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푸코. <성의 역사> 1권. 세미나 간/종료 후. [140105-20]

Reading 2014. 3. 18. 12:44


*2014년 1월 5일 페이스북

<성의 역사> 1권은 한 너댓번 째 읽지만 그래도 새롭고 재밌다(국역본은 그 사이에 개역본이 또 나왔다! 부제가 "앎의 의지"에서 "지식의 의지"로 바뀌었다). 발레리였던가, 최초로 고지에 올라선 사람은 어느 방향으로든지 나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 이 책은 그 표현이 정말 잘 들어맞는다. 이 얇은 책 한 권으로 정말 별별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읽어도 되는 책은 아니다. <말과 사물>이나 <지식의 고고학>에 비하면 훨씬 평이한 용어로 전개되지만, 기본적으로 푸코 특유의 사물을 비스듬히 보는 시각은 어쩌면 더 분명하다. 동시에 때로는 뒤틀고 때로는 우회하는 언어는 단순히 저자의 기묘한 성격을 드러낸다기보다는 (적어도 <성의 역사> 1권에서 '현란함'은 푸코를 묘사하는데 알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의 사유 자체의 비스듬함, 그가 독자들에게 어떻게든 '사물의 질서'의 측면을 보여주려 한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근본적으로 사고의 구조를 수정하기를 강요하는 텍스트는 정말로 드물다고 할 때(헤겔, KM, 프로이트 정도가 떠오른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고 그 뒤로 수년간 요동칠 방법론을 담아낸 이 책은 그 소수에 속한다. 푸코는 예상치 않은 곳에서 멈추고, 질문하고, 짐짓 거리를 두어 비꼬고, 조롱하고, 크게 돌다가 갑작스레 직선으로 찔러온다. 부분적으로는 번역본의 미숙함에서도 비롯되는 그 모든 수사의 혼란스러움은 그가 반복적으로, 때로는 지겨울 정도로 요구하는 사유구조의 전환에 따르는 어려움을 감안할 때 기꺼이 용서받을 수 있다. 젊은 헤겔이 그러하듯, 그는 아직 아무도 어떻게 가야할지 모르는 길을 앞장서서 가면서 자신이 밟아나가야 할 길을 스스로 닦고 있었다. 수년에 걸쳐 개념적 도구가 수정되었다는 사실은 수정이 끝나기 전의 연구가 충분히 숙고되지 않은 결과물이라는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사유의 첨단에 서 있는 사람의 부단한 전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가 서 있던 첨단은 오늘날에도 일반적인 인식의 지평 앞쪽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사유와 논리를 따라가기 위해 그처럼 생각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그 점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가장 모범적인 독자의 태도를 요구한다. 최종적으로 그가 펼쳐놓는 것은 한 편의 그림이다. 세상의 모든 혈관을 흐르는 권력, 만물을 꿰뚫고자 하는 차디찬 기계 같은 시선들, 사람들을 부드럽게 '더 나은/효율적인 삶'으로 인도하는 주체화의 과정, 잉태의 순간부터 자신을 둘러싸는 시선들에 포위되어있으며 마침내 모든 지식을 토해놓고 숨을 거두는 인간존재들, 그것들을 재빨리 붙잡고 걷어치우는 손길들. 베버나 아도르노가 그려낸 최악의 사회상도 푸코가 결코 한번에 전체를 언어화하지는 않지만 텍스트 자체를 통해 암시하는 마치 유기체와 같이 살아 숨쉬는 권력=사회만큼 불길하지는 않다. 그 불길한 청사진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푸코를 충실하게 읽는 독자에게 가장 난해하게, 하지만 절박하게 다가온다. 권력에게 보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이 되라는 요구만큼 저항자를 옥죄는 것은 없기에, 그 대안 또한 부분적으로는 비스듬한 사유를 요구할지도 모른다. 지금도 빠른 속도로 권력은 '합리적'이 되고 있고 그 품을 벗어날 여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매우 엄격하고 성실한 교사로서의 푸코는 권력의 지독함과 함께 단순한 해방의 불가능함, 순진한 실천이 마찬가지로 권력의 부분임을 가르친다. 자기 자신조차 답변하기 어려운 문제를 낸 사람과 같은 정도의 각오가 없다면 답변은 영원히 가능하지 않을 터이다.


*2014년 1월 20일 페이스북.


오늘 푸코 세미나에서 드디어 <성의 역사> 1권이 끝났다. 사전에 전혀 모르고 있었던 최신 개역판(내가 갖고 있는 판본의 부제가 "앎의 의지"였는데, 최신판에서는 "지식의 의지"로 바뀌었다...) 때문에 세미나 구성원들 간 쪽수 맞추는 게 좀 짜증나긴 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 다시 한번 철저하게, 꼼꼼하게 이 책을 읽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고, 배울 수 있는 것도 많았다. 어떤 의미에서 고전은 새로 읽을 때마다 이전의 읽기가 얼마나 불충분했는지를 확인하는 걸 가능하게 해주는 책이다. 예전에 충분히 읽었고 거의 다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새롭게 체크하고 각주를 달 항목들, 새롭게 의미파악이 되는 부분들, 여전히 어떤 이유에서든지간에 이해가 불투명한 항목들이 생겼다.

