어떤 모범들을 더 닮고 싶어했지요? [...] 그것은 독당근에서 빼낸 독을 마시는 그 아테네 사람이었어요. 자기 나라를 위해 죽는 브루투스였어요. 그것은 고통 속의 레굴루스였으며, 자신의 배를 가르는 카토였어요. [...] 열정이 그 모델을 보도록 허락하자마자 우리는 그 모델을 닮고 싶어해요. 그리하여 만일 인간 가운데 가장 사악한 인간조차 그 자신과는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다면 선인이 되고 싶어 할 거예요. [...] 각자는 자기 나라를 사랑해야 하며, 청렴하고 용기가 있어야 하며, 맹세를 지켜야 해요. 심지어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말이에요. 흔히 개인의 미덕은, 그것이 타인의 칭찬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의 인정만을 열망하는 만큼 더 숭고해요. 그리하여 정의로운 사람에게서는 그의 양심이 세상 모든 사람의 칭찬을 대신해요." (311, 편지11)


: 그리스, 로마의 고대인들이 덕의 모범으로 제시된다는 것. 애국심의 강조에서 알 수 있듯 이는 공화주의적 수사를 이어받는데, 여기서 '양심'의 강조는 고전적 공화주의와는 이질적인 근대적 사고(홉스, 스피노자, 로크...)의 지층이 들어와 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홉스, 스피노자, 로크에게서 양심이 신앙의 문제였다면, 루소에게서는 양심에 충실할 것이 곧 덕의 문제로 이어진다(존 밀턴John Milton을 참고하기). 이것의 연장선은 물론 칸트의 윤리학적 교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지17은 파리의 사교계에 대한 생 프뢰의 (다소간 냉소적인) 관찰기다. 이는 후반부 스위스의 쥘리의 집과 다시 대조된다. 편지21은 파리 여성만을 따로 떼어 다룬다. 편지23은 생 프뢰가 클레르(도르브 부인)에게 보내는 것으로, 오페라 공연을 묘사한다. 편지26에서 생 프뢰는 '품행이 좋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섹스를 하고, 후회한다.


"[쥘리 to 생 프뢰] 당신도 인정하듯이, 오직 수적으로 가장 많은 신분의 사생활을 연구하는 것만이 그 국민의 진짜 풍속을 아는 방법이에요. [...] 거부(巨富)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극빈자가 매우 드문데 그토록 부유한 도시에서 하층민이 그렇게 가난한 이유는 대체 뭔가요? 이 문제는 당신이 탐구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돼요. 하지만 당신이 어울려 지내는 사람들에게 그 문제에 대한 정답을 기대해서는 안 돼요. 풋내기는 사회 분위기를 파악하러 금빛 번쩍이는 장소로 가지요. 하지만 분별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의 초가집에서 사회 분위기의 비밀을 터득해요. [...] 힘 있는 사람과 부자들이 사람들 앞에서는 동정하는 체하면서 어떤 은밀한 부정으로 피압박자에게서 조금 남은 검은 빵까지 빼앗아 가는지를 알게 되는 곳은 바로 그곳입니다."(415-16, 편지27) : 사회의 본질을 볼 수 있는 곳이 시골이라는 견해는 <에밀>에도 유사한 대목이 나온다. 착취와 빈곤의 문제가 언급되며, (편지26에서 타락한 생 프뢰에게) 쥘리는 선행의 실천을 통해 미덕을 회복하라고 권유한다.




