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드. <사랑의 범죄>, <쥘리에트>, <소돔의 120일>에 대한 간략한 노트.

Reading 2015. 5. 25. 04:51

D. A. F. 사드. <사랑의 범죄>(Les crimes de l'amour). 1800. 오영주 역. 열림원, 2006.


"소설에 대한 생각"(Idée sur les romans / An Essay on Novels)에서 흥미로운 몇 대목을 인용해둔다. 미덕과 정열의 관계, 자연에 대한 강조 등을 눈여겨보자.


"마침내 영국 소설들, 리처드슨과 필딩의 힘찬 작품이 나타나, 지긋지긋한 사랑의 번민이나 규방의 권태로운 대화나 그리는 것으로는 이 장르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프랑스인들에게 가르쳐주었다. 사랑이라 불리는 동요하는 마음의 노리개이자 희생자로서 그 위험과 불행을 동시에 보여주는 남성적 성격들을 그려야 이 장르에서 성공할 수 있다. 그래야만 영국 소설들이 뛰어나게 그려낸 전개와 정열을 얻어낼 수 있다. 리처드슨과 필딩은 우리에게, 진정한 자연의 미로인 인간의 영혼에 대한 심오한 연구만이 소설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는 것과 소설은 역사가가 하듯이 있는 그대로 혹은 보이는 대로의 인간만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 있는 대로의 인간, 죄악으로 인한 변화와 온갖 종류의 격정을 겪고 난 인간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므로 소설 장르에서 글을 쓰고 싶으면 정열에 대해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모든 정열을 사용해보아야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또한 반드시 미덕이 승리하도록 해야 흥미를 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가능한 한 미덕을 향해 나아가야겠지만, 자연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 규칙은 단지 우리의 행복을 위해 모든 인간이 복종하길 바라는 것일 뿐이며, 소설에 있어 결코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흥미를 이끌어내는 규칙은 더더욱 아니다. 왜냐하면 미덕이 승리하면 만사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대로 될 뿐이므로 눈물이 흐르기도 전에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혹한 시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악이 미덕을 때려눕히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찢어진다. 우리를 엄청나게 감동시킨, 디드로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 마음의 뒷면까지 피로 물들인' 작품은 의심할 여지 없이 흥미를 유발시킬 것이고, 또 흥미만이 성공을 보장해준다.

 대답해주기 바란다. 만약 불멸의 리처드슨이 '덕성스럽게' 12권 혹은 15권쯤에 러브레이스를 개심시키고 그를 '평화롭게' 클라리사와 결혼시켰다면,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고 눈물을 흘렸을까? 그 반대였기 때문에 이 소설이 많은 다정다감한 존재들을 달콤하게 울게 만들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이 장르에서 일을 할 때 잘 파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자연이며, 자연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작품인 인간의 마음이지, 결코 미덕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아름답고 아무리 필요하다 할지라도 미덕은 소설가가 반드시 깊이 연구해야 하는 마음의 여러 놀라운 양태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고, 또 마음의 충실한 거울인 소설은 반드시 마음의 모든 주름들을 비추어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28-30)


"이제 우리는 새로운 소설들을 분석해야 할 것 같다. 마법과 환상 효과가 장점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종류의 소설들 중 최고의 것으로 <수도사>[Matthew Gregory Lewis, The Monk)]를 꼽을 수 있을텐데, 이 작품은 모든 점에서 래드클리프[Ann Radcliffe]가 보여주는 화려한 상상력의 기묘한 도약을 능가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길어질 우려가 있으니, 누가 뭐라 해도 이 장르에 분명 어떤 장점이 있다는 사실만 인정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이 장르는 전 유럽이 겪은 혁명적 동요의 필연적인 소산이었다. 악인들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모든 불행을 겪고 난 사람들에게 소설 쓰기가 힘들어진 만큼 읽는 것도 지루해졌다. 가장 유명한 소설가가 그린다 할지라도 백 년 이상이 소요될 그런 불행을 지난 4,5년 동안 겪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흥미로운 제목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 지옥에다 도움을 청해야 했고, 공상의 세계를 제시하면서 철의 시대의 인간 역사를 뒤져야만 자세히 할 수 있을 것들을 보여주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글쓰기는 너무도 많은 폐단을 보여준다! <수도사>의 저자라고 해서 래드클리프보다 그러한 폐단을 더 잘 막을 수는 없었다. 두 가지 중 한 가지 폐단이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마법을 전개시켜야만 하는데, 그러면 당시의 이야기는 더 이상 흥미를 끌지 못할 것이다. 아니면 결코 비밀의 장막을 걷지 않아야 하는데, 그러면 당신의 이야기는 세상에서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이 두 암초 중 어디에도 부딪혀 부서지지 않고 이 장르에서 목적을 달성하는 좋은 작품이 나오길 바라며, 그때 우리는 그 방법을 비난하기는커녕 그 작품을 하나의 모델로 제시할 것이다."(33-34)


