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7-28일 일기. 이사.

Comment 2015. 3. 1. 01:28

1.


버릴 것들을 버리고, 짐을 싸고, 청소를 하는데 2시간 반 정도 걸렸다. 새로 들어올 사람이 거의 손 댈 필요가 없을 될 정도라 자부한다(냉장고만 20분 넘게 닦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 번 정도 오가면 이사가 끝날 듯 싶다. 입주할 방 청소상태가 심각한 수준이었는데, 부디 그동안 약간의 개선이 있었기를 바란다. 내일 오후까지 청소에 매달려 있기에는 하루하루가 아깝다. 다음 주 개강하는 수업들을 준비하고, 프로젝트를 조금 더 진척시켜야 하며, 마무리를 못한 세미나들을 정리해야 한다. 내가 따로 계획해온 독서는 손도 대지 못한 채임에도 벌써 이 모양이다. 5월까지는 딱 밥값만큼 소득이 있을 예정이니 3월까지는 방학동안 아껴둔 돈을 조금씩 풀어가며 평형을 찾을 생각이다. 나는 역동적인 만큼이나 균형을 원하는 사람이라, 일단 스스로의 중심을 잡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균형이 있은 뒤에 비로소 동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동안 배워온 근대무도들의 정신이 알게 모르게 내 근본에 박혀 있다.


요 며칠 간의 불안과 걱정은 어느 한 가지 이유에 전적으로 기인한다기보다는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덮쳐온 것에 있었다. 유난히 큰 걱정이 있었지만, 그 하나 뿐이었다면 이렇게까지 흔들리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내일 이사를 마치면 그중 하나가 끝난다. 차곡차곡 다른 일들을 정리해나가다 보면 진흙탕 같던 마음도 어느덧 바닥에 가라앉은 흙알갱이 위에 곱게 고인 맑은 물처럼 되리라 기대한다. 불안정한 상태 자체를 넘어서는 경험이 나를 조금 더 튼튼하게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마음이 힘들었던 순간에 <괴테의 친화력>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오로지 희망없는 자들을 위해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져 있다." 국역본은 거의 초벌번역된 외국어를 읽는 느낌이었는데, 잘 읽히지 않는 문장들 사이에서 마치 매직 아이에서 솟아나온 이미지들처럼 내게로 튀어오는 몇몇 문장들이 있었다. 나는 잠시 동안 희망없는 자처럼 생각했고, 그 뒤에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희망을 부여받은 기분이 들었다. 온갖 불행이 삶을 엄습하는 세계에서 의연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방법을 역설하는 로크의 텍스트 또한 단순히 연구대상 이상의 독서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제 슬슬 후반부로 접어든 <미들마치>는, 나와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인물들을 아주 깊이, 인물과 나의 차이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까지 깊이 이해하기를 요구한다. 그 이해의 과정을 경유하는 과정에서 독자가 어떤 내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겉보기에 투박하고 흙내나는 19세기 영국소설의 가장 경이로운 지점일 것이다(엘리엇과 동시대인인 플로베르는 무척 매력적이고 어쩌면 엘리엇보다 한 발자국 먼저 달려나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보바리나 모로를 따라가면서 삶에 필요한 힘을 얻기는 쉽지 않다).


1년간 살아온 방의 마지막 밤, 마지막 새벽이 이렇게 흘러간다. 피곤이 어두컴컴한 잠의 영토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어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잠시 들어갔다 나오면 바깥이 밝아져 있을 테고, 나는 씻고 아침을 먹고 가방 서너개를 몸에 칭칭 두르고 방문을 나설 것이다.



2.


단언컨대 초극세사 걸레는 완벽한 가사도구다. 수건 찢어서 만든 걸레로 5분을 벅벅 문질러도 안 지워지던 물때가 시험 삼아 구입해본 초극세사 걸레질 몇 번에 말끔해지는 걸 보며 기술의 발전이 확실히 인간의 삶을 그 가장 말단의 지점에서부터 혁신적으로 바꾸어놓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긴다. 짐을 옮기고, 창틀을 닦고, 침대 프레임과 매트리스를 닦고, 사방에 퍼질러진 체모들을 치우고, 책상과 각종 수납공간을 닦고--걸레 냄새가 배는 게 싫어 페브리즈로 마감을 하고, 냉장고를 닦고, 신발장을 닦고, 화장실 거울을 닦고, 중간에 직원 분께서 오셔서 바닥 청소를 대신해주시고, 그 뒤에 다시 청소가 안 된 부분을 찾아서 닦고, 짐을 모두 풀고, 필요한 비품들을 사오고, 인터넷을 연결하고, 저녁식사를 한 뒤 내일 아침거리를 미리 사두고 ... 이제 몸만 씻으면 끝이다. 가사노동은 정직한 면이 있어서 처음에 아무리 커 보이는 일이라도 묵묵히 시간과 노동을 쏟다보면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는 끝난다. 전에 지인이 가사노동을 하면서 무언가 스스로가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가졌다는 느낌이 드는 게 좋다고 이야기했었는데, 특히 청소할 때마다 그 말을 떠올리게 된다; 예를 들어 설거지는, 기름 때만 없다면, 매우 우아한 노동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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