2부 말미에서 두 연인의 관계는 결국 쥘리의 어머니 데탕주 부인에게 탄로난다. 3부에서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죽고, 쥘리 또한 천연두에 걸린다(다행히 외모는 거의 손상되지 않는다...의도적으로 생 프뢰는 쥘리로부터 천연두를 스스로에게 옮기며, 흉터를 남긴다).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 쥘리는 결국 아버지의 친구 볼마르와 결혼하기로 마음먹는다. 생 프뢰는 삶의 기력을 잃으나 고대인의 덕을 상기시키는 에드워드의 설득(편지22)으로 영국 함대에 올라 3년간 전 세계를 항해하기로 마음먹는다. 1-3부는 두 연인의 사랑으로 시작해 이별로 끝난다는 점에서 사실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으며, 4부에서부터는 조금 다른 성격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4부에서는 쥘리가 볼마르 부인이 된지 6년이 지났고 두 아이를 낳았다. 클레르(도르브 부인)는 남편과 사별했고, 볼마르 부부가 있는 클라랑에 오기를 권유받는다. 생 프뢰가 항해를 마치고 돌아오고, 볼마르에 의해 정식으로 초대받는다(편지4, 편지5에서 생 프뢰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언급된다)생 프뢰는 6년만에 쥘리를 보지만, 쥘리는 매우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생 프뢰는 쥘리가 남편 볼마르와 함께 애정과 미덕이 합치된 삶을 살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의 감정은 여전히 미묘한 데가 있다. 볼마르는 생 프뢰와 쥘리가 자신의 '시험'을 통과했다고 말해준다; 볼마르와 쥘리는 생 프뢰를 깊게 신뢰하고 사랑하지만 동시에 그의 약점을 보고 계속해서 그를 시험한다.


편지3(생 프뢰 to 도르브 부인)에서 생 프뢰는 자신이 가본 곳들의 사회풍속을 스치듯이 설명한다. (18세기에 유행했던) 유럽 바깥 세계를 묘사하는 일종의 인류학적 기행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생 프뢰가 본 광경은 조금 독특해서, 그는 유럽인들이 자신들이 가는 곳마다 착취, 약탈을 통해 지옥도를 만드는 것을 본다.


"[볼마르의 말] 여기에서는 모두가 솔직합니다. 당신이 진정 미덕을 가지기를 원한다면 그 예를 본받도록 하세요. [...] 악덕을 향하는 첫걸음은 순수한 행동을 비밀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 '당신이 누구도 보고 듣지 않았기를 바라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무엇이든 하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 나는 자기 집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밖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짓고 싶어헀던 그 로마인을 항상 세상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 우리의 우정은 시작되었습니다. 소중한 관계입니다. 깨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 아내를 누이동생으로서 포옹하든지 아니면 친구로서 포옹하세요. 그리고 항상 그녀를 그렇게 대하세요. [...] 둘이 있을 때에는 내가 옆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내가 옆에 있을 때에는 내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세요."(국역본 2권 50, 편지6(생 프뢰 to 에드워드)) : 투명성, 숨김없음, 한결같음, 우정, 가족애, 공동체.


편지10(생 프뢰 to 에드워드)에서는 볼마르 부부의 경제적 삶이 상세히 소개된다. 이들은 시골지주귀족으로서 소작을 줄 뿐만 아니라 본인들이 직접 농사를 짓는다. (사치 및 장식과 반대되는) 자연에의 부합 및 실용성은 이들이 추구하는 덕목이다. "땅은 사람과 짐승을 더 많이 투입할수록 그들에게 먹을 것을 풍부하게 제공해줍니다"(74); 토지와 (근면한) 노동의 결합이 풍요로운 생산력으로 보상받는다. 소작농 및 하인의 선택에서도 지역의 공동체적 성격이 중요하다. 하인들의 운용에 있어서 안주인 쥘리의 미덕이 어떻게 더 효율적이고 성실한 노동을 끌어내는가가 설명된다. 미덕에 기초한 지역공동체, 자연과 성실한 노동의 결합(화폐보다는 자급자족적 농산물과 노동이 더 중요하다). 이들이 어떻게 생산하고, 경영하고, 소비하는지(풍성한 식탁이 상세하게 묘사된다). 이어지는 편지11에서는 이들이 조성한 정원 "엘리시온"이 소개되는데, 물론 자연스러움을 강조하는 루소적 미학에 입각해 있다(그리고 자연의 미학은 근면하고 절약적인 노동-경영과 결합한다). 편지10, 11을 합쳐 국역본으로 60쪽에 해당하는데, 이는 소설 후반부(4,5,6부)의 1/8에 가까운 분량이다.


