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레프트리뷰/프랜시스 멀헌 편. <좌파로 살다>. 소개 및 일부 인용

Reading 2014. 8. 24. 01:13

뉴레프트리뷰, 프랜시스 멀헌 편. <좌파로 살다: 좋은 삶을 고민한 문제적 인간들>. 유강은 역. 사계절, 2014. Trans. of _Lives on the Left: a Group Portrait_, ed. by Francis Mulhern, Verso:2011.


원제의 부제는 직역하면 "집단의 초상" 정도가 될 것이다. 번역은 전반적으로 괜찮다. 플로베르의 <감정교육>을 다룬 각주가 너무 형편없다는 게 마음에 걸리지만 (<감정교육>을 이런 방식으로 소개하는 건 그 독자가 소설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크게 흠잡을 데가 없다. 다른 글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나는 이 책에 단지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rl '님'의 인터뷰가 실렸다는 이유로 인해 흥미를 가졌고, 만델의 인터뷰가 매우 적은 분량만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흥미를 잃었다. 그러나 한번 뇌리에 박힌 책을 그냥 지나치기는 어려운 일이고, 더욱이 서명에 오롯이 '좌파'를 내건 한국어 대중서를 보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기 때문에--"진보로 살다" 따위로 출간하지 않은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사서 읽게 되었다. 원래 틈틈이 인터뷰 하나씩 골라가며 천천히 볼 생각이었는데 전 인터뷰를 예정보다 훨씬 빨리 읽었다. 그리고 아주 멋지고 유용한 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내 글이 어떠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더 많은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읽히길 바라며 글을 쓴다.



 부제로 달린 '집단의 초상'group portrait의 대략적인 면모를 재구성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다. 미주 및 역자후기를 제외하고 630쪽을 넘는 16편의 인터뷰는 다섯 파트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루카치와 (칼 코르쉬의 부인) 헤다 코르쉬의 회고적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구 맑스주의Western Marxism의 두 출발점을 보여준다. 2부에서 체코의 이르시 펠리칸, 인도의 K. 다모다란, 벨기에의 만델, 영국의 도로시 톰슨, 이탈리아의 루치오(루초) 콜레티 및 루치아나 카스텔리나, (멕시코를 포함한) 중남미의 아돌포 힐리는 2차 대전 및 전후 (소련의 치부가 드러나며 촉발된) 신좌파의 대두에 이르기까지 각지의 맑스주의자들이 어떠한 경험을 겪었는지를 보여준다. 사르트르, 촘스키, 데이비드 하비의 인터뷰가 수록된 3부는 (특히나 공산당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2부의 흐름과는 다른 맥락의 좌파-맑스주의자-지성들을 다루며, 4부는 브라질의 주앙 페드루 스테딜레João Pedro Stédile, 일본의 아사다 아키라, 중국의 왕후이와 같이 1990-2000년대에 활동했으며 꽤 다른 이력을 가진 인물들의 인터뷰를 담았다(아사다 아키라는 일본에서 신좌파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활동가인 스테딜레나 유럽의 기준을 적용하기 힘든 중국의 왕후이의 입장은 그 카테고리로 묶이기는 어렵다). 마지막 5부는 데이비드 하비가 조반니 아리기를 인터뷰하는 글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좌파로 살다>에 실린 글들 중 가장 시공간적으로 넓은 시점에서, 즉 자본주의의 역사 및 미래에 관해 말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정리 혹은 닫는 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이 책에서 뉴레프트리뷰New Left Review는 (주로 맑스주의적 시각에 기초하여) 20세기 좌파의 역사를 서구 맑스주의로 시작해서 신좌파로 이행한 뒤 각 주변부를 거쳐 전지구적 포커스에 도달하는 나름의 서사로 구축한다고 할 수 있겠다. 도로시 톰슨과의 대화가 하나의 예외가 될 수 있긴 하겠지만, 페미니즘이나 퀴어와 같은 주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신좌파 및 이후의 흐름을 다루면서 독일 및 프랑스의 좌파들이 다루어졌다면--사르트르는 그보다 좀 전의 세대이며, 알튀세르는 몇몇 인터뷰의 배경에 잠시 참조될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리기만이 아닌 월러스틴, 브레너나 (새로운) 종속이론가들처럼 전 지구적 시점을 제시하는 또 다른 연구자와의 대담이 포함되었다면 조금 더 풍성했으리라 생각한다.



