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고통, 유토피아, 예술의 관계 인용(아도르노, <미학강의1>)

Reading 2014. 10. 5. 12:10

"미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미가 상처와 맞닿지 않는 곳에서는, 미가 유토피아와 유토피아의 거리를 동시에 우리에게 구체화시킴으로써 현존재가 받는 모든 고통과 현존재의 모든 모순성을 그 내부에서 스스로 받아들임으로써 미가 출현해야 함에도 그렇지 않은 형식으로 출현하는 곳에서는, 미에 대해 원래부터 어떠한 논의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

나는 미에 대한 모든 논의에 들어 있는 가장 내부적인 모티브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미는 다른 것이 아닌, 유토피아의 출현으로 생각될 수 있다는 모티브에 대해 논의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모티브는 플라톤의 이론에서는 깃털에 대한 생각에서, 다시 말해 이의 제기에 대한 생각에서 매우 엄격하게 포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이의 제기는 조건 지어진 전체 세계에 대한 이의 제기와 동일한 의미입니다. 유토피아란 조건 지어진 세계에 대한 이의 제기가 그것 스스로는 성공에 이를 수 없고 오로지 가상schein으로서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름다운 것의 개념에는 숙명, 또는 체념적인 모멘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술적 가상의 공허함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이론을 모색한다면, 이 이론은 예술이 유토피아를 현재적인 유토피아로서 우리에게서 붙들고 있으며 예술에 처해 있는 현실을 대가로 해서 붙들고 있다는 것에서 모색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어느 곳이 아닌, 바로 이곳에서 그러한 이론이 모색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예술의 이중적 특성이 들어 있습니다. 예술은 비판적 예술로서, 그리고 무조건적인 것을 배신하지 않은 예술로서 현실에 저항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술은 무조건적인 것을 스스로 실현시키는 것을 포기함으로써 다시 현실과 얽히고 설키게 되며--품위가 떨어지면서 미천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해서 스스로 다시 단순히 존재하는 것, 현실의 구성 요소가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술에 대해, 예술의 권리, 특히 오늘날 예술의 권리에 대해 원래부터 제기될 수 있는 도덕적 물음입니다."

아도르노. <미학강의1>. 문병호 역. 세창출판사, 2014. 244-45[10강].


-- 나는 고통, 현재적인 것과 유토피아를 동시에 담는 예술의 이중적/변증법적 성격이 아도르노 미학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비판이론에 입각한 예술비평이 한편으로 예술의 이데올로기를 파헤칠 수 있게 하면서도 예술을 특정한 담론의 일부로 간주하는 단순하고 자기반복적인 주장으로 전락하지 않게 해준다. 위 문단은 짧고 분명하니만큼 추가적인 코멘트를 덧붙이지는 않겠다. 그러나 짧고 분명하다고 해서 곱씹지 않고 삼켜도 될 만큼 물렁물렁한 대목은 절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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