"[볼마르가] 나는 당연히 침착한 영혼과 냉정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 기쁨과 고통에 거의 무감각한 나는 우리로 하여금 타인의 애정을 얻게 하는 관심과 인정을 아주 희미하게밖에 느끼지 못합니다. [...] 나의 유일한 행동 원칙은 질서에 대한 타고난 취향입니다. [...] 내게 어떤 두드러진 열정이 있다면 그것은 관찰의 열정입니다. 나는 인간의 마음을 읽기를 좋아합니다. 내 마음은 나를 거의 속이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해타산 없이 냉정하게 관찰하기 때문에, 그리고 오랜 경험이 내게 통찰력을 주었기 때문에, 내 판단은 거의 틀리지 않습니다. [...] 나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사람들이 역할을 맡는 것을 보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 만일 내가 내 존재의 본성을 바꾸어 살아 있는 눈이 될 수 있다면 나는 쾌히 그렇게 할 것입니다."(134-35, 편지12, 볼마르 부인 to 도르브 부인) : '관조적인 삶.' 모범적 인물의 전형으로서 볼마르와 쥘리는 소설 후반부에서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볼마르의 말] 제어하는 이성은 단독으로는 아주 약한 공격에도 저항할 힘을 전혀 갖지 못합니다. [...] 싸워 이길 줄 아는 영혼은 불같은 열정을 가진 영혼뿐입니다. 모든 위대한 노력과 숭고한 행동은 그런 열정의 소산입니다. 차가운 이성은 아무런 훌륭한 일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한 열정은 다른 열정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미덕에 대한 열정이 생겨날 때, 오로지 그 열정만이 모든 것을 억제하고 균형을 유지해줍니다. [...] 진정한 지혜는 다른 지혜보다 더 열정으로부터 안전하게 해주는 지혜가 아니라, 항해사가 거친 바람을 뚫고 항해하듯 열정 자체로 열정을 억제할 줄 아는 유일한 지혜입니다." (138, 같은 편지) : 이성은 계산하는 힘일 뿐 사람을 움직이는 동력은 열정이라는 심리체계. 흄(David Hume)을 참고할 것. 이전까지 열정을 억누르고 제어하는 힘이었던 이성의 역할이 바뀌었음을, 자기 지배의 성격 또한 바뀌었음을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루소는 로크와도 다른 시대에 있다.


편지17(생 프뢰 to 에드워드)는 다시금 험준한 자연을 미적 대상으로 만든다.



5부도 이어진다. 사실 4부에서 6부까지는, 쥘리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플롯 상의 급격한 전환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에드워드의 연애 같은 '사건'이 가끔 튀어나오긴 하지만). 오히려 소설 후반부는 볼마르 부부의 미덕, 성품, 생활양식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생 프뢰 및 다른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을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에드워드 to 생 프뢰] 당신은 오랫동안 정열의 노예로 살았지만 미덕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당신의 큰 영예입니다."(편지1, 181) : 정열과 미덕의 병치라는 소설 후반부의 가장 중요한 구도가 이런 형태로 제시된다. 물론 양자의 공존이 가장 중요하고 또 문제시되는 인물은 쥘리다.


편지2(생 프뢰 to 에드워드)는 쥘리의 미덕과 성품, 선행을 기술하는데 집중한다. "볼마르 부인의 훌륭한 원칙은 신분을 바꾸는 것을 돕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신분 속에서 행복해지도록 돕는 것이며, 무엇보다도 모든 신분 중에서 가장 행복한, 자유 국가에서의 촌민의 신분이 다른 신분에 대한 선호로 줄어드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쥘리의 목소리] 시골을 떠나는 천 명의 사람 중에 도시에 가서 타락하지 않거나, 또는 도시의 악덕을 가르쳐준 도시인들보다 더 그 악덕을 멀리 옮기지 않는 사람은 열 명도 안 돼요"(196). "욕망을 언제나 미리 만족시키는 것은 욕망을 만족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욕망을 진정시키는 기술이라고 그녀는 주장합니다. 그녀가 아주 사소한 일에 가치를 부여하는 데 사용하는 유일한 기술은 그것을 한 번 향유하기에 앞서 먼저 스무 번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이 순수한 영혼은 이렇게 자신의 최초의 기력을 보존합니다. 이 영혼의 미각은 전혀 약화되지 않아서, 결코 과도한 것으로 그 미각을 되살릴 필요가 없습니다. [...] 그녀가 여전히 이 일에서 보다 더 고상한 목표로 삼는 것은 자기 자신을 억제하는 것, 자신의 열정을 고분고분하게 길들이는 것, 자신의 모든 욕망을 규율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복해지는 새로운 방법입니다."(203, 물론 신스토아주의적 '자기 배려' 혹은 자기통치로서의 덕을 볼 수 있다)