 어쨌거나, 편자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좌파로 살다>의 현재와 같은 구성은 독특한 효과를 발생시킨다. 이른바 제1세계에 속한 이들의 대담은, 물론 시기 및 연령대를 고려할 수는 있겠지만, 대체로 이 책에서 가장 빈약한 편에 속한다. 가령 루카치나 콜레티의 글은 두 사람 자체 혹으 특정한 주제에 관심있는 편이 아니라면 그다지 흥미롭게 읽히지 않을 것이다(코르쉬에 대한 대화는 지적 경력이라기보다는 당시 동유럽에서 좌파로 살아간 한 사람의 삶을 가볍게 스케치한 쪽에 가깝다). 사르트르의 글 또한 (물론 정신분석에 맑스주의/사회이론을 대치시키면서 전자의 논리를 좀 더 긴장을 갖고 볼 수 있는 시각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사르트르가 푸코-들뢰즈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지적 전통, 곧 '정신분석에 거리두기'라는 모티프를 상기시킨다는 사실은 나에겐 흥미롭다) 뚜렷한 중심이 결여된, 마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는 느낌이며, 촘스키는 무난하게 깔끔하지만 밋밋하다. 만델과 카스텔리나는 분량이 너무 짧다. 즉 대체로 '제1세계' 또는 고전적인 좌파에 가까운 이들의 인터뷰는 이 책에서 전반적으로 생기가 결여되어 있고 흥미를 주지 못한다.


 이들과 대조적으로 지금도 여전히 생기 있게 읽힐 수 있는 글들은 어떤 면에서 '경계선'에 놓인 이들로부터 나온다. 예컨대 제1세계라고 해도 좌파-여성의 경험이 강조된 톰슨(참고로 전체 인터뷰에서 여성은 단 셋 뿐인데, 그나마 헤다 코르쉬의 인터뷰는 남편인 칼 코르쉬의 삶에 집중되어 있다-), 체코에서 소련의 프라하 침공을 겪은 펠리칸, 미국과 영국을 오가며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공간/지리학의 시점을 도입하며 서로 다른 지적 전통들 간의 연계를 강조하는 하비의 글이 보다 흥미롭다(나는 특히 하비의 인터뷰를 읽고 지금까지 두어 편 읽은 데 불과한 그의 저작들을 보다 신경써서 따라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책 전체를 통해서 가장 흥미로운 글들은 4부에 수록된 인터뷰, 곧 스테딜레, 아사다 아키라, 왕후이의 것들이다. 본래 광범위한 내용으로부터 핵심적인 요점들을 날카롭게 집어내는 재능을 갖춘 아사다 아키라는 일본공산당의 역사부터 시작해서, 좌파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파 및 마루야마와 같은 자유주의는 물론, 당대의 애니메이션, 서브컬처 및 문예비평에 이르기까지 거의 현대 일본'비평사'를 압축적으로 정리한다(아마 국내에 번역된 대담집 <현대일본의 비평> 및 <현대일본사상>을 읽은 독자라면 아사다의 설명이 조금 더 잘 다가올 것이다). 왕후이는 문혁-6.4(천안문) 사태 등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과거와, 그리고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의 논의들과 단절되었다는 점에서 시공간적으로 닫힌 세계에 있던 중국 담론장에서 급작스러운 서구적 논의의 수용과 함께 무슨 일들이 벌어지는가를 설명한다--물론 항상 동시대의 지배적인 권력을 매우 강하게, 거의 근원적인 무의식 수준에서부터 의식해야 한다는 이들의 조건 또한 덧붙여져야 할 것이다...쉽게 말해 우리는 왕후이가 묘사하는 중국 담론장을 3중으로 닫힌, 곧 시간-공간-권력이라는 측면에서 전부 폐쇄적인 성격이 아직도 강력하게 남아있는 장소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사다와 왕후이가 제시하는 묘사는 우리 한국인들 자신의 담론장을 비추어 보기 위한 예시로서도 주의깊게 읽힐 필요가 있다.


 물론 가장 재미있는 글은 역시 스테딜레의 이야기다. 아마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순전한 의미에서의 활동가에 가까운 위치에 놓인 이가 스테딜레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는 (인터뷰가 시행된 2002년까지의) 브라질의 맥락에서 농업 노동자들의 토지보유문제를 위해 대중적인 반자본-반정부적인 투쟁을 전개했으며 적어도 해당 시점까지는 꽤나 인상적인 성과를 낸 것처럼 보인다. (사회민주당을 포함한) 신자유주의 정부의 노골적인 합법적/비합법적인 탄압(여기에는 활동가들에 대한 납치, 고문 및 암살이 포함되어 있다)에 맞서 강렬한 의지와 생활력, 또 오늘날 특히 잊지 말아야 할 활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착취당하는 중남미의 활동가 답게 서구 국가들이 암암리에 어떤 압력을 브라질에 가하는지, 또 브라질의 좌파들이 맞은 난국에 대한 날카로운 코멘트 역시 탄복할 만하다. 이 유쾌하고 명민한 활동가의 인터뷰에서 인상깊은 대담을 몇 군데 인용하자. 이 대목 중의 일부는 오늘날 공식적인 정치적 투쟁에서 힘을 상실하고 (그에 못지 않게 무기력한, 고이다 못해 썩은 물에 가까운) 거대 야당에 투신하느냐의 여부만이 유의미한 의제처럼--당연히 이러한 의제는 대체로 그 발상부터 틀렸다--남아있는 무기력한 좌파 정치에 대한 고민을 위해서라도 주의 깊게 읽혀야 한다; 특히나 마지막 인용을 강조하고 싶다.


