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베 다다시. <마루야마 마사오: 리버럴리스트의 초상>

Reading 2014. 8. 7. 12:59

가루베 다다시. <마루야마 마사오: 리버럴리스트의 초상>. 박홍규 역. 논형, 2011.


가루베의 책은 예전에 사놓고 (마루야마는 거의 셀렉션 수준으로 모아놓고 정작 읽은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그러나 <일본정치사상사연구>를 읽었을 때의 충격은 잊혀지지 않는다) 이제사 손을 댔다. 본문은 200쪽도 되지 않는 짧은 책이다. 처음에는 마루야마의 지적 전기 정도 생각하면서 읽었는데, 부제가 말해주듯 '자유-민주주의자', 곧 시민들의 자주적인/자유로운 삶을 강조하는 마루야마가 일본 파시즘기를 거치면서 어떻게 리버럴리스트가 되고 또 종전 후 일본사의 전개와 함께 그의 리버럴리즘이 어떤 난국에 부딪히는가를 간결하지만 솜씨있게 그려낸다. 아주 하드한 책은 아니지만, 사상의 형성, 전개와 구체적인 시대상의 상호작용을 추적한다는 점에서 전전-전후 현대 일본사(특히 1968년까지의)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참고자료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 점을 추가로 짚고 싶은데, 먼저 20세기 전반부의 일본 파시즘 및 파시즘 기 '사회'의 움직임은 물론 결코 동일시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지금의 한국 정치-사회의 움직임과 비교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즉 지금의 한국을 사고하는 데 좋은 비교대조군이 될 것이다), 조금 더 중요한 차원에서 '자유주의'가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로서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중요한 사례가 된다. 괜히 가루베의 책 영역본 제목이 <마루야마 마사오와 20세기 일본의 자유주의의 운명>_Maruyama Masao and the Fate of Liberalism in the 20-century Japan_인 것이 아니다.


즉 자유주의는, 맑스주의자들이 비판하듯 그것을 지탱하는 물질적 조건에 따라 파국적 상황에 처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것의 '완성' 자체가 하나의 난제, 곧 자유주의 하에서의 시민은 도대체 무엇에 지탱해서 삶을 지속할 수 있는가를 제기한다. 전후 일본의 물질적인 중흥 위에서 안보조약 반대운동을 보며 "시민의식의 성장"을 목도했던 마루야마가 1968년 이후 사실상 동시대의 정치적 조건에 대해 침묵한 것, 전통적인 무사계급의 의식연구와 같은 방향으로 선회한 것은 가루베에 따르면 한 자유주의 사상가가 마주한 난국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가 시민주체를 위한 윤리로서 타자와의 윤리와 같은 문제에까지 일찍이 이르렀음은--그가 포스트모던적 문제틀로 출발한 사람이 아님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확실히 비범하다--1968년 이후 서구 이론계에서 나타난 타자성의 윤리가 자유주의의 문제로부터 도출된 주제임을 비추어 알 수 있게 한다. 아마 가라타니의 후기 작업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조건으로서 이 텍스트를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돌이켜보면 가라타니가 마루야마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언어와 비극> 등에서 일본근대정치사상가들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은 마루야마를 가라타니가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어쨌든, 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귀결에 따라 본래의 자신과 상충되는 윤리적 계기들을 다시 도입하길 요구받는다; 이런 점에서 푸코의 후기 작업은 어쩌면 자유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비자유주의적 계기들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충성과 반역>과 푸코의 말기 텍스트들을 비교할 수 있을까?



P.S. 역자 후기에 잠깐 언급되지만, 일본 대학원의 세미나는 한국에서 상상하기 힘든 모습으로 진행된다. 지인의 이야기에 따르면 특히 박사과정은 코스웍이 있는 게 아니라 다수의 세미나로 진행되는데, 그 세미나에서는 교수고 학생이고 노인이고 청년이고 가릴 것 없이 '계급장'을 떼고 격렬한 토론을 주고받는다. 학생이 교수의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포함한) 논의에 어깃장을 전혀 놓을 수 없을 뿐더러 학생들끼리도 논쟁보다는 심심한 의견표명이나 주고받는--그리고 약간의 비판적인 코멘트로도 쉽게 '상처받는', 전혀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심성이 지배하는--한국의 분위기를 떠올리며 비교해보면... 갈라파고스니 뭐니 해도 왜 한국보다 일본에서 건실한 학자들이 계속해서 나타나는지, 정작 자국 학자들 간에 논쟁과 토론이 실종된 한국에 비해 일본에서는 아직도 거물급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깎아내리는 저술들이 출현할 수 있는지 조금 더 분명하게 이해가 된다. 언젠가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연구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면, 이런 점도 분명히 참고해야만 한다. 많이, 널리 읽고 교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학적인 주장은 치열한 검토의 반복을 통해 더 튼튼해지고 오래 살아남는 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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