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수업 기록[140318]

Comment 2014.03.18 11:44

첫 토론 수업이 무사히 끝났다. 내가 잘해서...는 아니고, 나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꿋꿋이 토론에 참여해준 것 같은 모양새랄까.

1차 과제 총평 및 다음 과제에 바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먼저 토론을 시작하기 전에 간략한 규칙들을 정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학생들에게 제시하고 이유를 설명한 뒤 동의를 구하는 형태. 항목은 다음과 같다. 원래 10개쯤 생각했지만 너무 길고 지리할 것 같아서 반으로 줄였다. 써놓고 보니 원래 한국어가 능숙하지 못한 학생을 위해 천천히 말하고 충분한 발언기회를 주자는 항목을 기획했는데 빼먹었다. 캠퍼스가 점차 다국적/다문화권/다언어권 학생들로 채워지고 있지만 거기에 걸맞은 교육은 학교에서, 심지어 인문대에서도 전무한 상황이라 이런 수업에서라도 기본적인 태도를 가르쳐야한다고 생각한다.

1) 토론을 하는 학생 서로 간에 예의를 갖추기. 스마트폰은 긴급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꺼내지 않는다. 2) 상대방이 지루하거나 동의할 수 없는 말을 한다고 해도 왜 그런 말을 할까 생각하면서 경청한다. 3) 계급, 인종, 성차/성적지향, 민족, 지역에 따른 차별적인 발언들을 하지 않기. 4) 떠오르는 의문들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되, 가능하면 근거를 대려고 노력하기. 5) 공격적인 언사, 깔보는 표현, 기분상하는 표현을 쓰지 않기.

그 다음에 간략한 강의를 했다. 특히 <아Q정전>은 배경지식의 유무가 독해에 제법 큰 영향을 끼치는 텍스트라... 루쉰이 문학공부를 선택하게 된 배경, 문언문에서 백화문으로--언문일치에 맞는 에크리튀르의 고안으로서의 근대문학과 근대작가들, 여성 3인칭 대명사의 최초 사용, "번역된 근대" 등. 원래 '국민성'과 같은 개념도 설명하려 했지만 여기까지 하니까 30분이 지나서...대체적으로 계속 아이컨택을 하면서 진행하니까 다들 열심히 들어주는 것 같긴 했는데, 속마음은 모르겠다. 20명 중 한두명이 잠깐 졸았다.

1차 과제에서 추려낸 질문들을 제시하고 조별토론을 시켰다. 원래 4명씩 5개조를 생각해서 5개의 질문을 제시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5명씩 4개조를 만들었다. 마지막 질문이 루쉰의 소설들을 비교하는 작업이었는데 다들 부담스러워서인지 이 질문은 피했다. 각 조마다 한 주제를 잡고 토론하고, 나중에 발표를 시키기로 했다. 처음에 20분 정도를 생각했는데 조마다 편차가 있었지만 열심히 고민하는 조도 있어서 5분을 더 주었다. 걱정했던 수준보다는 훨씬 나았고, 헤매는 조도 있었지만 나름 결과와 무관하게 깊게 들어가려 했던 조도 있었다. 가끔 돌면서 힌트를 한두개씩 주긴 했는데 잘 이해는 안 된 모양.

남은 20분 동안 조별 발표 및 질의를 했다. 첫 조 발표부터 애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제법 있었다. 질문 중에서 열심히 고민하다보면 다른 조 질문과도 연관되는 것들이 있어서 더 열심히 참여한 경우도 있었다. 다만 역시 열의가 있는 조와 아닌 조가 차이가 좀 보였고, 조 안에서도 활발하고 발언력이 강한 애와 구경하는 애들이 구별되긴 했다. 조별주제 발표니까 더 그렇게 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전체토론이었으면 애들이 다 잘 참여했을까?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전부가 그런 건 아니지만 자신의 자리에서 혼자 생각하며 침묵하는 것을 나름의 참여방식으로 삼는 사람도 존재한다) 발표내용이 다 좋은 건 아니었지만--사실상 조원들의 견해를 모아서 나열한 정도인 경우도 있었고, 뭐 그것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이야기를 하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나름대로 머리를 쓰고 근거를 대려 하면서 논쟁(?) 비슷한 걸 만들려 했던 학생도 있었다. 첫 주제부터 논쟁이 길어져서 뒤쪽 조는 조금 급하게 진행. 시간배분이 약간 아쉽긴 했다. 중간중간에 간략한 질문/코멘트를 하기도 했다. 물론 학생들에게 잘 이해가 됐는지는 모르겠고.

