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호교차성 혹은 퀴어-맑스주의에 대한 노트

Comment 2015. 2. 17. 13:24


원문: <억압과 착취, 마르크스주의와 '상호교차성'> [http://rreload.tistory.com/144]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이 이야기하는 세 가지 핵심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는 모든 형태의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 둘째,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한 사람의 경험은 다른 사람의 경험과 다르다. 왜냐하면 각자가 처한 억압과 착취의 물적 토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

[세 번째는] 바로, 한 형태의 억압이 다른 형태의 억압에 의해 규정되거나 또는 다른 형태의 억압을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이 성차별적으로 나타날 수 있고, 또는 여성억압이 인종차별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현상들에서는 서로 다른 억압들을 따로 떼어서 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이미 모든 억압이 자본주의에 그 물적 토대를 두고 있다는 면에서 다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모든 착취와 억압이 서로 얽혀있다는 주장은, 최소한 모든 억압이 동일한 사회적 구조에 근간하고 있다는 상호교차성에 대한 인식이 미약하게나마 이미 [좌파의 생각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상호교차성은 더 나아가서, 예를 들면 흑인 여성이 한 편으로는 성차별주의를 경험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성차별주의와는 별개인 인종차별주의를 경험한다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현실에서, 흑인 여성이 겪는 성차별주의는 종종 그들의 피부색에 의해 규정되고, 그들이 겪는 인종주의는 그들의 성에 의해 규정된다."





링크한 글은 이론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글이지만 매우 중요한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 요컨대 한 형태의 억압이 다른 형태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조금 더 맑스주의적으로 옮겨 말하자면 어떤 억압/착취적 실천에 여러 억압기제가 '매개'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조금 더 이론적인 고민을 덧붙여 원래의 글에서 던져진 질문을 조금 더 발전시켜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나는 주로 인종-성 정체성 사이의 연계를 언급한 원문과는 달리 퀴어 이론과 맑스주의의 접합이라는 문제의식 하에서 '퀴어 노동자 주체'의 사례를 들고 싶다. 보통 우리는 퀴어가 겪는 사회적 적대와 노동자가 겪는 사회적 적대가 분리될 수 있는 요소인 것처럼 인식한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경우에 두 적대/억압기제는 결합하여 작동한다. 실제로 퀴어 노동자는 성적 지향이 공개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노동권이 보다 심각하게 침해될 가능성과 직면한다. (특히 노동조합에서 그를 보호하지 않는 경우에) 더 쉽게 해고되고, 더 적은 임금을 받고, 자본가 혹은 사용자와의 관계에서 좀 더 취약한 위치로 내몰릴 수 있다--그가 다른 이들과 '이성애적 실천'을 공유하지 않는만큼 노동권 침해의 정도는 더 커질 수 있다; 성공한 퀴어 전문직은, 한국에서 독립적 지위를 점유한 고소득 전문직 자체가 사실은 소수인 것 이상으로 드물다.


 내가 말하고 싶은 요점은 이러한 차별이 기존의 계급적 억압, 즉 자본가/사용자의 노동력 착취라는 '형식'으로 '표현'된다는 것이다. 즉 임금노동이 모든 곳을 뒤덮은 사회에서 퀴어 노동자는 성적 지향으로 인한 차별을 자본주의적 계급갈등이라는 형식으로 경험한다. 달리 말한다면, 자본주의적 계급갈등은 단순히 그 자체가 하나의 억압기제일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억압기제가 표현되는 형식이기도 하다. 성차별이 매우 큰 한국사회의 경우 자본가가 여성 노동자들에게 더 적은 임금을 지불하고 또 더 쉽게 해고하면서, 다시 말해 성차별 기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노동자들로부터 자신의 이윤을 보다 많이 획득하는 사례를 부지기수로 볼 수 있다. 나는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고 싶다.


1) 성차에 따른 차별과 억압은, 프로이트적 정신분석의 논리로 비유하자면 현실에서 억압된 갖가지 기제들이 꿈이라는 형식을 통해 표출되듯,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행위를 통해 현실화된다. 노동권의 침해사례를 들여다보면 성, 성적 지향, 나이, 인종, 민족, 국적, 지역, 학력 및 학벌에 따른 갖가지 차별이 거기에 아로새겨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 자본주의적 착취는 성차와 같은 사회적 억압과 결합될 때 스스로를 보다 명백하게 드러낸다. 즉 여성 / 퀴어 노동자를 포함해 직접적으로 계급갈등에서 유발하지 않은 다른 억압 기제들이 중층적으로 작용하는 사례야말로 노동자에 대한 자본가의 착취 및 억압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들에 주목해야 한다. 나이 어리고 교육받지 못한 퀴어 비정규직 노동자가 마주하는 가혹한 조건이 그 자체가 자본의 착취가 건재함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사례임을 포착하는 것이 맑스주의 비평가의 의무다.

3) 자본가는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이러한 억압기제를 통해 노동자들과의 대립구도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쉽게 말해, 계급갈등의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다양한 사회적 편견 및 억압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은 자본가에게 매우 중요한 전략적 이점으로 작용한다; 성차 및 지향의 차이에 따른 사회적 차별은 자본가가 노동으로부터 자신의 이윤을 확보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매우 편리한 무기다(19세기 영국에서 자본가들이 더 적은 임금을 주고 고용할 수 있는 여성 및 아동노동 착취를 통해 남성 노동자들을 무력화시킨 고전적인 사례를 상기하라). 따라서 맑스주의자들은 성차 및 지향차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억압기제에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이는 그것들이 그 자체로 비윤리적이어서만이 아니라 언제든 자본가들의 전략적 이점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인다면 나는 모든 사회적 억압이 가짜이며 그 모두가 계급갈등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자체로는 서로 환원될 수 없는 억압기제들이 현실의 갈등에서는 서로 뒤엉킨 형태로 작동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노동력을 포함한 거의 모든 것들이 상품화되었으며 대다수의 사회구성원들이 자신의 노동을 판매해야 살아갈 수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여러 사회적 억압/차별기제들이 계급갈등 및 착취의 형태로 표현될 수 있음을 지적할 뿐이다. 이러한 이론적 전제가 갖는 실천적 함의는 다음과 같다. 페미니스트 및 퀴어 운동가를 포함해 다양한 사회적 억압/차별에 대항하는 이들은 그들이 거부하는 사회적 차별이 계급착취의 형태를 통해 표현된다는 점에서 자본과 계급갈등의 동학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맑스주의자들은 (계급갈등 이외의) 사회적 억압이 단 하나라도 존재하는 한 그것이 자본의 노동의 분할 및 착취를 보다 용이하게 해주는 요소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들의 접합양태를 주목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