"소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위선적이고 타락한 자들이여, 당신들만이 이런 우스꽝스런 질문을 한다. 소설은 당신들을 그리는 데, 붓이 가져올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로부터 벗어나길 원하는 거만한 인간들인 당신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데 쓰인다. '유구한 풍속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소설은 인간을 알고자 하는 철학자에게 역사만큼이나 필수불가결하다. 역사의 끌은 자신이 보여주는 인간을 새길 뿐이다. 그런데 이때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다. 야망과 자만이라는 가면이 그의 얼굴을 덮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정열만을 볼 뿐 인간 그 자체는 볼 수 없다. 반대로 소설의 붓은 인간을 내면에서 파악하기 때문에...... 가면을 벗은 순간의 인간을 포착한다. 그러므로 그 그림은 보다 흥미로울 뿐 아니라 동시에 훨씬 더 사실임직하다. 자, 이것이 바로 소설의 유용성이다. [...] 소설이 요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지식은 분명 인간의 마음에 대한 지식이다." (34-35)


"모럴리스트들이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이상한 자연은 모럴리스트들의 전략이 규정하고자 하는 제방을 매 순간 뛰어넘는다. 균일하게 계획되어 있으나 드러나는 방식은 불규칙하며, 항상 동요하는 가슴을 지닌 자연은 화산의 중심 같아서 차례차례 인간의 사치에 사용되는 보석 혹은 인간을 파괴하는 불덩이를 뿜어낸다. 자연이 지구를 안토니우스나 티투스로 가득 채울 때 자연은 위대하다. 자연이 지구에 안드로닉스나 네로 같은 인간들을 토해낼 때 자연은 끔찍하다. 그러나 자연은 언제나 숭고하고, 언제나 장엄하며, 언제나 우리의 연구와 묘사와 찬미의 대상이 될 만하다. 자연의 변덕이나 필요의 노예인 우리로서는 자연의 의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연의 변덕이나 필요에 의해 우리가 경험하게 된 것에 의거해 자연에 대한 우리의 애정을 결정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 결과가 어떠하든 간에 자연의 위대함과 에너지를 보고 자연에 대한 우리의 애정을 결정해야 한다." (41)



- 국역본은 11개의 단편 중 단 서문격인 소설론과 3편만 번역되어 있다(영역판 Oxford World's Classics ed. 는 7편 수록)


- 미덕의 승리 및 악덕의 패배로 끝나는 '공식적인' 도덕체계를 수용하는 듯 보이지만, 사드의 보다 과감한 텍스트에 나오는 기본적인 도식의 원형은 확인할 수 있다. <팍스랑주>(Faxelange), <플로르빌과 쿠르발>(Florville and Courval), <외제니 드 프랑발>(Eugénie de Franval) 모두 리베르탱이 등장한다. <플로르빌과 쿠르발>은 쾌락을 능숙하게 다루며 또 자신의 '악덕'을 다른 소녀들에게 가르치고 전파하는 여성, 이후 <쥘리에트>에서 가장 완성된 형태로 드러날 인물형이 나오며, <외제니 드 프랑발>은 리베르티나주를 정교한 계획을 통해 실천하는 남성인물형이 나온다. 양자는 모두 근친상간의 모티프를 다루는데, <플로르빌과 쿠르발>은 성애묘사만 없을 뿐 그 구도의 극단성의 독창적인 면모에서 이미 충분히 사드적이다--플로르빌은 자신의 아버지, 오빠와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어머니 및 아들의 죽음에 관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외제니 드 프랑발>은 아버지와 딸의 근친상간 및 딸의 어머니에 대한 증오, 리베르탱에 의한 교육과 같은 모티프에서 <규방철학>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전개될 구도를 함축한다.


- 리베르탱들은 일종의 원자론적 인간관--인간 존재는 모두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에 기초해 전통적인 종교 및 덕성을 비판한다. 특징적인 것은 외견상 미덕이 옹호되는 경우에도 실제로 이 텍스트의 미덕은 이미 공리주의적 논리 안에 끌려들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플로르빌과 쿠르발>에서 덕성의 설교는 결국 악덕의 자기파괴적 면모를 지적하는 것으로 귀결되며, <외제니 드 프랑발>의 신부 또한 덕성을 사회의 규범 및 법에 복종하는 것으로 제약한다. 양자 모두에서 덕성은 그것이 옳기 때문에 지향되어야 하는 인간관이 아니라 쾌락과 생존을 보장하는 장치 정도로 간주된다.



마르키 드 사드. <쥘리에트 이야기 또한 악덕의 번영>(Histoire de Juliette ou les prosperites du vice). 1797. 김문운 역. 동서문화사, 2011.


