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임의 정신구조에 대한 노트

Comment 2015. 3. 4. 00:10

기사 원문링크: http://weekly.changbi.com/?p=5964&cat=3



"윤병세 외교부장관은 아우슈비츠와 관련된 독일 메르켈 총리의 발언을 거론하며, “전세계에, 특히 아시아에 가이드라인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모든 언론은 윤장관의 발언을 일본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윤장관 외에도 국내의 여러 정치인과 언론 매체들이 그와 비슷한 맥락에서 아베 정부를 비난했다. 특히 일부 보수언론은 북한사회 전체 혹은 북한 내의 강제수용소를 아우슈비츠에 비유하며, 그 해방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중요한 사실은 이 모든 중요 정치인들의 발언과 언론 기사들 속에서 한국사회 스스로를 진지하게 돌아보는 자성의 목소리를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수많은 말의 향연 속에서 한국현대사 속의 제노사이드를 진지하게 돌아보거나, 현대 한국사회 내의 소수자들(홀로코스트 당시의 유대인이나 집시와 같은 존재)에 대한 폭력적 타자화를 냉엄하게 경계하는 목소리는 거의 완벽하게 부재했다."


"놀랍게도 한때 논란이 됐던 이른바 ‘교학사 교과서’는 물론, 8종의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모두 한국현대사의 제노사이드 문제를 상당정도 회피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었고, 심지어 일부 교과서는 사실상 제노사이드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서술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컨대 8종의 교과서는 3만여명의 민간인이 대량으로 학살된 제주4·3사건의 원인으로 공히 “공산주의자” “남로당” “좌익”의 무장봉기를 주요하게 강조했다. 반면에 1947년 이래 우익청년단원들의 제주도민을 향한 무차별적 폭력에 대해 ‘간략하게라도’ 언급한 교과서는 전체의 절반에 해당하는 4종에 불과했다. 특히 제주도민 전체를 “빨갱이”로 낙인찍었던 일부 지휘관들의 폭력적 타자 인식, 혹은 1948년 11월 초토화작전 진행 이후 남녀노소를 불문한 무차별적 학살이 더욱 광범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 등을 명확하게 서술한 경우는 단 하나도 없었다. 더불어 여수, 순천, 보성, 벌교, 구례 등에서 민간인 수천명의 희생을 낳았던 여순사건에 대해서도 2종의 교과서만이 민간인 희생 사실을 아주 간략히 언급했을 뿐, 모든 교과서들이 공히 여순사건을 군 내부의 반란 사건으로만 묘사했다."


"독일의 홀로코스트 교육은 지금의 한국사회에도 매우 시사적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적 약자나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폭력적 낙인과 타자화 과정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일부 보수언론은 정부 비판적인 정치인과 지식인들에 대해 ‘종북’이라는 딱지를 마구잡이로 붙이는가 하면, 특정 인터넷 사이트는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여성, 특정 지역민과 같은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을 아무렇지 않게 인간 이하의 존재로 희화하여 조롱하곤 한다. 제노사이드에 관한 기존의 주요 논저들에 의하면, 이같은 타자화와 비인간화 과정은 세계사 속 모든 제노사이드의 공통적인 초기단계로 간주된다. 우리 스스로 민감하게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주변에 게토와 아우슈비츠들이 지속적으로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하는 나의 코멘트.


오늘날의 시점에서 아주 적절한 논평이다. 이 글의 주장과 같이, 한국전쟁 당시의 제노사이드는 물론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 시 저질러진 학살에서 가해자이기도 했음을 기억-인지하는 한국인들은 드물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피해자의 역사 혹은 자수성가의 역사로만 기억하며 때로 자신들이 가해자이기도 했다는 사실, 누군가는 그 역사 속에서 짓밟혔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놀랄만큼 무감각하다; 대표적으로 주인공이 베트남 전에 참전해 민간인들을 구하는 역할로 나오는 영화 <국제시장>의 성공을 보라--만약 일본인들이 '조선에 가서 가난하고 미개한 조선인들을 구하고 돕는 일본인'을 영화화했다면 <국제시장>에 환호한 한국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여기에는 자신은 오로지 피해자로서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으며 절대로 타인에게 피해와 고통을 준 가해자일 수는 없다는 의식, 우리가 책임져야 할 대상으로서의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무책임의 '유아적인' 의식구조가 있다.


이처럼 열악한 자기이해는 한국사회의 일상적인 국면에 나타나는 갖가지 폭력과 차별로 이어진다. 수많은 남성들은 여성혐오/폄하를 일상에서 거리낌없이 실천하면서--많은 경우 그들은 자신들이 폭력을 실천할 가능성에 대해서 최소한의 자의식조차 결여한다--'여성상위시대'를 한탄하고, '역겨운 호모새끼들'에 대한 혐오감을 토로하는 이성애자들은 자신들의 일상적인 발언이 갖는 폭력성엔 무감각하며, 하층계급 아이들을 다른 학교로 내쫓고 싶은 상류층들은 계급갈등에서 자신들이야말로 병균같은 존재임을 자각하지 못한다. 오늘도 어디선가 악플을 달고 있는 이를 붙잡아 물어보면 사디스트라기보다는 차라리 유치한 정신상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해외에서 겪은 인종차별에 발끈하는 한국인들은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출신의 '유색인종' 앞에서 거의 예외없이 자신의 인종주의적 본성을 드러낸다; 한국인들의 인종차별의식에 대해 진지하게 조사해보면 한국사회에 비할 때 19세기 영국이 상대적으로 인종적으로 평등한 사회였다는 충격적인 결론과 마주할지도 모른다.


타자를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대하는 태도, 자신이 삶의 어느 국면에서 언제든 가해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자의식, 타인의 고통에 대한 책임감--지난 10여년 간 온라인 공간에서 우리가 목도한 진실은 우리 스스로가 점차 이러한 것들을 명백하게 결여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 결과적으로 인터넷, 대형 커뮤니티, 온라인 상의 소통이 서로 간의 폭력으로 얼룩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익명화된 온라인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구조에서 점차 타자에 대한 책임이 사라져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우리 자신들의 진짜 문제인 것이다. 정치적 혼란과 무능함, 비효율, 부정부패에 대해 어떠한 반성도 결여한 우파 정부들과 그 수반들은 그런 점에서 문자 그대로 시대정신을 체현한 상징물이며, 기사에서 언급된 역사교과서들은 우리의 의식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다. 만약 한국인들에게 아직 자신들이 처할 상황을 바꿀 기회가 남아있다면, 이는 부분적으로 이러한 무책임의 정신구조를 끊어내는 것에서부터만이 가능할 것이다. 타자에 대한 책임은, 그것이 홉스적인 논리든 우애와 연대, 동질감의 논리든, 시민사회의 출발점이다. 적어도 시민사회의 구축이라는 면에서 한국은 진정으로 근대적 이념형에 도달하지 못했음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노력해볼 수 있는 미래 중 하나는 바로 그러한 공중의 건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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