 이어 생 프뢰는 다시 볼마르 부부의 경제생활이 어떠한 덕성을 보전하며 운용되는지를 기술한다. "저[생 프뢰]는 궁정에서 불화와 혼란, 그리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저마다 타인의 파멸과 총체적 무질서 속에서 자신의 출세와 행복을 추구하며 사는 것을 보기보다는 적어도 크지 않은 소박한 집에서 소수의 사람들이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것을 보는 것이 더 고귀하고 더 고상하다고 생각합니다."(208); 타락한 궁정과 소박한 지방의 대비. "[볼마르의 말] 우리 식탁에는 우리 땅에서 나는 농산물만 올라옵니다. 옷과 가구는 거의 다 이 고장에서 나는 직물과 재료로 만듭니다. 흔하다고 해서 경시되는 것도 없고, 드물다고 해서 높이 평가받는 것도 없습니다. 멀리서 오는 것은 모두 속임수를 쓰거나 변조된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우리는 절제와 맛을 위해 우리 주변에서 나는 보다 나은 것, 믿을만한 품질을 가진 것들만을 선택합니다."(213); 교환 혹은 상업에 대립하는 농업 공동체의 덕성. 이후 다른 편지에서 볼마르는 직접적으로 "궁정보다 클라랑이 편하다"(274)고까지 말한다. 편지2는 40쪽에 가깝다. 편지7은 이 이야기의 연장선에서 포도수확을 묘사한다.


"큰 궁정의 균형미에는 화려함이 있지만 어지럽게 밀집된 많은 집들에는 화려함이 없다. 전투 대형을 취한 연대의 제복에는 화려함이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화려함이 없다. 혹, 개별적으로는 군복보다 더 비싼 옷을 입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 해도 말이다. 요컨대 진정한 화려함이란 위대한 것 안에서 감지되는 질서일 뿐이다.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광경 중에서 가장 훌륭한 광경은 자연의 광경임을 의미한다."(208, 편지2, 저자주) : 자연미로 가는 이론적 기초. 전체적인 질서로부터의 미라는 점에서 신=자연=(유일한)실체, 곧 자연을 모든 개별적 양태들을 표현하는 하나의 질서로 간주하는 스피노자를 떠오르게 한다.


 마찬가지로 에드워드에게 보고하는 편지3은 교육의 문제를 다룬다. <에밀>과 같이 읽어볼 대목이다. 마찬가지로 35쪽이 넘는 긴 편지다.


 편지9와 결말부에 나오는 '베일'의 모티프는 기억해둘만 하다. 당연히 고딕문학이 상기된다.


6부에서 쥘리는 클레르와 생 프뢰의 결합을 추진하지만, 생 프뢰의 거부로 무산된다. 생 프뢰는,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쥘리에 대한 마음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쥘리는 갑작스런 사고로 중태에 빠지고, 마지막으로 덕성스러운 모습을 보인 뒤 죽는다(이 사실을 생 프뢰에게 알리는 편지들로 끝을 맺기 때문에 생 프뢰가 어떻게 응답했을지는 알 수 없다).


편지5에서 클레르는 쥘리에게 제네바의 풍속과 심성을 설명한다. 물론 루소의 조국이니만큼 상세하게, 호의적으로 묘사된다(그러나 이미 타락의 기운이 들어와 있다).


50쪽에 육박하는 편지11에서 죽음에 대처하는 쥘리의 모습을 담은 볼마르의 글은 마치 고대인에 대한 묘사와 닮아있다. 쥘리는 흔들림 없이 차분하게 다가올 죽음에 대처, 미래를 준비한다. 목사와 쥘리의 대화는 '영성'의 주제를 상기시킨다. 쥘리의 마지막 편지12에서 쥘리는 자신의 마음에 여전히 생 프뢰를 향한 정념이 있었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덕과 정념이 공존하고 있어 잘 억눌러웠왔을 밝힌다.






