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1일 일기. 비오는 날.

Comment 2015. 2. 22. 05:03

1.


커튼 밖에 비치는 하늘이 잿빛이었다. 창문에 기대니 투둑거리는 리듬이 작게 들린다. 살짝 문을 열었다. 빗방울이 바닥을 검게 물들이기 위해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창틀을 타고 넘어들어왔다. 앙상하게 대만 남은 나뭇가지 사이 군데군데 붙어 있는 시든 잎들이 때때로 작게 흔들린다. 가까이 있는 가지들을 보니 어느새 검은빛, 잿빛을 털어내고 물기를 머금어 진한 붉은 빛이 되어 있었다. 끝에 맺힌 물방울이 은빛의 점으로 살짝 빛난다. 뻗어올라간 가지들을 잠시 멈추어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불어오는 바람에 그것들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만들어내는 타원의 궤도를 볼 수 있다. 매달린 물방울이 두 개였다가, 하나만 조금 더 크고 빛나는 모습으로 남았다가, 이윽고 그마저도 사라진다. 이따가 다시 본다면 어느새 무언가 생겨나 있겠지. 비가 조금씩 잦아드는지, 먼 도로에서 울려오는 엔진의 굉음, 가까운 어딘가의 건물 보일러가 뿜어대는 웅웅거리는 소리, 이 겨울을 살아낸 새들의 힘찬 울부짖음이 빗방울의 장막을 뚫고 방으로 들어온다. 빗소리가 점차 가늘어졌다 두꺼워졌다를 반복하는 사이 바람이 열린 틈새로 솔솔 흘러들어왔다. 한기와 온기 사이에 있는 무언가가 피부에 닿았고, 나는 창문을 닫았다. 새로운 한 해의 도래를 알리는 이른 봄비일까, 다시 추위로 세계를 이끌어가는 늦은 겨울비일까. 시간이 지나 우리가 갈림길의 어느 방향에 있었는지가 확실해질 때쯤 저 새들을 비롯해 맨몸으로 겨울을 나는 이들은 자신들의 생존 그 자체에서 또 한 번의 고비를 넘어섰음을 확인할 것이다.



2.


점심 때쯤 기숙사를 나설 때까지 비는 그치지 않았다. 만약의 추위를 대비해 코트, 목도리, 장갑, 등에 매는 가방으로 온 몸을 둘러쌌다. "고흐의 구두"라는 별명을 붙인 10년 묵은 신발은 아직 그럭저럭 방수가 된다. 안감은 해져서 회색빛으로 반질반질하게 너덜거리고, 곳곳에 튀어나온 실밥에 구두끈은 끊어진 부분을 적당히 묶어 놓았는데 최근에는 한쪽 지퍼고리까지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이 갈색 랜드로바는 그 절반 정도 나이를 먹은, 아직은 실밥 한 두 군데가 튀어나온 곳이 전부인 청바지와 여전히 잘 어울린다. 헐벗은 나무들이 축축해진 갈빛으로 서 있는 겨울 풍경에서 녹빛은 침엽수와 이끼만이었다. 침엽수가 사람이 심어놓은 자리에 얌전히 잘 서 있었다면, 이끼들은 산을 파헤쳐 만든 길 옆에는 돌로 만든 배수로와 축대들 틈새를 제멋대로 파고들었다. 비오는 날에 가장 기운찬 것은 그들 뿐이었다.


 삼거리에서 후배를 만나 연구실로 갔다. 가는 길 곳곳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고, 계단에 쌓인 하얀 까치똥 자욱은 아직 씻겨내려가지 않은 채 이곳이 까치떼의 화장실임을 보여주었다. 연휴 기간 사람의 흔적은 없었고 불켜진 연구실엔 누군가의 가방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부탁받은 책을 건네주고 점심을 얻어 먹었다. 대학원생 조교로 처음 가르쳤던 학부 신입생이 이제 다음 달이면 석사과정생이 된다. 그 시절 내게 중요했던 질문들과 그것들을 풀기 위해 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다음 약속을 위해 일어서야 하는 시간에도 여전히 빗방울은 가늘어 지지 않았다. 바람에 날이 서리지 않은, 딱 걷기 좋은 빗속이라 천천히 걸어 내려가기로 마음 먹었다. 약속장소 직전까지 20여분 간의 여정에도 이야기는 이어졌다. 나의 지난 고민들이 전적으로 나만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빗줄기는 부드럽게 외투 위에 착륙했고 나는 몸 전체를 감싸는 온기를 만끽하며 조용히 물방울을 털어내었다.


두 번째 약속 때는 조금 걸어 서양과자, 10년 전에는 아무도 몰랐지만 지금은 왠지 모르게 이름만은 흔해진 마카롱을 파는 곳으로 갔다. 낙성대 역 근처의 블록을 채운 층층의 건물들은 비를 먹고 한층 더 짙은 잿빛이 되어 서 있었다. 조금은 지저분한 길거리에 드문드문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주차된 차들 틈새로 가게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랜만에 보지만 할 이야기는 많았다. 영화, 행정, 앞으로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 긴 터널을 빠져 나왔지만 그 다음도 (아마 조금은 나을)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우리가 이야기했던 건 빛이 없는 터널 속을 더듬어 나아가는 삶에 관해서였던 듯 싶다. 여러 이야기를 거쳤고 서점에 가기 위해 다시 나왔다. 비는 아주 약해져서 우산을 접고 걸었다. 모든 곳에서 몰락과 퇴행을 마주하는 세계와 그 속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적절한 날씨였다. 나는 우리가 언젠가 맞이할 최악의 순간에 (최선은 아니더라도) 최악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리고 그 이후 세계를 새로 시작할 기회가 왔을 때 이전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기르는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자본주의의 모순이 이 모든 일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세요?"라는 질문에 대한 내 나름의 맑스주의적 답변은 이런 것이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산을 폈다. 녹두행 버스 뒷좌석에서 불안정한 미래, 오로지 결혼과 취직 질문이라는 형식으로만 관심을 표현할 수 있는 어른들에 대해 말했다. <그날이 오면>에서 루만, 푸코, 아도르노를 선물했다(그리고 마슈레를 선물받았다). 좋은 책과 좋은 식사를 제외하면, 결국 돈은 다른 이들의 삶에 무언가를 더 해줄 수 있을 때에만 가치를 갖는다--그 무언가가 좋은 책일 수 있다면 가장 좋다.