(아래 강조는 인용자)

"하나의 계급으로서 우리['땅 없는 농업 노동자 운동'Movimento dos Trabalhadores Rurais Sem Terra]가 하는 일은 우리가 배운 걸 전해주는 겁니다. 토지 점거에 관한 한,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잘 압니다--모두 다는 아닐지라도 많이 알지요. 모든 사람이 참여하고, 모든 가족이 함께해야 합니다. 경찰을 피하기 위해 밤중에 해야 하지요.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열다섯에서 스무 명 정도로 자기들끼리 위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 이 가족들은 하룻밤만에 땅을 점유하고 숙소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다음 날 아침에 소유주가 사태를 깨닫고 나면 이미 천막촌이 세워져 있습니다. 위원회는 한 가족을 뽑아서 근처를 답사하면서 물은 어디서 구하고 나무 그늘은 어디에 있는지를 찾게 합니다. 야외에 천막촌을 세우는 데는 많은 요소들이 작용합니다. [...] 이런 식의 실전 경험이 점거의 실제 결과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하지만 성공 여부는 사실 참여하는 가족의 수에 좌우됩니다--더 많은 가족이 참여할수록 토지 소유주와 경찰 쪽으로 힘의 균형이 기울지 않게 되죠. 참여하는 가족이 적을수록 쫓아내기가 쉽고, 정치적 반향도 더 제한됩니다." (464-65)

: 경험의 축적과 전수


"우리는 대중적인 사회 운동이고, 우리의 주된 목표는 사람들을 모아서 투쟁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땅 없는 농업 노동자 운동'에 참여할까요? 회원 자격이나 회원증 같은 건 없지만, '땅 없는 농업 노동자 운동'에 들어가고 싶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가입하는 유일한 방법은 어느 한 곳의 토지 점거에 참여해서 현장에서 활동하는 겁니다. 우리가 회원을 모으는 방법은 이런 식입니다. 통계적으로 정확히 밝히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우리는 정당이나 노동조합 식의 관료적 방식에서 벗어나고 싶었습니다--가입서를 제출하고 회비를 납부하는 식을 탈피하고 싶었던 겁니다. 가난하고 문맹인 농민들을 기반으로 삼으려면 가급적 공개적으로 활동을 하는 방법을 개발할 필요가 있습니다. 갖가지 장벽이나 관료적인 절차를 세우는 대신 사람들을 끌어들여야 하는 거지요." (467)

: 운동의 대상을 위한 진입장벽 낮추기


"정부의 농업발전부 장관인 라울 중그만은 TV에 출연해서 땅 없는 농민들에게 우편으로 국립식민개척·토지개혁연구소에 등록하라고 호소하는 프로그램을 개시했습니다. 등록을 하면 정부가 땅을 나눠주겠다고 약속하면서 말이죠. 작은 반응이 있을 테고 그러면 우리의 사기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한 겁니다. 우리는 이 도전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근거지로 가서 우편등록 캠페인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부가 이렇게 선전하는 걸 보십시오. 땅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등록을 해야겠죠? 자, 우리 일괄적으로 응합시다. 각자 하는 게 아니라 조직화를 해서 집단적으로 등록을 합시다." 2001년 한 해 동안 85만 7천 가구가 등록했고, 정부는 곤경에 빠지게 됐죠--어느 누구에게도 땅을 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사람에게 땅을 분배해야 했으니까요. 브라질에 수백만의 땅 없는 농민이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는 간단하고 효율적인 방법이었습니다." (467-68)