- 일어중역이 강하게 의심된다. 어쨌든 이 책과 <소돔 120일>은 성귀수 역이 나오기 전까지는 중역으로 밖에 읽을 수 없다.


- 묘사 및 악덕의 기예라는 측면에서 가장 극단적인 지점까지 나아가는 텍스트. <규방철학>의 마지막 장면도 매우 놀랍지만, <규방철학>은 묘사 및 리베르티나주의 측면에서 <쥘리에트>에 비할 때 소품에 가깝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드에 대한 노트에 이미 적었으므로 더 언급하지 않겠다.


- 이야기가 다루는 세계의 공간적 범위가 매우 넓어졌다. <소돔 120일>이나 <규방철학>이 고립된 저택을 배경으로 한다면, <쥘리에트>는 파리에서 프랑스의 다른 지역들로, 나아가 국제적인 배경을 담아낸다. 쥘리에트는 소설의 후반부에서 파리를 떠나 이탈리아의 여러 왕국들을 돌아다니며 그 여정에서 마주치는 인물은 러시아의 시베리아는 물론 아프리카까지 다녀온 경험을 이야기한다. 여러 지역의 상이한 관습들을 통해 자국의 도덕을 상대화시키는 논리도 종종 나타난다. 갖가지 초자연적인 경험(반인반마의 등장, 독약이나 마술 등등).



마르키 드 사드. <소돔의 120일>(Les 120 journées de Sodome). 1785?. 김문운 역. 동서문화사, 2012.


- 역시나 일어 중역으로 추정.


- (그 자체로 성적 욕망을 극단적으로 체현하는 리베르탱들인) 4인의 권력자가 전국에서 소년소녀들을 납치하여 스위스에 있는 고립된 요새-저택에 칩거한 4개월 동안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다. 흥미로운 것은 이 여정의 동반자들 중 이야기꾼 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4명의 이야기꾼은 각각 한 달 동안 정해진 주제에 따라 매일 5개씩 150개의 이야기를 한다. 첫째는 단순한 정욕과 평범한 일탈행위를(물론 결코 평범하지는 않다), 두 번째는 좀 더 독특한 성적 욕망을, 세 번째는 법, 자연, 종교를 위반하고 조롱하는 편집증적인 성욕을, 네 번째는 고통, 고문, 살인과 결부된 성욕을 다룬다. 서문은 이 인물들을 소개하고 1부에서 4부까지 한 인물의 이야기에 맞춰 전개되는 방식; <데카메론>이나 <캔터베리 이야기>와 같은 형식을 떠올릴 수 있다; 이야기꾼들의 이야기를 듣고 4명의 권력자가 반응하는 양상 또한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후자에 좀 더 가까울 수는 있겠다. 1부만 소설의 형태가 어느 정도 완성되어 있고, 2부에서 4부는 각 이야기들의 개요만이 남아있다.


- 물론 1부에서부터도 채찍질과 스카톨로지를 비롯한 갖가지 독특한 성적 실천/욕망들이 제시되며 종교와 신성모독은 지겨워질 정도로 자주 나오지만--예를 들어 성직자의 변태성욕은 이야기꾼의 이야기에서 매우 자주 출현하는 소재다--, 1부에 국한할 때 묘사의 생생함은 <쥘리에트>만큼은 아니다(어쨌든 우리는 후자에서 사드가 소설가로 좀 더 완성된 면모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많은 대목에서 서술자는 '지금은 말할 수 없으니 다음으로' 식으로 넘겨버린다. 다만 총 600개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 나름대로 행동하는 권력자들의 행위는 정말로 일종의 '풍속 연구'에 걸맞은 풍부함을 자랑한다. 물론 4부에서 묘사하는 갖가지 고문/살육장면은 짧게만 남아있는 설명에 불구하고 강력하다. 특히 4명의 권력자에게 생생한 성격을 부여하려 노력한 측면도 짚어두자.


- 서술의 기술적 측면에서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구도 자체는 <소돔의 120일>이 보다 복잡하고 흥미로운 형태를 띤다. 기본적으로 1인칭 화자의 기행문/모험담에 가까운 <쥘리에트>에 비해, <소돔 120일>은 1. 권력자들이 정해놓은 최초의 계획 2. 이야기꾼의 이야기 3. 2를 듣고 해석하는 권력자들의 반응 4. 2-3을 거쳐 자극을 받은 권력자들의 성적 행위 라는 네 가지 층위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권력자들이 이야기를 듣고 다양한 성적 실천이 어떤 심리적 메커니즘에 의해 이루어졌는가를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고 이해하려 시도하는 대목들은, 아마도 이 부분이 사드의 유머러스함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할텐데, 이 텍스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하다. 더불어 이들이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에서 묘사되는 성적 행위들을 직접 재현하려 노력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근대적 포르노그라피의 수용방식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나는 특히 현대 일본의 포르노그라피, 특히 극단적인 성적 실천을 다루는 포르노게임들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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