우산을 펴고 버스 정류장 앞에서 잠시 섰다가 고시를 준비하는 고등학교 동창에게 즉흥적으로 연락했다. (그 사이에 벤담과, 시에예스와, 대중문화에 대한 논문집을 또 샀다) 몇 주 전 밤 중 술이 들어간 목소리로 지금 사람들이 모인 자리로 올 수 있냐고 물었다. 그때 가지 못한 것이 미안하여 이른 저녁 시간에 불렀다. 가벼운 식사를 했을 뿐이라 더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종종 가던 쌀국수 가게에 갔다. 가랑비도 이슬비도 아닌 무언가 사이를 뚫고 올라갔다. 저만치 "눈꽃 빙수" 간판이 보였는데, 가보니 겨울을 맞아 탕수육과 족발을 함께 팔고 있었다. 돼지고기 냄새와 튀김 냄새 틈새로 곱게 간 우유얼음을 먹기도 무엇하여 다른 오래된 찻집에 갔다. 고등학교 친구 중에서 지금 보았을 떄 그 시절 추억과 연락이 잘 되지 않는--나는 스마트폰을 쓰지 않아서 다들 잘 소식이 닿지 않는다--친구들의 근황을 전해듣는 것 이상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것 같지는 않다. 이 기준으로 보면 이 친구는 소수파인 셈이었다. 위염이 신경 쓰여 생각차를 마시고 한참 있다가 매실차를 마셨다. 대학교육의 붕괴, 행정과 조직, 학부생들의 읽기와 쓰기, 도무지 나아질 기미라고는 보이지 않는 우리 고향의 후진성에 대해 사적인 경험과 공적인 지식을 오가며 이야기했다. 저녁 8시쯤이면 끝나고 올라갈 줄 알았는데 간만의 이야기라 그런지 말이 길어졌다. 1시에 자리를 옮겨야 했다. "김밥천국"이라는 타이틀을 단 가게 중에 분위기는 허름하지만 식사는 괜찮은 곳으로 친구를 이끌었다. 계란말이 김밥과 모듬 돈까스를 시켰고, 친구는 배가 고팠는지 딸려 나온 밥과 우동까지 남김없이 먹었다. 끔찍한 아저씨들이 나와서 꼰대짓을 했던 동문회의 기억, 여자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성매매 경험을 즐겁게 공유하는 남자애들 틈새에 억지로 끼어 옆 사람과 홀로 다른 주제를 떠들었던--그거라도 안 했으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시간들을 이야기했다. 반성폭력에 어깃장을 놓던 애들, 후배들 장터하는 데 나타나서 선배랍시고 사람들에게 억지로 술을 먹이고 정작 자기들은 배달 치킨을 시켜먹었던 머저리같은 개새끼들에 관해 이야기했다. 끔찍하고 역겨운 경험을 끔찍하고 역겹다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위안이 된다.



1시 반에 기숙사를 향해 출발했다. 밤비는 질척거렸지만, 연휴 전후로 놀랄만큼 살이 쪄서 조금이라도 더 걷고 싶었다. 비오는 새벽 오르막길을 걸으며 통화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다행이다. 녹두 거리에서 빗방울은 바닥에 얌전히 달라붙어 있었다면, 숲과 산 옆의 도로는 피어오른 물안개로 가득했다. 20미터 앞을 보기 힘든 밤길을 걸으며 어릴 적 보던 <전설의 고향>에서 드라이아이스로 만들어낸 초보적이고 귀여운 특수효과를 떠올렸다. 건물 연구실에는 아무도 없는 듯 했으나 가로등만은 밝아서 안개를 뚫고, 아니 안개를 통해 자신의 빛을 은은하게 모든 방향으로 퍼트릴 수 있었다. 내가 덩치가 크고 인상이 험악한, 밤거리에서 다른 이들이 알아서 피해가는 성인 남성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니 이 길을 애초에 이런 시간대에 걸어다닐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까. 물안개의 불확실성으로부터 무언가 미적인 것을 보는 눈은 사실 매우 제한된 범위의 사람들에게나 열려있는 경험이지 않겠는가.... 들어왔을 때 비가 우산에 젖은 이상으로 온 몸은 땀에 젖어 있었다. 씻고, 일기를 썼다...다 쓴 지금 우산의 물기는 말라 방 안으로 다시 가져다 두었다.


창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놓은 채 잠들고 싶은 유혹이 큰 밤이다. 새벽에도 우는 새가 있었다. 일어났을 때 비가 그치지 않았기를 바란다. 하루는 온종일 밖에서 비 사이를 거닐었다면 다른 하루는 방 이불 속을 뒹굴거리면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는 쪽이 좋지 않을까, 다른 무엇보다도 비오는 날에... 모든 것은 일어나보면 알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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