이하는 루소 전공자 A 선배의 코멘트.


1. 예술 혹은 소설의 도덕적 기능. <쥘리>의 두 서문에서 루소는 소설의 도덕적 기능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학문예술론>과 <달랑베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예술을 인류 타락의 주범 중 하나로 고발한 철학자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의 서문과 전반부/후반부의 구조 자체는 자신이 원론적으로 부정했던 예술의 도덕적 기능을 어떤 구실로 복구시킬 것인가 하는 실존적, 이론적 난처함으로부터 읽는 것이 보통입니다. 관심을 갖고 계신 공화주의적 덕성의 문제에서도 이 사안은 가볍지 않습니다. 우리가 루소에게서 공화주의적 덕성이라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예술 혹은 가상의 기술을 배제하는 이데올로기를 포함합니다. 즉 루소의 공화주의는 예술을 비난합니다. 그러므로 루소에게 소설쓰기는 루소식 공화주의의 이념을 소설로 표현하는 문제에 앞서서 자신의 공화주의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것을 통해 소설을 정당화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요구합니다.


2. "로맨스 플롯". 이 소설의 사랑이야기를 백과사전적 글쓰기 혹은 공화주의적 덕성의 문제를 전개하기 위한 틀로 보는 것에 대해.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이 공화주의와 어떤 연관을 맺는다면 그것은 '우선' 이 사랑이야기의 혁신성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최근 정념론의 측면에서 얘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발리바르는 <쥘리> 정념론의 새로움으로, 기존의 정념론들이 정념의 범주화와 가치평가에 힘썼다면 이 소설의 정념론은 정념들 사이의 변환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즉 젊은 연인이었던 생프뢰와 쥘리는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 사랑을 어떻게 우정으로 변환시킬 수 있을 것인가? 발리바르는 프랑스혁명이 급격하게 가져온 왕정에서 공화국으로의 전환이 정념론의 영역에서는 귀족적 사랑의 감정에서 공화주의적 우애의 감정으로의 전환으로 번역된다고 지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쥘리>의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는, 단지 사랑을 단죄하고 우정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사랑의 힘을 우정의 힘으로 전유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매우 집요하고 치밀하게 고민한다는 점에서 공화주의를 준비하는 로맨스입니다.


3. 가족이라는 소우주. 필로낭코(Philonenko)는 <쥘리>의 문화사적이고 철학적인 가장 큰 의의로 가족이라는 소우주를 발견하고 그것이 가진 모든 철학적, 신학적, 사회학적 함의를 어떤 문제의 형식으로 제기했다는 사실을 듭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가족의 의미를 탐구하며, 스스로 가족을 구성할 필연성 혹은 부족함 혹은 희망과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쥘리는 자신의 죽음을, 그것이 만들어낼 자신의 빈자리를 통해 남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가족을 구성하게 하는 계기로 설계하고자 애씁니다. 이렇게 말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 왜 가족(공화국이나 정치체가 아닙니다)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미덕이 필수적인가? 가족과 개인, 정치체는 어떤 방식으로 관련되고 상호작용하는가? 하지만 역설적으로, 세이테(Séité)같은 문학비평가가 지적하듯이, <쥘리>는 가족을 해체시키고, 모두를 싱글로 만드는 "독신자기계"입니다. 볼마르, 생프뢰는 물론이고 클레르와 에드워드 또한 독신자로 남습니다. 이상적 가족은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가족은 미덕이라는 가치를 필연적으로 요구하지만, 결국 그것은 모두를 흩어지게 만듭니다. 


방금 저는 이 소설이 가진 역설적 측면 하나를 지적했습니다. 전공자들이야 맨날 이것만 쳐다보고 있으니 이런 것까지 보는 것이겠지만, <쥘리>는 그것이 제기하는 적극적인 문제들 하나하나에 모두 어떤 역설적 효과, 결론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전통적인 비평에서는 근대성 자체의 불가피한 한계로 규정하고 그것을 문제로 만들면서 우리의 세계관을 마련한 소설에 최대한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만, 또 미국 쪽 등의 다른 곳에서는 이 모호함을 루소의 사유와 글쓰기 자체의 자기분열과 한계로 규정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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