원래 토론이 좀 여유있게 끝나면 보충강의를 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시간이 꽉 차서 그럴 필요는 없었다. (수업시간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짐을 싸는 학생들...) 생각해보라고 추가적인 질문 두어 개를 주었는데 별로 마음 속에 도달할 것 같지는 않다. 지아장커의 영화 <소무> 얘기도 못했다.

수업 끝나고 돌아와서 보충공지를 올렸다. 참고문헌 목록도 올렸는데, 경험적으로 학생들이 당장 찾아서 볼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리고 학부 신입생들이 읽기에 어려운 텍스트들도 있고(<언어횡단적 실천> 같은 경우는 최소 학부 고학년은 되어야 좀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 모를 경우의 수가 있으니까.


아래는 학생들에게 제시한 참고문헌목록.

가라타니 고진. 『일본근대문학의 기원』. 박유하 역. 개역판. 도서출판b, 2010.
다케우치 요시미. 『루쉰』. 1961. 서광덕 역. 문학과지성사, 2003.
루쉰. 『루쉰전집2: 외침, 방황』. 루쉰전집번역위원회 역. 그린비, 2010.
리디아 리우. 『언어횡단적 실천: 문학, 민족문화 그리고 번역된 근대성-중국, 1900~1937』. 민정기 역. 소명출판, 2005.
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슈이치. 『번역과 일본의 근대』. 임성모 역. 이산, 2000.
지아장커(贾樟柯, Jia Zhangke). 『소무』(小武, Xiao Wu). 영화. 16mm. 베를린, 1998. [영문위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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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연 2014.10.18 01:24 신고 Modify/Delete Reply

    학부 1학년 수업을 하셨던 건가요(^-^)? 제가 BeGray님의 수업을 들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개인적으로는 지아장커의 [소무]를 수업 시간에 언급하지 못하신 것은 조금 아쉽게 다가오네요. 확실히 [소무]는 (잘 알고 계시겠지만) 루쉰의 [아Q정전]을 떠오르게 하는 영화여서 루쉰의 작품을 20세기 말 이후의 자본주의화된 중국이라는 시공간에서 생각해보기에 좋은 연결고리가 되었을 것 같거든요. 강의 이후에 많은 시간이 흘렀더라도 찾아 본 학생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BeGray님의 학생들이 이 블로그를 찾아오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명민하고 성실한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라는 말을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어요(^-^).

    • BeGray 2014.10.18 01:41 신고 Modify/Delete

      소개는 해주지만 학부 1학년 중에 무언가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 학생들을 찾기란 어려운 법이니까요 ㅎㅎㅎ 거기에 최근 여러 가지 제도적/비제도적 요인이 학생들의 마음을 (성적이나 평가와 다른) 학적인 것으로부터 떨어트려놓고도 있고. 일일이 다 적을 수 없지만 최근의 대학은 정말 사람의 정신을 성숙시키는 장소와는 점점 멀어져 갑니다... 며칠 전 어쩌다 지난 학기에 가르쳤던--본문에 적은 수업을 했던--학생들과 식사자리를 가졌는데, 불과 몇 개월 만에 완전히 또 남남이 된 듯한 아쉬운 기분만 드는 자리였습니다^^;

    • BeGray 2014.10.18 01:41 신고 Modify/Delete

      지아장커는 저도 더 구해서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어둠의 경로에 능하지 못해서(...) 영화 자체를 구하기가 어렵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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