: 조직화의 힘


"[질문: 북미와 유럽의 직접행동 그룹과 비정부기구들이 '땅 없는 농업 노동자 운동'과 자매 운동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활동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당신네 나라의 신자유주의 정부를 무너트리는 겁니다. 둘째는 외채를 탕감하는 일을 도와주십시오. 우리가 계속 재정적으로 의존하는 한--'외채'의 약탈이 의미하는 게 이런 거죠--국민들의 요구를 충족하는 경제 모델을 세우기가 불가능합니다. 셋째, 투쟁을 하세요--대중 투쟁을 창조하라는 겁니다. 당신네가 우리보다 생활수준이 높다고 해서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마세요. 우리를 착취하지 않고서 당신네가 지금과 같은 소비 유형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당신들이 사로잡혀 있는 소비주의를 바꾸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넷째, 오로지 착취만을 의미하는 브라질 농산물과 임산물을 수입하는 일을 중단하십시오. 목재, 마호가니 등등 아마존산 나무로 만들어지는 모든 목재가구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이세요. 당신네 정부와 기업들이 브라질 현지에 제재소와 목재 저장소를 운영하면서 본국으로 목재를 수출하는 걸 자랑하는 상황에서 열대우림을 보호하자는 캠페인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또한 당신네 미친 소에게 먹이는 콩 수입을 중단하십시오--우리나라 국민들이 우리 자신의 식량 수요를 우선 충족하기 위해 농업 생산을 조직할 기회를 주십시오. 이 나라에서는 5600만 명이 매일 굶주리고 있습니다." (493-94)

: 소비주의, 대중소비, 대중적 취향의 기저에 자리한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착취관계.


"우리는 현재 브라질 좌파 전체가 위기 국면을 거치고 있으며 좌파의 유기적 축적이 난관에 부딪혔음을 체감하는 중입니다--어느 정당이나 노동자당 내의 다양한 경향의 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말입니다. 이 위기는 복합적입니다. 첫째, 좌파에게는 브라질을 위한 뚜렷한 계획이 없습니다--다시 말해 좌파는 사회주의냐 자본주의냐, 라는 식으로 단순화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이 먼저 어떤 정책을 실천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정식화하지 않습니다. 둘째, 정당과 분파가 제도화하면서 대중 운동과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오늘날 좌파는 사회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조직화된 다수 민중이며, 민중은 투표가 아니라 투쟁을 통해 스스로 조직화한다는 점을 잊어버렸습니다. 투표는 시민권의 표현이지 투쟁의 형태가 아닙니다. 좌파는 오로지 우리만이 부르주아지에 대항한 대중 투쟁을 통해 힘의 균형을 바꾸어 갈 것이라는 믿음을 되찾아야 합니다. 타협, 곧 계급 간 압력을 조정하는 쪽을 선호하는 태도가 항상 존재합니다." (495)

: 이것이야말로 핵심이다. '공식적인' 정치운동은 어디까지나 부분에 불과하며, 그것은 동시에 (좌파운동 및 사회변혁에 있어 핵심적인) 대중운동을 고취시키기는커녕 가라앉히곤 한다. '공식적인' 정치운동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태도는 순진함의 극치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게 하나 있다. 내가 이렇게 시간과 (정신/육체)노동을 들여 키보드를 두드릴 때, 나의 소망은 이 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데 있다. 당연하지만, 이 글을 읽고 <좌파로 살다>에 흥미를 가진 분이라면, 돈이 없는 게 아닌 한 가급적 이 책을 사서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출판사 및 역자와 어떠한 관계도 없고, 심지어 이들의 재정상태가 어떤지도 전혀 모른다. 단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책을 지독하게 사지도/읽지도 않을 뿐더러, 책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조차도 독서와 도서구입을 단순히 개인적인 취향과 흥미의 차원에 국한해서 생각하곤 한다(이런 게 소비주의 정신이 우리에게 끼친 해악의 한 형태다). 분명히 말하건대 출판되는 책들은 전체 산업 및 산업을 구성하는 각종 노동자들의 노동의 결실이다. 책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은 노동의 대가가, 조금 더 노골적으로 그들의 생활비가 그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출판업을 포기하고 떠날 때 우리가 맞이하게 될 것은 책값의 상승과 당장 흥미를 끌지 않지만 중요한 책들이 더 이상 출간되지 않는 결말 뿐이다. 국내 저자의 연구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특히나 번역서의 경우 이런 사태가 진전될수록 우리는 마치 중남미의 국가들에 존재하는 급격한 빈부격차가 지식의 분배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영어나 불어, 일어를 읽을 수 있으며 해외 주문이 가능한 자본을 보유한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간의 지식의 격차는 압도적으로 벌어질 것이다. 지금 한국의 지적담론장에는, 적어도 나의 체감에 따르면, 이미 전체적인 수준의 하향과 함께 지식접근권을 가진 소수와 그렇지 않은 다수 사이의 급격한 양극화가 나타나고 있다. 이 문제는 결국에 보다 나은 비/공식적인 교육과 함께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더 많은 책들의 출간 및 구입/전달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진지한' 책들을 다루는 더 많은 도서관을 요구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우리 자신이 직접적인 구매자로 나서야만 한다. 시장-노동-임금(생활비)의 순환은 이론에 있는 게 아니라 현실의 문제임을 잊지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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