<감시와 처벌> -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 <성의 역사> 1권("앎의 의지") - <안전, 영토, 인구> -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으로 이어지는 흐름의 한 가운데에 있는 이 텍스트는 생명관리정치bio-politics의 언급만이 아니라 권력을 포착하고 비판적으로 사유하기 위한 푸코의 개념틀이 이전의 저작들보다 한층 성숙하고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 역시도 '현재진행형'임을 감안해야한다--적어도 위의 모든 논의들이 행해지던 시점에서 푸코의 권력이론은 계속해서 변형중에 있었다. 아마도 <감시와 처벌>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두 책의 출간 사이에 수행된 강의 초반부에서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지 않은 새로운 권력의 형태, 곧 조절하고, 살리고, 번식시키고, 기르는 권력의 개념화일 것이다. <감시와 처벌>에서 규율권력의 문제를 조명했던 푸코는 개인적인 단위에서 감시하고 벌하고, 어떤 질서의 시선을 새겨넣는 의미에서의 주체화와는 조금 다른 시점에서 행해지는 권력을 언급한다. 바로 다음 해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에서 "조절하고 안전하게 보호하는 권력"으로 언급될 이러한 권력은 부르주아지들과 같은 '개인'이 아닌 프롤레타리아들, 다시 말해 "인구집단"multitude을 향하고 그것을 통제한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겠지만, 푸코와 맑스의 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맑스 자신이 당초 계획했던 국가와 세계시장의 분석을 수행하지 못하고 죽은 점을 포함해서 맑스주의에서 국가에 관한 설명은 상대적으로 부족했고, 푸코는 어떤 면에서 국가 내의 지배라는 문제에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물론 여러 가지 이유에서 둘을 단순히 합치는 걸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리고 푸코가 꽤나 반복적으로 맑시스트들을 향한 가열찬 비판을 해왔다고 해서 푸코의 인식틀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계급구분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실제로 <앎의 의지> 4장 말미에 보면 푸코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성의 장치가 작동했다고 주장하며, 이러한 계급구분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진술한다.

어쨌건, 새로운 종류의 권력은 권력과 억압의 등가관계를 깨트리는 푸코의 저 유명한 진술과 이어진다. 인구를 늘리고, 유지하고, 위생과 공중보건에 신경쓰는 권력, 먹이고 키우는 권력은 결코 단순한 형태의 억압과 규율의 강요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물론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푸코는 규율권력을 조절권력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양자가 공존하면서 작동함을 이야기한다--규율권력이 개인과 그 내면에 간여하고 자국을 남기는 권력이라면, 조절권력은 인간집단,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내 표현으로 '자원으로서의 인간'human resource을 향하는 권력이다. 마치 양식장에서, 축사에서 짐승을 기르듯, 권력은 종으로서의 인간을 기르며 그것이 어떤 면에서는 가장 광범위한 형태의 지배를 가능케한다.

또 다른 키워드. '주체없는 지배'의 문제.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에서부터 언급되지만, 푸코는 주체를 상정하지 않고 바라볼 때 비로소 지배 혹은 권력관계의 작동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한다. 좀 더 상술하자면, 푸코가 말하는 "아래로부터의 권력 분석"이란 단순히 미시적인 장치에서 생각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표현은 푸코가 "위로부터의 분석", "연역"이라고 말하는 방식, 다시 말해 (정통맑스주의가 그랬듯이) 권력의 일반이론을 가정하고 여기에 개별 사실들을 끼워맞추는 데 만족하는 대신, 현실에 상존하는 지배의 사실로부터 시작해야한다는 의미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억압의 이론이 있고 그 뒤에 억압하는/받는 자가 출현하는 게 아니라, 방법론적으로 지배받는 자, 혹은 지배라는 현상을 포착하고 그로부터 권력에 대한 추상적인 탐구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푸코가 새로이 목도하는 근대의 문제가 바로 "주체없는 지배"의 등장이다. 이전에 왕, 귀족, 특정한 지배층의 존재로부터, 그리고 그들의 탐욕과 악의로부터 권력과 지배, 억압이 나왔다고 한다면, (물론 그런 것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푸코는 주장하지 않는다) 이제 그런 주체를 찾을 수 없는 형태의 지배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규율권력과 조절권력은 양자 모두 공히 이러한 형태의 지배를 위한 도구이기도 하다. 우리는 박근혜든, 이명박이든 특정한 지배자를 몰아낼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지배받는다는 사실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이제 새로운 형태의 권력 비판이 요구된다. 푸코가 행하려던 작업은 분명히 이런 맥락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아마도 알튀세를 포함해 "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가"를 질문했던 비판적 사상가들의 무리 중에서도 푸코가 고유성을 주장할 수 있다면, 이는 그가 근대 사회 자체의, 직접적으로 자유주의 국가 내부에서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지배, 주체없는 지배--아도르노가 "관리되는 사회"라고 불렀던 것, 베버의 "쇠우리"iron-cage--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개념화하려고 했던 이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주 많은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 텍스트, 동시에 계속해서 깊은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 텍스트. 어쨌든 이번의 만남은 끝났고, 다음 만남이 오기 전에 나는 그의 다른 사유물로 넘어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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